[소성리엄니열전] (9) “소성리는 나와 같이 늙어가” /초희

나고 자라 평생을 소성리에서 살아 온 유선늠(83)

11:53

[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나고 자라 평생을 소성리에서 살아 온 유선늠(83)

초희 (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소성리
사드배치가 완료되어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킨 소성리. 유선늠 엄니에게 소성리는 삶의 전부다. 소성리가 엄니의 인생이다. 원불교 정산종사 생가 안쪽동네에서 바깥 동네로 시집왔다고 하여 ‘인동댁’이란 택호로 불렸다. 선늠 엄니는 팔십삼 년 전부를 소성리에서 보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언니가 일찍 시집을 가는 바람에, 열 살 때부터 부엌살림을 해야 했다. 학교 문턱은 넘어보지도 못 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정해준 신랑을 만났다. 한마을에 살아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였다. 노총각이라고만 들었다. 유선늠 엄니의 남편은 현재 소성리 노인회장인 신동옥 님의 맏형님이시다.

“동옥이랑, 봉정영감은 나랑 동갑내기라, 어릴 때 얼굴을 봤지. 우리 영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나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 많았으니까 내가 얼굴을 볼 일이 있었겠나. 아버지가 나이 많은 신랑 만나면 사랑받는다고 어른들끼리 의논해서 혼례를 치렀어.”

선늠 엄니가 시집간 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집에 데리고 오셨다. 혼자가 된 여동생이 새어머니가 해 준 밥을 먹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시댁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남편은 여덟 형제 가운데 맏이였다. 종갓집 며느리가 된 거다. 시누이 둘은 다 시집을 갔다. 남동생이 다섯이었다. 6.25전쟁 이듬해에 결혼하고 다음 해 남편은 징병됐다. 하필이면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에서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기간이 더 길어졌다. 선늠 엄니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5년이나 했다. 다행히 비좁은 집이지만, 며느리에게 방 한 칸 주어졌다. 다섯 살 난 막내 시동생이 새색시에게 찰싹 붙어서 엄마처럼 따랐다. 여덟 살짜리 시동생도 있었다. 어린 시동생들을 자식처럼 키웠다. 열일곱 종갓집 며느리에게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린 나이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다 배워야 하니까. 시어머니가 밥하라고 하면 밥하고, 빨래하라면 빨래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했어. 밭일도 했고, 농사도 거들면서 살림을 다 했지. 빨래거리가 어마어마해. 다 동생들이잖아. 그래도 다들 성격은 수월했어. 우리 시집 살림살이가 어려웠어. 시어른이 논 닷 마지기랑 밭 삼백 평 가지고 농사지어서 식구들 입에 거미줄은 겨우 면했지.”

남편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야 첫아이를 낳았다. 집안 첫 손자라 시어른들은 ‘옥이야 금이야’ 귀하게 보살폈다. 나락농사 짓고, 보리농사 지어 밥만 겨우 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늘 가난했지만 돈벌이가 마땅히 없었다. 마을 아낙들은 홀치기(비단 짜는 일)를 해서 돈을 벌었다. 그때 홀치기는 꽤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종갓집 며느리 선늠 엄니도 홀치기를 해보지만, 추석과 설을 포함해 일 년에 열한 번이나 되는 제사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 돈벌이가 될 리가 없었다. 선늠 엄니는 살림살이만도 벅차서 돈을 벌 기회가 없었다. 다른 이들의 돈 버는 이야기는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선늠 엄니 집 마당에 들어서니, 옛 모습이 얼핏 엿보인다. 낮고 얇아 보이는 양철지붕, 이제는 섀시로 창을 만들고, 부엌도 안으로 들여놓아, 홀로 사는 선늠 엄니가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수리를 했다. 옛날에는 방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나왔을 것이다. 부엌은 가스난로 대신 아궁이 불 때는 자리이지 않았을까? 지금도 방은 세 개 남짓 한데, 그 많은 식구는 한 지붕 아래 다 같이 비좁은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마당이 넓어 보이는 건 다섯이나 되는 시동생과 여섯 자식이 모두 떠나갔기 때문일 게다. 선늠 엄니가 살고 있는 집은 그 많은 식구들에게 어린 날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딸래미들은 학교도 제대로 못 보냈어. 아들들은 머리가 좋았나봐. 우리는 중학교까지만 보내줬지. 더는 안 되겠더라고. 다른 돈벌이 없이 나락농사만 지으면 겨우 먹고만 살거든. 지들이 다 알아서 하데,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했어. 아들들은 대학도 나왔어. 우리는 해 준거 아무것도 없어도 저렇게 잘 커 주고, 걱정할 것 없이 제 앞가림 다 하면서 살아주니까 다행스럽지.”

시어른이 물려준 재산은 보잘것없었다. 맏이가 감당해야 할 몫은 훨씬 컸다.

“우리도 시어른 모시고, 자식 키우면서 살아야 하니까, 논 닷 마지기는 우리가 해야지. 첫째 시동생 결혼할 때는 밭 삼백 평을 떼어 줬어. 둘째 시동생 동옥이 결혼할 때는 쪼매한 밭떼기하고, 쌀 한 말, 김치 한 단지랑 장작 한 구루마 해서 신혼살림에 보태줬어. 나머지 시동생들은 아무것도 못 해줬어. 지들이 다 알아서 장가가더라고. 내 자식들도 결혼할 때 아무것도 못 해줬어. 다 지들이 알아서 해갔지. 시동생이랑 자식들 자랄 때, 그냥 지들이 다 한 거지 뭐.”

시어머니는 몸이 허약해서 일찍 일손을 놓으셨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선늠 엄니 몫이었다. 시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했다. 젊은 시절, 남편과 소성리를 벗어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편찮은 시어른을 모셔야 했고, 도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선늠 엄니는 그냥 살아야 하는 거라고 믿었다.

소성리는 나와 같이 늙어갔다
시어른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다. 선늠 엄니만 남았다. 드디어 큰살림에서 벗어났다.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 기회도 생겼다. 과수원에 사과 딸 사람이 급하다고 이웃에서 연락이 왔다. 선늠 엄니 생각에는 자식들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앞가림을 했듯이 자신도 자식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 이웃사람들과 과수원에 품팔이 일을 열심히 다녔다.

직접 번 돈으로 생활하는 쏠쏠한 재미를 볼 때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수술까지 했다. 이후 품팔이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락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치료를 마치고 소성리로 돌아왔을 때, 선늠 엄니를 반가이 맞아 준 곳이 바로 마을회관이었다. 그 이후 마을회관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소일거리 삼아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할매들과 함께 밥 해 먹고, 화투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선늠 엄니 집 앞에 너른 텃밭에는 들깨의 초록이파리가 팔랑팔랑 거린다. 가루도 내고, 기름도 짜서 자식들 나눠 줄 욕심에 많이도 키운다. 아픈 허리 구부정하게 쭈그려 앉아서 김매기를 열심히 하신다.

“추잡아서 못 보겠어. 풀이 얼마나 많이 자라는지. 마을회관 다녀오면 요래 쪼매큼씩은 김을 매야지 안 그러면 풀밭이라.”

그런데 요즈음 선늠 엄니는 바쁘다. 할 일이 생겼다. 소성리 마을회관에 모인 할매들의 화두는 “사드철회”다. 선늠 엄니에게 사드가 뭔지 아시냐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면서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전쟁 무기라고 하데. 전쟁 나면 안 돼. 사드가 성산포대로 왔다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때 성주촛불에는 네 번 밖에 못 갔어. 늙은이들 델꼬 가는 게 쉽나. 사드 때문에 성주가 난리 난 거 다 듣고 있었어. 그게 와 소성리로 왔는지 몰라. 소성리에 온다고 했을 때 놀라서 나자빠질 뻔했어. 그게 전쟁무기라 카는데 와 소성리에 오는고. 우리 마을회관에 할매들이 다 놀라서 걱정이 태산이었지.”

사드배치 부지가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확정 난 이후 마을회관에 모인 할매들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걱정한다. 어떻게 사드를 막을지 의논했다. 선늠 엄니로선 사드를 막긴 막아야겠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같이하는 수밖에.

“우리 둘째 아들이 나이 들어 자식들 다 치우고 나면 여기 들어와 살라고 하거든. 사드가 들어오면 우리 아들이 여기서 살라 하겠나?”

지금까지 살면서 기억은 일한 것밖에 없다. 살림살이가 가난에 찌들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다 지났다고, 다 끝났다고, 꽃 같은 시절만 남았다고, 선늠 엄니는 마지막 남은 생을 소성리에서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순한지? 동서가 순한지?
사드가 들어오던 날 새벽, 적막을 깨는 사이렌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선늠 엄니 눈이 번쩍 뜨였다. 대충 옷만 걸쳐 입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세상은 깜깜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비좁은 동네 골목길을 걸었다. 마을회관까지 앞만 보고 걸었다. 경찰은 마주치지 않았다. 마을회관에 도착해 보니 경찰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드 발사대가 소성리 마을 지난 4월 26일, 경찰은 늙은 사람, 젊은 사람 가리지 않고 마구 떠밀어냈다. 선늠 엄니는 사드를 막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주려다 큰 사고를 당하셨다.

“할매들 뒤에서 떠민다고 밀어댔어. 나도 힘을 보태야지. 그런데 경찰이 확 밀어버리더만. 우리는 뒤로 확 넘어졌어. 누가 내 가슴팍에 누웠어.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 경찰인지 우리 편인지. 다른 사람이 병원에 가야지 하길래, 괜찮다 했는데, 자꾸 아파오더라고. 우리 동서가 내보고 형님 가보입시더, 해서 병원으로 갔지. 사진도 안 찍고 이리저리 보디만 타박상이라고 해. 병원에 하릴없이 계속 있기도 그래서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지.”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지낸 선늠 엄니는 가슴이 아파서 걸을 수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날 거 같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조심조심, 살살, 동네로 걸어 나왔다.

“우리 동서한테 야야 안 되겠다, 하면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더니 동서가 병원 갈 차를 불러 줬어. 어디 병원인지는 모르겠는데 CT를 찍어야 한다고 해. 구미로 가라고 해서 구급차를 타고 구미 병원 가서 사진 찍었지. 우리 아들이 경산에 살거든. 아들 집 근처에 있는 대구 시지 병원으로 갔어. 한 2주 정도 입원해 있었지.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까 여기 소성리 상황실에서 병원비를 다 대줘. 나는 힘도 안 됐는데 돈만 축내서 미안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엔 마을회관에 한참을 못 나가봤는데 많이들 보고 싶더라고.”

사드가 배치되던 날의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의 참상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선늠 엄니에게 국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사드가 들어올 때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막아섰다. 9월 7일 나머지 발사대 4기 추가 배치가 완료됐다. “저 사드 고마 치워가뿌면 좋겠어.” 엄니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사드가 오면 미군부대가 들어온다고 하던데, 저 길에 미군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꼴은 어떻게 봐”

소성리에서 팔십 평생을 살았다. 동서지간에 언성 한번 높인 적 없이 살았다. 형제지간 우애 있게 지냈다. 이제 살만해지니까 사드가 불쑥 찾아왔다.

“내가 순한가, 동서들이 순한가?” 선늠 엄니는 알 수가 없었다. 법 없이도 잘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제 와서 소성리에 경찰이 주둔하고, 사드가 들어오는 것을. 선늠 엄니가 살아온 세월을 총동원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