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김현경이 김수영에게로 돌아와 “생활의 원주 위에” 선 것은 1954년 말에서 1955년 초 즈음이다. 그들은 성북동에서 잠시 살다가 1955년 여름 어름에 서강으로 이사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서강 생활을 그의 삶에 있어서나 시에 있어서나 숨어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서강 생활이 김수영의 관념에 조금 더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일상이 조금 안정되면서 정신적·심리적 에너지의 낭비를 줄이고 보다 더 시에 열중할 조건이 주어졌다는 측면에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시에 생활의 건강이 맴돌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이다.
「너를 잃고」에서 보여줬던 “또 하나 다른 유성”이 구체적 방향을 잡아간 것도 아마 서강 이주 후 얻게 된 생활의 건강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시골 선물」에서 썼듯 그는 근대의 “소음과 광증과 속도와 허위”에 대해서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으나 그 “소음과 광증과 속도와 허위”의 복판에서보다 그 외곽에서 근대에 대한 응전에 필요한 양질의 힘을 충전 받을 수 있다. 근대의 외곽이 꼭 특정 공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확실히 시와 삶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역으로 감소시키기도 한다.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감각이 없는 ‘대지’란 공허하며 장소성을 상실하는 것은 각질만 두꺼운 관념 안에 유아적인 자아만을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김수영이 말년의 산문에서 “대지에 발을 디딘 초월시”를 운운할 때나, “체취가 풍기는 작품”은 “자기의 땀내” 나는 작품이라고 말한 것에는 구체적인 장소를 확보한 자신감이 깊게 배어 있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김수영이 그런 발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서강 생활이 그의 삶 안으로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서강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젊은 김수영을 치유함과 동시에 그의 시와 삶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어주었다. 서강으로의 이주가 김수영의 시와 삶의 중요한 분기점인 것은 여러 정황과 작품, 그리고 발언을 고려했을 때 더욱더 명확해진다.
김유중은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에서 「구라중화九羅重花」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바로 말라르메적인 사유의 핵심으로서의 꽃에 대한 관념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말라르메의 말을 옮긴다.
나는 꽃이여!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 목소리가 어떤 윤곽을 지워버리는 망각 밖에서, 꽃받침으로 알려진 어떤 다른 것으로서, 그윽한 이데아 그 자체가, 모든 꽃다발에 부재(不在)하는 것이 음악과도 같이 스스로 일어선다.(48)
김유중은 말라르메의 시론에 기대 「구라중화九羅重花」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좀 길게 인용해보겠다.
시인으로서 이상을 향한 그의 열망은 그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며, 연이어 그러한 자신의 열망을 담아 낼 “마지막 붓”을 들도록 요구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붓이 “이 시대를 진지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인식한다. 그는 스스로의 작업이 당대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도외시한 고도로 관념화된 작업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구절에서와 같이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대화된 공간 속에서,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라는 절대 존재에 대한 동경만을 안고 있는 그의 작업은 외부에서 볼 때는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시인다운 열망을 결코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동요 없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량의 환희”에 젖어 자신만의 고독한 글쓰기 작업에 몰입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이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 “나(시인)의 것도 아니며”, “누구의 것도 아닌” 꽃이다. 이 꽃이야말로 시인 김수영이 바라는 진정한 꽃이자 진정한 시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김수영이 이 시절 꿈꾸었던 것이 텍스트의 완성과 동시에 찾아오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가장 말라르메적인 구상임을 예감케 된다.(49~50)
그러나 김수영이 1954년 즈음에 얼마나 말라르메적인 분위기에 취해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거니와 설령 말라르메적 모더니즘을 수용했다 하더라도 김유중의 해석은 여러모로 과하다. 특히 “여기서 김수영이 이 시절 꿈꾸었던 것이 텍스트의 완성과 동시에 찾아오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가장 말라르메적인 구상”이라는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분명 「구라중화」에는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일단 ‘구라중화’(즉 글라디올러스)를 시의 피사체로 등장시키고 그 피사체에 집중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겹쳐놓으면서 상당한 난해성을 갖는데, 김수영의 시가 난해성의 외투를 어지간해서는 벗지 않는 특징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점은 특징이라고 부를 수 없겠으나, 「구라중화」와 「도취의 피안」을 통해 예술주의적 작품을 실험한 경향은 눈에 띈다.
하지만 ‘텍스트의 완성은 시인의 죽음’이라는 김유중의 해석과는 달리, 「구라중화」는 ‘꽃’이 갖는 상징성에 기대 “치욕”과 “부끄러움”이 사라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빛나는 시간’을 노래하고 있다. 물론 이 ‘빛나는 시간’은 “고독한 글쓰기”에 대한 은유도 아니며, “이데아”나 “순수 이념, 절대 이념”(49) 따위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 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 놓고 고즈너기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 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 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_「구라중화」 7연
현실적인 소유 관계에서 자유로운 꽃을 노래했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이데아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세계를 현상/본질, 허상/이데아로 구분해 보려는 초월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김수영의 시를 초월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김수영을 거꾸로 읽는 일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누구의 것도 아닌 꽃들”은 현실에 대한 (초월주의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김수영의 의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이라는 것은 기왕의 규정과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진 새로움을 의미하지만, 김수영이 참담한 현실을 회피하고 이른바 “진정한 시”를 구하고 있다는 시각은 김수영의 전체 시세계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김수영은 분명하게 자신의 현실이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이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이 둘러진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한 조건이지만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고 ‘구라중화’(즉 자신에게) 독려하고 있다. 또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의 선조(線條)뿐”인데 그 “선조도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가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숨어 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에서 멈췄다면 그냥 ‘평범한 난해성’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구라중화」의 핵심은 작품의 마지막에 숨어 있다. 그것은,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이다. 김명인은 이에 대해 “순간에 대한 집착이, 순간을 다투는 윤리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은 쇄말주의로 빠지기 쉽다”면서 김수영은 “이 현대주의 특유의 약점을” “감히 ‘죽음’의 무게를 빌려 와 보완하고 있”는데 「구라중화」는 “죽음과 부활을 거듭하며 삶의 고난을 이겨나가리라는 의식을 표백하고 있다”고 말했다.(『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110-111)
그러나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는 두 가지 관점을 ‘겹쳐’ 읽어야 한다. 먼저 「공자의 생활난」에서 보여준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김수영 특유의 목숨을 건 도약으로서의 시적 태도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몸으로 기어 통과한 전쟁에서 받은 공포와 충격을 통해 생성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그것이다. 김수영이 처음에 가진 죽음에 대한 관념은 전쟁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서 “치욕”과 “부끄러움”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그것은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는 전진뿐이다. 죽음에 대한 관념적인 태도나 정신주의적인 의지만으로는 주어진 현실을 넘어가지 못한다. 오직 죽음을 ‘사는’ 일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물론 여기서 ‘죽음을 산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모습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작품을 통해서 순간순간 현현하곤 곧 사라지는 시적인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적인 시간이야말로 산문적인 일상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죽임으로써 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현실을 초월한다는 것은 현실을 괄호 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현실을 괄호치는 것은 ‘초월(주의)적’인 것이지만 ‘초월론적’ 입장은 현실을 몸으로 짊어지고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월론적’이란 말은 ‘비판적’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초월론은 현실의 안락에 나태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태도의 다른 이름이다.
죄의식으로 점철된 이 세계를 ‘구라중화’처럼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현상을, 표면으로 번들거리는 이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초월론 즉 비판은 긍정을 모르는 허무주의와는 병립할 수 없다. 도리어 허무주의란 비판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닌가? 본질도 없고, 이데아도 없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세계를 더럽히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무구(無垢)하다는 자세여야만 현실에서 자꾸 고개를 드는 부정적인 것들과 투쟁할 수 있다. (훗날 4·19에 임하는 김수영을 보라!)
그래서 「도취의 피안」에서 김수영은 뭐라 했던가.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고 단호해진 것이다. 이 단호함은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한 태도에서 탄생하며, “도취”는 바로 ‘초월(주의)적’ 상태를 말한다. 「구라중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수영의 시는 명백하게 ‘초월(주의)적’이 아니라 ‘초월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는 이 점이 김수영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초월적’과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