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손영복 씨는 2015년, 수년간 작업실 터를 잡고 활동하던 방천시장(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철수했다. 방천시장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며 자본이 유입되고 중구청(청장 윤순영)도 적극적으로 상품화에 나서면서, 방천시장 공간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010년까지만 해도 방천시장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이 가능한 곳이었다. 작가들은 자유롭게 벽화를 그렸고, 그린 그림을 고치거나 다른 그림으로도 바꾸었다.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한 공간에는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손영복 씨 기억으로 평소에도 작가 수십 명이 작품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교류하던 곳이었다.
2009년 10월, 중구청이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주최할 때만 해도 손영복 씨는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했다. 중구청은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 조성 사업’에 나섰고, 손영복 씨는 김광석 길 입구에 조각 전시를 제안했다. 김광석이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는 조각이 김광석 길 초입에 들어서자 시민들도 즐겨 찾았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찍은 시민들은 조각 뒤로 길게 펼쳐진 벽을 따라, 벽화를 감상하고 여러 설치물에서 추억을 남겼다.
2017년 9월 4일, 김광석 길을 다시 찾은 손 씨는 김광석 조각을 은박지로 둘둘 말았다. 중구청이 8월 16일, ‘김광석다시그리기길 관광인프라 개선사업’ 입찰 공고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손 씨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해, 여러 예술가들이 창작한 작품을 중구청이 제거한다는 방침에 문제를 느꼈다. 이대로라면 김광석 길 사업에서 중구청은 갑, 업체는 을, 작가는 병의 위치다.
손영복 씨는 “이곳은 작가들이 자유롭게 벽화 작업을 하던 곳이다. 방천시장을 떠나면서 그래도 관리는 구청이 문제없이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업체를 입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중구청에 따르면, 이번 사업 공모는 “기존 벽화와 콘텐츠 등의 리뉴얼(renewal) 필요성에 따라” 추진된다. 총 사업비 2억 원의 공개 입찰을 통해 선정되는 업체는 사업 착수일로부터 90일 안에 김광석 길 일대의 설치 시설물 제작, 부대공사, 사후관리 및 유지보수 방안 수립 등을 해야 한다. 중구청은 9월 14일 업체들로부터 제안서를 접수하고, 15일 1차 적격 업체를 선정할 계획이다.
중구청의 사업 과업이행요청서에는 법률적 책임은 사업자가, 소유권은 중구청이 진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사업수행자는 관계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로 인한 모든 피해 사항에 책임을 지고, 특허권 등의 권리를 사용할 때에는 사업수행자가 그 권리 사용에 관해” 일체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사업 수행으로 얻는 작품과 자료, 저작권 등 법률적 행위의 모든 권한은 대구 중구청의 소유로 한다”고도 못 박았다.
작가의 참여도 “작가 1명당 작품 3점, 10인 내외의 작가로 구성”하도록 제한됐고, “일정 기간(2년) 경과 후 벽화·조형물이 퇴색되어 리뉴얼(renewal)이 필요한 경우 수급자의 동의 없이 대구 중구청의 판단으로 벽화·조형물을 철거할 수 있다”라고도 나와 있다.
4일 오후 2시, 김광석 길 앞에서 인디053, 니나노프로젝트예술가협동조합, (사)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대구지회는 중구청의 ‘관트리피케이션’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주최 측은 “김광석 길은 누구의 지시나 사업 발주 형태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의 자유로운 참여로 시작됐다”라며 “중구청은 작가의 동의 없이 작품을 철거할 수 있고, 인기투표로 인기 없는 작품은 철거하고 높은 작품 위주로 보존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어 “민간에서 이룩한 성과를 행정이 일방적으로 가져간 ‘관트리피케이션’”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중구청 비판 성명에도 전국의 문화예술인과 시민 200여 명이 참여했다.
김남훈 중구청 관광시설담당 계장은 “기존 작가와 최대한 협의 통해서 동의를 구한 다음에 조치할 것이다. 전부 철거되는 게 아니고 좋은 작품은 남겨둘 것”이라며 “관광객의 의견도 들을 것이다. 이 작품 중 얼마만큼 철거될지는 모른다”라고 설명했다.
김남훈 계장은 “(철거가 필요한 작품에 작가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공공시설물이기 때문에 (중구청이) 철거할 수도 있다”라며 “사업에 여러 작가들도 논의에 들어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