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김수영이 처음 쓴 시는 「달나라의 장난」이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는 1953년 5월 13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달나라의 장난」은 1953년 《자유세계》 4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달나라의 장난」은 1953년 4월 이전에 써졌다는 말이 된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_「달나라의 장난」 전문
김수영은 1959년이 되어서야 첫 시집을 발간하지만 1968년에 불의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다시 시집을 발간하지 않았다. 그리고 1974년에 시선집 형식으로 『거대한 뿌리』를 냈으니까 그는 생전에 딱 한 권의 시집을 낸 것이 된다. 첫 시집의 제목은 ‘달나라의 장난’이다. 1959년 당시 시집의 제목을 정할 때 어떤 문화적 흐름이 토대가 되었는지 잘 알지는 못하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표제작을 「달나라의 장난」으로 삼은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김수영의 작품 중에 「달나라의 장난」은 상대적으로 난해하지 않은 작품처럼 보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렇지도 않다.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천년의상상)에서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공통된 그 무엇”을 인식의 일반성/상투성으로 읽었고, 김유중도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에서 “일상성이 가지는 무반성적이고 반복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정식으로 비판을 제기”했다고 읽었다. 즉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팽이이다. 줄을 감아 던지기만 하면 내버려두어도 저 혼자 도는 팽이의 비애는 그만 돌고 싶어도 스스로는 절대 멈출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읽은 「달나라의 장난」은 ‘나의 설움’을 간과한 오독에 지나지 않는다. 또 “공통된 그 무엇”의 대립항으로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이라는 구절을 놓고 접근한 탓에 이 시가 갖는 풍부함을 평면적으로 마름질하고 말았다. 강신주는 김수영 시를 일반성/독특성이라는 개념으로, 김유중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김수영 시를 연역함으로써 도달한 논리적인 결론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적 화자의 어떤 처지이다.
조금 더 산문적으로 시를 풀어보면, “나”는 볼 일이 있어서 어느 집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뜻하지 않게 그 집 마당에서 어린이가 팽이를 솜씨 있게 돌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팽이를 돌리면서 “노는 아해”의 행위와 도는 팽이가 신기해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나”에게는 “아해”의 팽이 돌리기 놀이도, 그리고 “까맣게 변하여 서서” 도는 팽이도 신기로울 뿐이다. 왜냐면 팽이를 돌리는 “어린 아해”와 도는 팽이가 보여주는 것은 “나”가 처한 현실을 초월한 “별세계” 같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적 화자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그 “별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중인데, 이것은 일종의 도피이면서 궁극적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도 읽힌다.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이 작품에 이야기성을 부여해 주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다.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 등등. 조금 더 추측을 밀고 나가면 이 작품의 “나”는 지금 어떤 사람에게 꺼내기 힘든 어떤 말(혹은 부탁)을 하러 왔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이 떨어지지는 않고 대신 “노는 아해”가 돌리고 있는 팽이가 만들어 내는 어떤 환영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거나 혹은 빠져들고 싶은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1953년이면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해이고,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친구와 살림을 차린 “부실한 처”(「조국에 돌아오신 상병 포로 동지들에게」)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생활은 궁핍했을 테고, 두 동생은 전장에 끌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나”가 “이 집 주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어서 왔는지 그 구체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설움이다. 어쩐지 자신만큼 궁핍하고 서러운 삶은 없을 것 같은 나르시시즘에 휩싸이는데 이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심리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노는 아해”가 돌린 팽이는 마치 “달나라의 장난”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는 팽이가 연출하는 “별세계”가 자신의 현실이 아닌 것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차라리 그 “별세계”가 현실이 될 수 없는 상황이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도리어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다짐하고 있는 중)인데, 주어진 현실은 “나”를 서럽게 하는 것들뿐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은 평생 동안 김수영이 언제든 자기 자신에게 내려치는 채찍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공자의 생활난」에서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리는 것은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이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가졌기에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자신의 처지를 말(부탁)해야 할 사람 앞에서 느낀 비참이 그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김수영은 팽이가 돌면서 자기를 비웃고 있다고 돌려 말한다.
강신주와 김유중이 오독한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에서는 “듯이”에 주의해야 한다. “팽이”가 만들어내는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에 대비된 현실은 너무 누추하기에, 차라리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강조-인용자)/ 서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도리어 자신의 “운명과 사명”마저 “비웃는” 현실의 강력함을 반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도는 팽이’를 통해 김수영은 자신이 속한 현실에 대한 비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는 팽이’가 살짝 보여주는 “별세계”에 잠깐 심취해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작품에서 김수영의 시가 궁극적으로 가 닿고 싶은 무의미의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본능적으로 직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바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 ‘바로 보기’, “속임 없는 눈”은 단순한 윤리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현실을 어떤 규정과 틀로 해석하지 않으려는 김수영의 리얼리스트적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평생에 걸쳐 추구되는 그만의 규제적 이념을 표상하고 있다.
김수영이 이 작품을 쓸 당시는 전쟁의 깊은 상흔이 분명히 남아 있을 때였다. 희한하게도 김수영은 전쟁의 비참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이렇게 전쟁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설움’과 ‘비참’을 노래하는 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자신의 전쟁 기억이 너무 압도적이어서일 수도 있고, 두 번째로는 그 기억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몸부림은 그나마 그의 시에서 나르시시즘 같은 부정적인 심리를 배척하는 데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압도적인 전쟁의 기억을 한동안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골방으로 추방된 것처럼 보이던 그 기억이 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무의식은 추방된 기억이라기보다, 의식의 세계를 최종 승인하는 심급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