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돼지발정제 홍준표 계기로 ‘강간 문화(rape culture)’를 끝내자

'돼지발정제' 사건은 과거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당장의 문제다

20:16

‘강간 문화(rape culture)’라는 말이 있다. 1970년대 2세대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말이다. ‘강간 문화’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쉽게 용인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 또는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 환경을 뜻한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강간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 분위기를 포함한다.

▲2012년 미국에서 벌어진 강간 문화(rape culture)를 없앨 것을 촉구하는 시위. [사진=flcik.com, Chase Carter]

강간 문화의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유명인, 정치인의 강간을 별문제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가 ‘진짜(legitimate) 강간’의 경우 임신이 거의 안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고 호소할 때 실은 ‘가짜’ 강간일 수 있다는 이 말에 많은 여성들은 분노했다. 또 다른 정치인은 강간으로 임신이 되어도 아이는 ‘신의 선물’이라며 강간 피해자의 낙태권을 제한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극단적인 예는 바로 얼마 전 수많은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실이 폭로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 한국 대선에서도 보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강간모의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친구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강간할 수 있도록 돼지발정제를 구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는 돼지발정제를 여학생이 마시던 술에 몰래 타서 먹이고, 쓰러진 그녀를 여관까지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지만, 막상 강간에는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자서전에서 젊은 날 ‘추억’으로 떠벌렸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비판이 쏟아지자,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사회적 분위기가 다른 상황에서 혈기왕성한 대학교 1학년 때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너그럽게 감안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놓았다.

또, 한 유명 보수 논객은 “성공한 것도 아니고 실패”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취급했다. 젊은 혈기로 저지른 일을 이제 와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고 말한 홍 후보는 정작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판과 사퇴 요구에도, 홍준표는 사퇴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 780만 표 이상을 얻어 2위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으니 홍 씨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쉽게 지나갈 일인가? 지금은 45년 전과 정말 사회 분위기가 달라졌을까?

불행히도 홍준표가 대학을 다니던 45년 전과 지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제 제기는 여전히 미흡하다. 반면 ‘돼지흥분제’ 같은 데이트 강간약물 사용은 더 늘어나고 있다. 유엔 산하 국제마약감시기구(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는 2010년 연례 보고서에서 “데이트 강간약물(date-rape drug)”을 이용해 의식을 잃게 한 뒤 강간하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늘고 있다며 경종을 울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골뱅이’ 강간이라는 여성혐오 표현이나 무용담(?)이 남초 사이트에 넘쳐난다. 홍준표 후예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데이트 강간약물은 성인사이트 등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살 수 있다. 불면증 치료제인 아티반이나 졸피뎀 같은 수면제도 데이트 강간에 널리 악용되는 약물이다. 2013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된 사회고위층 ‘별장 성접대 사건’에 사용됐던 약물이 바로 수면제인 ‘아티반’으로 알려졌다.

데이트 강간 약물은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남긴다. 약물을 복용한 후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블랙아웃이 되어서 깨어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데이트 강간약물을 이용해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이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성폭력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혹시라도 정신을 잃은 사이 ‘사진, 동영상이 찍히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에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약물에 따라서는 술과 같이 복용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홍준표가 친구에게 구해줬다는 돼지흥분제는 인공적으로 교미를 촉진하는 데 쓰이는 동물용 의약품이다. 사람에게 투여하면 어지럼증과 경련을 일으키고,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데이트 강간 약물은 보통 색이나 냄새, 맛이 없어서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약물을 감지하는 특수 컵이나 빨대, 립글로스 등이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감지기들을 이용해 성폭력을 막을 수 있을까. 사실 데이트 강간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약물은 우리가 흔히 즐기는 술이다. 술을 마시고 혹시 실수하거나 다음날 숙취에 고생하는 정도가 대부분 남성에게 술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다. 반면 여성은 즐거운 마음으로 마신 술 때문에 강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세상과 남성이 살아가는 세상이 항상 똑같지 않다는 수많은 예 중 하나이다.

강간 피해자가 술에 취하거나 의식을 잃은 경우 그녀의 진술은 경찰이나 법정에서 쉽게 신빙성을 의심받는다. 여전히 우리 사회 통념은 여성이 술에 취해 피해자가 되면 상황을 자초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왜 그 시간에 술을 마셨는지, 술을 마시면서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말을 했는지 등을 따지기 시작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 피해자를 탓한다. 마치 여성이 야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강간당했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여성들은 원하는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 성폭력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성폭력은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범죄이다. 2011년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슬럿워크(SlutWalk) 행진에 여성들이 야한 옷을 입고 나와 항의하는 이유다.

▲2011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slutwalk. [사진=flick.com, David Shankbone]

원하는 옷을 입는 권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술을 마실 권리가 있다. 술에 취한 남성이 폭행당한다면, 우리는 폭행한 사람을 탓하지 피해자에게 왜 술을 마셔서 쉽게 맞았느냐고 힐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을 때면, 너무 쉽게 여성에게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일반 폭행 범죄에서 문제는 술 취한 사람이 아니라 주먹을 휘두른 가해자다. 여성이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거나 의식을 잃었을 때, 그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술을 마신 피해자를 탓할 일이 아니라 강간을 저지른 가해자 잘못이다.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으면 강간이 아닌 합의된 성관계라는 생각도 흔하다. 하지만 술이나 약물 영향으로 피해자가 의식을 잃으면 의사 표현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no means no” 즉, 피해자가 거부하는 의사 표현을 했는지 아닌지로 강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yes means yes” 즉, 피해자의 명확한 동의 여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술에 취하거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명백하게 동의할 수 없다면 합의한 성관계가 아닌 강간이라고 말해야 한다.

미국 연방법무부 추산에 의하면 미국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은 성폭력 피해자가 된다고 한다. 한국은 2014년 한 해 동안 수사기관에 보고된 성폭력 발생 건수가 2만9863건이었다. 2005년 1만1757건이 집계된 후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성폭력 신고율이 10%도 안 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실제 성폭력 발생 건수는 보고된 수치보다 6~8배 이상으로 추정된다. 현실은 ‘돼지발정제’ 같은 사건이 ‘사회적 분위기가 다른 상황’에서 생긴 과거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당장의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작년 5월 강남역 인근에서 한 20대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된 후 일 년이 지났다. ‘묻지마 살인’으로 넘어갈 뻔했던 일이었다. 그동안 침묵해 왔던 많은 여성들이 용기 있게 나서 차별과 폭력, 억압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젠더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장을 넓히는 계기로 바꾸었다. 홍준표의 ‘돼지발정제’가 일회적인 에피소드로 넘어가지 않고 강간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공론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대구도시철도 2호선 영남대역에 붙은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쪽글. [사진=독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