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엄니열전] (7) “우리 할마이들이 ‘사쓰’는 쫓아주고 가자” /초희

소성리로 돌아올 큰아들을 기다리는 성주댁 임길남(87세)

18:23

[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소성리로 돌아올 큰아들을 기다리는 성주댁 임길남(87세)

초희 (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뜨거운 땡볕 아래 경찰복을 입은 앳된 청년들이 도롯가에 서 있었다. 롯데골프장으로 가는 손님들 발길이 끊긴 소성리 마을 앞 도로는 휑했다. 미군 통행을 허락할 수 없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담긴 경계 테이블이 있다. 소성리 할매들은 목욕의자에 둘러앉아서 지나가는 차들을 지켜보았다.

▲[사진=초희]
지난 6월 22일 서북청년단 등 비롯한 수구 세력들이 ‘사드 찬성 집회’를 위해 소성리를 찾아왔다. 현수막을 찢고, 깃발을 부러뜨렸다. 마을 안을 쏘다니면서 주인도 없는 집안에 들어가 수돗물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마침 부녀회장이 밭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 여럿이 위압적으로 부녀회장을 에워싸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행패를 부렸다. 한 늙은 영감은 오줌을 갈기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당황하고 겁에 질린 부녀회장은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 있던 경찰이 달려와 그들을 떼어냈다.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수구 세력의 행패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단 한 발자국도 마을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매일 같이 수구 세력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사드 때문에 골병이 날 지경인데 서북청년단인가 하는 ‘잡것들’ 때문에도 속이 문드러지는 길남 할매 집은 바로 길가에 있다. 사소한 싸움 소리까지 다 들어야 하는 할매는 숟가락에 얹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세금 내서 경찰들 먹여 살리는 데 와 저것들은(경찰들은) 미국을 위해서 일하노? 저거(사드)는 우리나라에 와서 애먹이는데, 경찰은 우리한테는 힘도 안 써주고, 우리는 도움도 못 받고, 미국경찰 하려거든 미국 가라. 우리가 농사지은 걸로 밥 먹지 말고, 미국 가서 밥 먹어라.”

임길남 할매가 살아온 이야기

길남 할매가 옆에 있는 조실댁 할매를 보며 묻는다. “내가 여기 몇 살에 시집 왔노? 6.25전쟁 때 스무살이었제? 2년 지나고 시집왔으니까 스물둘에 왔네.”

“내가 열아홉에 6.25전쟁 일어났는데.” 조실댁 할매가 대답한다. 길남 할매가 “니가 내보다 한 살 어리자나” 하니 조실댁 할매는 “맞네” 하신다. 두 분 얘기가 정겹다.

성주읍에서 시집왔다고 길남 할매 택호는 ‘성주댁’이다. 길남 할매는 성주군 공무원인 오빠네 그늘에서 올케와 살았다. 옆집 할매 중신으로 소성리로 시집을 왔는데 혼례를 치르는 날까지 신랑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왔다. 혼례를 치를 때도 부끄러워 신랑 얼굴을 못 봤다. 나이는 동갑. 신랑은 섣달(12월)에 태어난 길남 할매보다 열 달 빠른 삼월 생이었다. 스물둘에 시집와서 여든일곱까지 65년 세월을 소성리에서 보냈다. 신랑은 이십 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떴으니 길남 할매가 소성리에 산 세월이나 신랑이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 세월이나 비슷할 거다.

“이 골짜기가 얼매나 좋노? 시집와서는 사쓰도 보고.”(모두 웃음이 빵 터짐) 길남 할매에게 “할매, 사쓰가 아니고 사드라요”하고 해보지만 길남 할매는 ‘사쓰’라며 더 강하게 말씀하신다. 도무지 고쳐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사쓰’라 말씀하시면 ‘사드’로 알아듣는다.

“시집와보니까 나락이 한 가마니도 아니고 반 가마니가 접혀 있더라고, 그거 가지고 쑥 뜯어서 밀가루를 샀던가? 아마 농사지어서 빻아 먹었을끼라. 먹고 살라고 그랬는지 그게 그래 맛있대. 쑥에 밀가루를 버무려 쪄서 먹었어. 보리는 오월에 추수하니까 그것도 양식으로 먹고, 모매꽃 피는 것 봤수? 논에서 피는 꽃이 있는데 하도 먹을 게 없으니까 그 모매꽃 뿌리를 뽑아서 먹었어. 엄청 독하거든. 보리 수확해도 옳게 안 익고, 농사도 얼마 안 지으니까 늘 먹을 게 부족했어. 거의 굶으면서 살았지. 그때 비하면 지금 농사는 천석만석꾼이라.”

시댁 논은 다섯 마지기였다. 농사지어서 입에 거미줄은 치지 않겠지만, 부족한 살림살이였다. 신랑은 농사를 지었지만, 길남 할매 친정오빠 소개로 군청 일을 한 적도 있었다. 2년 정도 하다가 월급쟁이보다는 장사해야 돈을 벌 수 있다며 군청 일을 그만두고 산판(벌목 또는 그러한 일을 하는 곳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 일을 시작해 나무를 팔았다. 나무를 팔고도 여섯 군데서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손해가 막심했다.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 나는 등신 같아서 우리 영감이 군청 그만둬도 왜 그만두는지 묻지도 않았고, 산판일 할 때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몰랐어. 그냥 농사일만 했지. 나락농사 짓고, 보리농사 지어 수확하고 나면 그 자리에 콩 심어서 수확하고 농사밖에 몰랐어. 그때는 등신 같아서 따질 줄도 모르고 살았어.”

길남 할매는 아들 넷에 딸을 하나 낳아 키웠다.

“딸을 하나 더 낳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우리 애들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겨우겨우 시켰는데 딸이 늘 하는 말이 ‘엄마 나 학교 공부 조금만 더 시켜줬으면 지금보다 더 나을 텐데’ 하는 거라. 당시엔 없는 집구석에서 딸까지 고등학교 보낸다고 사람들이 흉을 많이 봤거든. 우리는 형편도 안 돼서 지가 벌어 야간고등학교를 나오더라고. 아직도 공부 못한 게 한이 되나봐.”

▲[사진=초희]
가난한 시절,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옛날에는 버스주차장이 길남 할매 집 앞에 있었다. 지금의 소성리 편의점 자리에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버스 기사와 조수, 그리고 안내양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걸 길남 할매 집에서 했다. 막내아들을 갓 낳았을 때였다. 산후조리는 일주일도 하지 못하고 바로 손님을 맞았다.

“옛날에 산후조리가 어디 있어. 밭에서 일하다가 애 낳고 또 일했지. 우리 옆집 할매는 논에 일꾼들 들여서 모 심는 날인데 배가 아파서 집에 갔대. 그러고는 애를 낳았지. 밥은 해야 하고, 애는 나오고, 점심밥 소쿠리를 이고 논에 갔더니 영감이 막 화를 내더란다. 밥 늦게 가져왔다고. 그러니까 그 할매가 성질이 나서 ‘내가 아 낳고 밥해온다고 늦었다 아니요!’하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대들었다 카더라. 그 시절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히는 거라.”

길남 할매도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등에 둘러업고 시작한 버스회사 기숙사 일은 막내가 열일곱이 될 때까지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도움이 컸다.

“우리 집 딸이 명희라. 애를 갓 낳고 일을 하려니 일이 되나. 뻑 하면 ‘명희야 요거 가져오너라’, ‘명희야 이거 치워라’, ‘명희야 이거 갖다 놔라’ 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시켜댔지. 딸이 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영감이 미워죽겠어. 생전 일 도와줄 생각은 안 해. 밥상을 차려놔도 내가 없으면 안 먹어. 내가 이뻐서가 아니라 내가 챙겨주는 것만 먹어. 자기 손으로 안 하고 나를 시켜먹으려고 그런 거지. 그런 신랑이 이쁠 턱이 있겠나. 하나 있는 시누 시집보내고 나니까 식구가 아무도 없지. 제사를 지내려면 전을 구워야 하는데, 우리 영감은 초저녁부터 친구들 집에 데려와서는 술상을 차리게 해. 영감은 생전 술집으로 나가서 술 마시는 법을 몰라. 꼭 집으로 데려와서는 술을 먹이고 잠까지 재워. 술상 차리는 거 때문에 아주 미워 죽겠더라고. 그래도 싫은 내색 한번 못하고 등신같이 다 해줬어. 하이고 참.”

그 시절 비슷한 또래 처자들이 소성리에 시집와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낳아서 같이 키웠다. 길남 할매 큰아들은 현재 소성리 마을 이장과 함께 자랐다. 이장이 어렸을 때부터 쭉 지켜봤던 길남 할매는 엄마뻘이다. 놀잇감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굴러다니던 돌과 작대기는 모두 아이들에겐 장난감이었다. 작대기와 돌만 있으면 야구놀이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누가 머리라도 맞아서 피라도 나면 쑥을 찧어서 발라줬고, 큰 상처는 된장을 발라줬다.

집집마다 소 한두 마리는 키우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진밭(현재 사드장비가 들어온 자리)에 소를 끌고 가서는 풀 뜯어 먹이고 방목했다. 저녁이 되면 마을 아이들은 소를 데리러 진밭으로 갔다. 도망이라도 갔는지 소가 안 보이면 사방팔방을 쫓아다녔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은 집안에서 맡은 일이 있었다. 그것도 못하면 밥도 얻어먹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알맹이가 잔 감자를 삶아서 나눠 먹으라고 소쿠리에 담아두었다. 막내아들은 형들과 누나에게 치여서 양껏 먹지 못하니까, 혼자서 다 먹겠다는 욕심에 소쿠리를 들고 뛰다가 문지방에 걸려 자빠졌다. 이마에 피가 흥건했다. 아직도 막내 이마에는 흉터가 남아 있다. 가난의 흔적이다. 배곯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혼자 먹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벌 받은 막내를 생각하면 길남 할매는 세월이 이만큼 지났는데도 쓸쓸한 헛웃음이 난다.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사는 데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길남 할매에게 소성리는 도시로 나간 큰아들이 돌아와야 할 고향땅이다. 돌아왔을 때 농사라도 지을 수 있도록 남은 땅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길남 할매는 낫을 들고 집 뒤편 밭으로 가는 길에 난 풀을 베고 있다.

“나는 빨리 죽을 줄 알았어. 이렇게 고생하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다 보니까 죽는 게 안 무섭더라고. 내가 너무 아프니까, 우리 동생이 나를 데리러 왔어. 병원에 가니까 암 초기래. 디스크수술도 했지. 그래도 안 죽어. 작년에도 아랫배에 결석이 생겨서 아주 아프더라고. 초저녁에 아파서 보건소를 찾아갔어. 직원이 방에 들어가서는 약을 한 봉지를 주는데, 이거 먹고 안 나으면 빨리 병원 가래. 병원 가도 몰라. 괜찮다고만 하데. 집에 돌아왔는데도 아프더라고. 그날 밤 아들네가 우리 집에 왔어. 밤에 자는데 너무 아파서 아들 차를 타고 대구시내 큰 병원에 갔지.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으니까 죽어도 괜찮다고 해도, 자꾸 병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해. 그래서 다시 살아왔어.”

가만히 듣고 있던 금연 할매가 “살아서 돌아오니까 좋잖아. 사드도 들어오고.” 해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소성리, 알고 보니 투쟁의 역사가 서린 곳

살다보니까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골프장 온다고 반대 데모를 한창 했었다. 땅도 오염되고, 물도 오염되고, 사람한테 해롭다고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아무리 싸워도 결국 골프장이 들어왔다. 길남 할매는 땅도 얼마 없고, 보상받을 것도 없었다. 도시로 나가고 싶어도 처분할 땅이 얼마 되지도 않으니, 도시에 나가 살 형편이 못되었다. 소성리에 주저앉았다. 큰아들은 소성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골프장이 들어설 때 열심히 반대했다. 농사일이 지긋지긋하고 골짜기가 답답했던지 큰아들은 농사를 접고 도시로 나갔다. 빈 몸으로 나간 도시 생활은 고생스럽기만 했다. 가난한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골프장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는 아랫마을 물 내려 준다면서 소성못을 만들었다. 그 넓은 땅을 정부가 다 수용했다. 당시 소성리 마을은 130가구로 아주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그때 절반 정도 겨우 남아있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길남 할매는 사드가 들어온다고 할 때 사람에게 해롭다는 것만 알고 반대했다.

“미군부대 들어오는 것은 몰랐지, 4월 26일에 안 들어왔나? 그날 미군들이 들어온 거 보고는 깜짝 놀랐지. 그날 경찰이 몇 명 왔노? 8,000명? 집집마다 다 막았다메? 그날 유선늠 할매 다쳐서 병원 안 갔나? 경찰들한테 끼여서 갈비뼈 큰일 날 뻔했잖아. 무섭기도 하고, 그놈들(미군들) 웃으면서 들어갔다메? 우리가 애를 먹었지. 말리지도 못하고. 기가 차. 소성지에, 골프장에, 사드까지 들어오고. 재미있는 일도 없고. 죽지 못해 살지. 무슨 재미가 있어서 살겠노? 돈을 많이 벌어 재미나나? 그래도 우리가 (사드) 쫓아주고 죽어야 할낀데.”

길남 할매는 목소리를 낮춰 내 귀에 바짝 대고 “서북청년단 그 놈들 일당 받아먹고 다닌다메? 여기 와서 돈 받아서 나누는 거 봤다더라. 마을 사람들이 그거 보고는 혀를 둘러찼다더라. 태극기, 성조기 막 휘두르고 사진 찍어서는 돈 받고 다니는 건 와카는 거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자식들은 나이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모두 환갑을 지낼 나이다. 도시 나가서 잘 살면 다행인데 길남 할매 보기에는 사는 게 다 시들시들, 고달파 보인다. 자식들 나눠 줄라고 길남 할매 밭에는 깻잎이며, 도라지며, 약나무가 잘도 자란다. 깻잎은 기름 짜고, 가루 만들어 자식들 나눠주려고 넉넉하게 심어놓았다. 그러면 자식들이 또 용돈을 두둑이 보내온다. 길남 할매만의 노후 생활방법이다.

▲[사진=청년 사진가]
아침에 눈 뜨면 밭에 나가 풀 베고, 오전 11시경 마을회관에서 놀다가 할매들과 점심을 먹고는 화투로 여가를 즐긴다. 시원한 저녁 무렵에는 밭을 돌본다. 작은 낫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쓱쓱, 싹싹 힘도 들이지 않는 듯 풀을 벤다. 길남 할매는 아들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자식들은 힘들다며 밭일을 그만두라고 한다. 그러나 길남 할매가 잠시라도 일손을 멈추면 집 뒤편 밭은 ‘쑥대밭’이 될 게 뻔하다. 아들이 고향 소성리로 돌아오는 날에 농사짓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길남 할매는 힘이 닿을 때까지 일손을 멈출 수가 없다.

화투놀이로 한참 앉아 있어 몸이 피곤했던 할매들이 방에 드러누웠다.

“우리가 (사드 때문에) 난리를 만났다. 우리가 쫓고 죽어야 할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우리 할매들 힘이 있냐마는 그래도 우리 할매들이 쫓아주고 가야제? 여기 할매들 그냥 막 죽어뿌면 안 된다. 알았제? 우리 할 일이 생겼으니까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사드는 막아주고 죽어야제!”

우스갯소리에 모두 웃음보가 터진다. 함께 웃었지만 나는 서러워졌다. 오늘도 길남 할매는 아들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면서 풀을 뜯으며 사드를 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