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쟁은 거기서 끝이 나버렸으면, 이런 일도 없겠죠. (그런데)세월이 가면 갈수록 (원폭)피해자는 더 늘어난다는 거···. 저희는 실제로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감히 이런 소송이라든지, 조정 신청이라든지, 상상도 못 했다. 그래도 변호사님께서, 많은 분이 도와주시고, 시민단체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이렇게 나와서 ‘저는 아픕니다. 이렇게 아프고, 피해자로서 아픕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 원폭 2세 환우회 부회장 한정순(58) 씨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3일 오후 3시 20분께, 원폭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조정신청이 대구지방법원에 접수됐다. 원폭 피해 2세대 한 씨를 포함해, 3세대인 그의 아들(34), 1세대인 이 모 씨(77)와 그의 남편 김봉대(79) 씨도 함께 조정 신청 당사자로 이름을 올렸다. 김 씨와 이 씨는 처음으로 원폭 2세대 피해를 사회에 알린 고故 김형률(2005년 사망 당시 35세) 씨의 부모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추정하는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피해자는 7만 명이다. 이 중 4만 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형률 씨의 어머니 이 씨가 원폭 당시 6살로 히로시마에 있었던 1세대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이 씨 등 1세대 피해자들은 각종 후유증상으로 피해를 입었고, 현재도 고통받고 있지만 미·일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선 적극적인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겨우 제정됐지만, 법에 따른 피해자 실태조사가 지난 6월에야 시작됐을 뿐이다. 이마저도 1세대 피해자로만 대상을 국한해서 한 씨와 그의 아들을 포함한 2, 3세대 피해자는 여전히 사각지대로 남았다.
최봉태 변호사(법무법인 삼일)를 단장으로 해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구지부 소속 변호사 등 29명을 법률 대리인으로 한 소송대리인단은 이번 조정 신청을 시작으로 원폭 피해자들의 치유, 권리구제를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들은 조성 신청 대상으로 미국, 한국 정부를 비롯해 듀폰(E. I. du Pont de Nemours and Company), 보잉(The Boeing Company),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Corporation) 등 원폭 제조와 투하에 책임 있는 기업체를 꼽았다.
이들은 ▲원폭 투하 행위가 위법행위고, 미국이 이에 국가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고, ▲미국이 원폭 투하에 의한 피폭자에 대한 관련 정보 및 자료를 공개하고 사죄할 것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과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에 대한 협의를 이행할 것 ▲한·미 정부, 원폭 관련 기업체들이 한국인 피폭자 실태 진상조사에 협력할 것 ▲피해회복 재단을 만들고, 손해를 배상할 것 등을 요구했다.
최봉태 변호사는 손해배상 민사소송이 아닌 민사조정 신청을 한 이유에 대해 “민사 소송을 통하면 피고가 원고에게 얼마를 배상하라는 판결 외에 다른 요구 내용에 대한 판결이 불가능하다”며 “원폭 피해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원하는 게 단순히 돈을 받겠다는 것 외에 진상 규명과 관련된 내용, 사죄 같은 것들이 더 와닿는 것들이어서 조정신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2011년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원폭 피해자 배상을 위한 외교적, 법률적 노력을 기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은 있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이 원자 폭탄을 사용한 것이 위법 행위라는 걸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법적 대응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에선 1963년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미국의 원폭 사용이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판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