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정술엄니가 ‘사드철거’데모를 하는 이유, 권정술(77세)
초희 (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김치 싸대기 사건
“김항곤 야, 이 개XX야! 너는 성주군수 아니야. 너는 내 마음에서 지웠어. 나는 이제부터 항곤이를 항고니로 부를 거다.”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이 김치를 버무리고 있던 성주군수 김항곤 씨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11월 말이면 성주군 10개 읍·면이 모여서 김장을 한다. 임 회장도 매년 참석한 행사이지만, 이번만은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초전면 부녀회도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소성리 싸움을 잘하라며 배려해주었다.
김장 행사는 배추를 절이는데 하루, 물기를 빼는데 하루가 걸린다. 물기가 빠진 절임배추를 트럭에 한가득 실어서 행사장으로 옮겨놓는다. 김치를 버무릴 때 군수가 ‘짜잔’하고 나타나서 ‘버무리는 척’만 하는 모습을 면 단위별로 사진을 찍는다. 군수가 오기 전에 이미 김치는 수백 상자 담아서 쌓아놓는다. 그리고 성주군의‘이름 있는 높은 양반’들은 죄다 모이는 날이라 김장김치에 어울릴 수육을 삶아서 잔치를 연다.
2016년 11월 말이었다. 김장 행사 전날 밤, 성주촛불에 참석했던 임 회장과 할매들은 내일 있을 행사에 군수 잡으러 가자고 의논했다. 다음날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할매들에게 군수 잡으러 가자고 하자 ‘좋아라’하며 나선다. 행사 당일 날 임 회장은 이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장님, 나는 군수가 용서가 안 된다. 군수 잡으러 갈란다. 차 운전 좀 해주이소”하고 부탁했다.
애초 군수는 오후 2시께 김장 행사에 오는 걸로 알려졌다. 성주군 공무원들이며, 초전면장이 소성리 마을 동향을 살피면서 수상한 낌새를 챘다. 3시경 도착할 것 같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임 회장과 할매들은 한 시간 일찍 행사장 뒤편에 주차를 해놓고 차 안에 숨어있었다. ‘플랑’을 들고, 구호도 외치기로 했다. 당당히 행사장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군수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차문을 열고, 머리띠를 메려는데 초전면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초전면장이 군수에게 전화한다. 젊은 축에 끼인 사람들은 다급해져서 느려빠진 할매들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플랑’을 들고 먼저 내달렸다.
행사장으로 들어서면서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군수가 안 보인다. 되돌아서 나오려는데 용봉영감이 임 회장에게 눈짓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두 번째 탁자에서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성주 군수는 흰 모자를 쓰고, 앞치마에 빨간 장갑을 끼고 서 있는 거다. 몰라 볼만 했다.
초장에 기세를 잡아야 했다. 군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앞으로 내달려 임 회장은 대뜸 “김항곤, 이 개XX야”하고 소리쳤다. 몇 사람이 군수를 잡고 욕을 하기 시작하자 군수는 장갑을 벗고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한판 붙어야 했다. 군수는 옆 사람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도망가기 시작했다. 군수 일행 세 명이 달리기 시작했다.
앞자리에는 김치 버무리는 탁자가 있었고, 뒤로는 수육을 삶느라 김이 폴폴 나고 있었다. 그사이 남자 세명이 뛰기 시작했다. 쪽문을 열고 나갔다. 임 회장 일행 세 명도 뒤따라 쫓아갔다. ‘톰과 제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달려가던 군수가 자동차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삐죽 내밀어 뒤를 돌아본다. 그 모습을 본 임 회장 일행은 웃음보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더 따라가지 못했다. 되돌아간 행사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할매들은 길을 막는 공무원들과 ‘맞짱을 뜨는’ 중이었다. 군수는 도망가고 없는데, 엉뚱한 사람을 군수로 착각해서 붙들고 화를 내고 욕을 해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정술 할매 입 주변이 다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거예요. 입 안팎의 실핏줄이 착착착, 다 터져서 마치 삐에로 분장한 입술같이 피범벅이 되어있더라고요. 공무원들이 정술 할매를 폭행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아니었죠. 전날에 정술 할매한테 군수 잡으러 갑시다 하니까, ‘가자’ 하더라고, 할매 가서 뭐라 할랍니까? 하고 물으니까‘야 이놈아 우리가 너를 군수로 만들어줬더니 롯데골프장에 사드나 갖다 놓고 거기서 골프대회나 하고, 우리 가슴에 대못을 박고 너는 희희덕 거리나?’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행사장에 와서 할매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악을 쓰고 용을 쓰다 보니까 그때 춥기도 추운 날에 마늘농사 짓는다고 새벽부터 밭일하고 왔지, 입술이 다 터진 거지요.”
임 회장은 너무 놀라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약을 두 달이나 먹었다. 모시고 온 할매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눈앞이 까마득했다. 정술엄니는 “네가 천년만년 군수 할 줄 아느냐? 천년만년 공무원 할 줄 아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피투성이가 된 입술은 병원 한 번 안 가고 연고를 발라 치료했다.
안동댁 정술엄니의 사는 법
정술엄니는 금연엄니와 친 동서지간이다. 금연엄니가 신랑도 없는 시집에 와서 한방을 썼던 시동생들 중 하나가 정술엄니 남편이다. 시댁에서 일 년을 살다가 살림을 밖으로 냈다. 금연 할매가 살림을 야무지게 하고, 시어른에게도 잘했다. 그 덕에 정술엄니도 별 탈 없이 시집살이를 하였다.
“월항면 보암동에서 나고 자랐어. 거기는 돌이 하나도 없어, 여기는 모 심어 놓고 돌아서면 물이 없고, 눈물 나기도 그슥하고 그렇데. 어려운 시절을 살았어. 어릴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밥에도 포한이 지고, 돈에도 포한이 졌어. 아버지 얼굴 한번 못 보고 엄니와 삼남매가 땅뙈기 하나 없이 남의 집 콩밭에서 일해주면서 컸는데 배를 너무 곯았어.”
그래서였는지 모산골에 화장품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중신을 서며 “사람 좋다, 한 발 떼고, 한발 뗄 때마다 아껴줄 거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스물셋에 소성리로 시집왔다.
“시집 오자마자 얼라를 낳았는데, 신랑이 이상해. 말만 하면 오해를 하고 화를 내고 싸움이 나.”
어린 시절 배곯았던 기억에 자식들 굶기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죽도록 일했다. 지금까지도 ‘놉(일당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일)’을 써본 적이 없다.
“우리영감은 술로 살아. 일하러 가자고 데리러 가면 ‘어데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참견하고 찾아오냐’고 불만이 가득했지. 오죽하면 우리 오빠가 나를 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고 온 거야. 두 주먹 불끈 쥐고 우리 영감을 직이뿐다고 왔는데 내가 차마 애들 셋을 두고 따라갈 수가 없겠더라고. ‘오빠, 애들 놔두고 못 갑니다’하고 말렸지. 나중에 들어보니 오빠가 우리영감한테 싹싹 빌고 갔대. 내 동생 제발 아껴달라고 말이야 하하하.”
시어른이 땅을 서 마지기 물려주었다. 한 마지기는 괜찮은데 두 마지기가 하천부지라서 당시 소성못을 만든다고 국가가 빼앗아갔다. 보상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밖에 모르고 살았어, 못 먹고 일만 많이 해서 좌골신경통이 와서는 앉은뱅이가 될 뻔했지, 마을 사람들이 ‘안동댁이 아 하나 더 낳아서 산후조리 푹 해라 그러면 나을 기다. 안 그러면 니 평생 앉은뱅이로 살지도 모른다. 그러면 농사일이 다 무슨 소용이고’하는 거야. 딸 하나에 아들이 둘이나 있었는데, 아들을 하나 더 낳았지. 큰마음 먹고 친정 가서 산후조리를 했어. 그래서 앉은뱅이는 면했지.”
평생을 농사만 지었다. 땅이 별로 없어서 산으로 약나무를 해 와서 시장에 내다 팔고, 산나물을 뜯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성주전통시장에서 평생 노점에 자리 잡고, 손수 캐온 각종 나물과 농산물을 팔아오면서 성주읍에는 정술엄니 물건을 찾는 단골도 상당히 많다.
“소성리 산이 얼마나 깊고 깨끗하고 좋노. 거기서 나는 약나무, 고사리, 취나물, 비비추, 개미추, 삼뚜칼, 깨뚜칼, 미역추, 초들, 나물들 좋은 거를 내 손으로 다듬어서 내놓고 한 봉지 몇천 원 받았어. 지금은 허리도, 다리도 아프고 해서 산으로 못 다니고, 마늘농사만 짓고 마늘이나 내다 팔고 있어”
소성리를 한 번도 떠날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손가락이 다 구부러질 때까지 일해서 번 돈으로 아들들 집도 다 마련해줬다. 이제 막내 집만 사주면 된다.
“자식을 낳아서 키울 때, 와 그렇게 못 먹이면서 키웠나 이제 와서 후회가 돼, 우리엄마 돈 좀 줄걸, 그때 돈 있었는데도 엄마한테 돈 한번 못 줬어. 그게 늘 마음에 걸려. 내가 너무 미련해서 일만 하고 자식들 배곯이지 않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경찰이 물러가고 군인이 들어온다 카더라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정권이 바뀌었다. 소성리에 있던 경찰이 보이지 않는다. 경찰의 경계는 진밭재보다 한참 더 위로 올라갔고, 수는 줄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다고 사드 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경찰이 물러가고 군인이 들어온다 카더라. 군인이 들어오면 더 겁나지. 서글프다.” 정술엄니는 걱정이 태산이다.
“성주에 사드가 온다고 할 때 성주군 한복판에 사드가 와서야 되겠나 싶어서 우리 소성주민들 열심히 읍에 안 나갔나? 이렇게 골짜기 올 줄은 몰랐지. 소성에 사드가 온다고 할 때 간이 철렁 내려앉았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되는 건가.”
정권이 바뀌면 곧 해결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버티고 싸우고 있지만 자나 깨나 걱정이다. 흙을 일궈 살아온 정술엄니 모든 것이 사드 때문에 무너지려고 한다. 그래도 사드 때문에 수줍은 기억이 나서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영감이 어딜 가면 내랑은 안 다녀. 작년 가을인가? 그때 원불교 교무님들이랑 서울 어디로 가서 데모하고 막 걸었잖아. 많이 걸어서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허리 구부정하게 억지로 걷고 있는데, 우리 영감이 내게 와서는 ‘괘안나?’ 하는 거야. 그때 내가 ‘손 좀 잡아주소’했더니 영감이 손을 내밀어 주대. 평생 살면서 어디 가서 손잡아본 거 처음이야. 그게 사진이 찍혀서 온 동네방네 신문에 났다고 하더라고.(웃음)”
그날을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난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온 동안 그렇게 다정다감한 적은 처음이라는 정술엄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인생이 담긴 소성리다.
군수가 사드를 들여놓는 조건으로 국방부로부터 대단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포장하고 광고했다. 주민들이 매일매일 살얼음을 걷고 있을 때, 성주군은 이들을 외면했고, 지역의 크고 작은 일에 소성리 사람을 배제했다. 소성리 주민들은 참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마을회관에 모인 할매들이 성주군청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생명문화축제 개막식 때도 찾아가자고 했다. 소성리 주민들은 차를 맞춰 성밖숲 행사장으로 갔다. 걸음은 느렸고 힘겨웠다. 대규모 행사라 교통통제가 심했다. 행사장 가까운 곳에 주차할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매들을 위해 유모차를 트럭에 싣고 왔다.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공무원, 경찰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실랑이를 잠시 벌이다 할매들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불법사드 원천무효!’라는 현수막 문구가 잘 보이지 않을까 임 회장이 살짝 일어서려는 순간 젊은 공무원들이 임 회장 팔을 꺾고 밀쳐냈다. 아수라장이 됐다. 할매들은 놀라서 공무원에게 항의했다. 군수를 찾아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덩치 좋은 공무원과 용역 경비를 이겨낼 수 없었다. 임 회장은 팔을 못 쓰게 됐고, 할매들은 기진맥진했다. 공무원에 대한 불신은 점점 깊어졌다.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소성리 주민들은 군청을 다시 찾았다. 5월 29일에는 군청 출입문을 굳게 잠가버렸다.
“새벽 마늘밭에 일하고 오니까 마을에서 방송을 해. 성주군청을 간다고 하데. 군수가 우리 한번 만나주면 될 걸, 이래 피하고 저래 피하고 하니까, 우리가 자꾸 군청으로 찾아갔지. 가니까 문이 잠겼어. 민원실로 가야 한다고 해서, 앞사람 가는 데로 따라갔지. 민원실로 들어갔는데 군청으로 들어가는 문을 또 잠근 거야. 부녀회장이랑, 우리 형님이 잠긴 문틈을 열어서 군청 로비로 들어가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더라고. 나는 아침부터 일하고 와서 기력이 없었어.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어. 일 잘하라고 뽑아줬더니만, 사드를 쫓아내지는 못할망정 골짜기라고 무시하고 거기다 갖다 놓았자나. 우리한테 한 번도 찾아온 적 없어. 지가 들고 온 거 지가 들고 나가야지. 소성주민은 성주사람 아니가? 그런 법이 천지에 어디 있어. 성주 군수가 소성주민을 죽이려고 덤비는 법이 어디 있냐고?”
주민들은 그날 온종일 항의하며 민원실에서 농성했다. 임 회장과 금연 할매가 군청로비에 감금된 채 농성하고 있었다. 끝내 현관문은 열렸지만,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다. 군수가 소성리를 찾아왔다.
“사과하러 온다고 캐놓고는 카메라에 사진 찍히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아나? 진심으로 사과할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수 지가 갖다놓았으니까 지가 ‘철거하겠습니다’ 하고 말해야 듣지. 입으로만 하는 사과는 안 들을란다. 사드 그거 와 철거한다고 못 하노?”
“내가 없을 때 시장 손님이 전화가 와서는 우리 영감이 받았데. 영감한테 그 사람이 ‘아이고, 마늘 할매 데모 잘 하대요. 데모꾼이더만요’하더래. 나도 공무원들 만나서 싸울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 성주시장에서 마늘 쬐금 내다 파는데, 공무원들이 내보고 자리 내놓으라고 할까봐 걱정돼, 그라면 나는 어디서 마늘 농사지은 거 팔아먹고 사노? 나도 지들한테 밉보이면 좋을 거 없잖아.”
꼿꼿하게 주장을 굽힌 적 없었던 정술엄니도 말 못할 걱정거리는 있었다. 그러나 정술엄니에게 ‘사드철거’데모를 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사드가 들어온다고 하면 내가 일궈온 논밭은 썩은 물건 되는 거 아니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