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비정기적으로 연재한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류동인(53) 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옆집 친구 배창희와 집 2층 교육관에 있는데, 형 친구가 헐레벌떡 교육관에 뛰어들어왔다. ‘너희 형 난리 나부렀다’라며 덜컥 소리부터 내지르더니, 그는 형이 지랄탄을 쏟아내는 페퍼포그 차량을 엎어놓고 시위하는 중이라고 했다.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고 전두환 정권이 찾아오기까지의 하수상한 시절, 어린 류동인 씨 눈에 세상은 투쟁 대상이기보다는 호기심 대상이었다. 류동인 씨 집에는 경찰이 항상 거주했다. 성결교 교단 목사이자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아버지 류연창 씨를 사찰하기 위해 그들은 응접실에 살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그런 경찰들에게 커피도 타주며 대접했는데, 경찰은 아버지가 밖에 나서면 뒤따라 염탐했다. 경찰은 아버지 설교도 받아 적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 서울에서는 명동성당 사건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진보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횡횡했다. 솜옷 입고 나간 아버지를 응접실에 있던 경찰이 붙잡아 갔다. 설교 내용을 꼬투리 잡았다. 박정희가 오래 못 살 거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고 했다. 광주교도소에 들어갔다 집행유예로 풀렸다.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가 아버지를 면회하며 경찰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3살 많은 형님인 류동운 씨도 그즈음 감옥에 갔다. 집안 수색 도중 류동운 씨가 쓴 정권 비판 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류동인 씨 눈에 형은 조숙해 보였다. 사회에 관심이 많을뿐더러, 공부부터 몸 쓰는 일 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바깥 구경도 하고 싶었다. 형을 찾으러 중앙로로 향했다. 구 태평극장 앞에 이르자 경찰이 시민의 기세에 눌린 모습이 보였다. 청년들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인파에 휩쓸려 천변을 따라갔더니 광주노동청 근처에서는 닭장차가 포위돼 있었다. 시민들의 위협에 경찰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그러던 중, 군 트럭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이 대열을 갖췄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군가를 부르며 시민들에게 달려온 공수부대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사정없이 사람들을 후려쳤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복 경찰은 도망가는 시민 다리를 걷었다. 다친 사람을 시민들이 인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시내에 쫙 깔린 공수부대는 두고 보지 않았다. 팬티만 입혀 놓고, 겁을 주기 위해 머리와 무릎을 땅에 박도록 했다. 공수부대를 피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근 공원에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공원 돼지국밥집 아들 둘이 잡혀갔는지, 부모가 공수부대 앞에서 울고 있었다.
저녁이 되도록 류동운 씨가 귀가하지 않았다. 19일, 아버지는 당시 정웅 31사단장에게 전화했다. 아버지가 충북에서 목회활동하던 당시 정웅은 신자였던 인연이 있었다. 상무대에 잡혀있는 류동운 씨를 정웅 사단장이 빼냈다. 20일, 류동운 씨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귀가했다. 머리가 채 아물기도 전, 21일 류동운 씨는 동인 씨 손을 잡고 다시 금남로로 향했다. 시민과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쪽에서 대치 중이었다. 동운 씨와 동인 씨는 전남대학교로 향했다. 그즈음, 공수부대가 발포했다. 금남로로 돌아오는 길, 시민 여럿이 죽어 널부러져 있었다. 해가 지고 공수부대와 시민 간 전투가 벌어졌다. 22일, 공수부대가 물러나고 광주는 잠시 해방을 맞는다.
동운 씨는 23일 다시 도청에 나가 시신 수습에 나섰다. 그러다 26일 다시 돌아온 동운 씨 표정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목욕했고, 친구들을 한 번씩 만났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버지는, 다시 전남도청으로 가면 안 된다며 동운 씨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어제 설교하면서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잡으십니까”
집을 나간 동운 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27일 새벽 공수부대가 다시 들이닥치며 항쟁은 진압됐다. 30일, 시신을 확인하라는 전화가 왔다. 집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이름 없는 강물에 띄워주세요”
광주민중항쟁 후 대구로
학생운동 중 투옥
탈옥 도모하다 유월항쟁 후 출옥
출옥 후 마르크스 공부하며 지하조직 활동
구소련 멸망 후 ‘몸’과 ‘감각’에 관심 갖다
그일 이후 동인 씨 일가는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대구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동인 씨는 자연스레 기독청년협의회 활동을 하게 됐다.
기독교를 접한 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류 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일가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삼촌들이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훈장 선생님이던 할아버지도 중국에서 넘어온 한문성경을 감명 깊게 받아들였다. 마을이 뒤집혔다. 류 씨는 유학 세가 강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집성촌에서 동인 씨 일가는 살기 어려웠고, 일본으로 넘어가면서까지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행했던 진보적 학문을 접했다. 가가와 도요히코(기독교 사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기독교 사상가)의 영향을 받았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문중 생활을 거치지 않은 동인 씨에게는 기독교가 자연스러웠다.
기독청년협의회 외에도 학회, 학내 자치조직에서 학생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라기보단, 그게 자연스러웠다. 84년 9월,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했다. 방일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동인 씨는 화형식을 준비하다 교직원들과 다투게 됐다. 바닥에 쓰러졌다. 김찬수(현 4.9인혁재단 이사) 씨가 다른 곳으로 가라고 눈치를 줬으나, 여학생들이 ‘기절했나봐’ 하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버지가 연락을 받고 학교로 왔고, 그 길로 휴학했다.
군대 대신 감옥을 택했다. 1985년, 그때도 광주민중항쟁을 폄훼하는 보도를 내던 KBS 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지려고 준비했다. 운동권 몇몇이 의논했다. 고문을 이길 자신이 없어 3명만 나섰다. 방송국 앞, 경계를 선 경찰 소총을 보니 탄창이 꽂혀 있었다. 가져온 화염병 몇 개를 던지다가 경비실에 끌려갔다. 지프차가 한 대 오더니, 거기서 내린 사람이 눈을 가렸고 그길로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동인 씨는 부러 겁먹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연기했다.
아버지가 면회왔다. 괜찮냐는 물음에 괜히 별거 아닌 척 답했다. 고문 후 이어진 재판에서는 아버지가 힘을 발휘해 홍남순 등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 변호사는 재판장에서 판사와 검사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18 이야기를 했다. 동인 씨는 방화미수 등으로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화원교도소에 갇혔다.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수감자들을 보니 다들 비슷한 처지였다. 그들과 감방투쟁을 시작했다. 교도관에게 물좀 떠오겠다며 문을 열어달라고 했고 문을 열어주자 소란을 피웠다. 간부가 달려왔다. 기세를 잡기 위해 동인 씨는 간부의 멱살을 잡고 욕을 했다. ‘야이 개새끼야.’
간부는 기가 질렸다. 다른 교도관들이 와서 서둘러 다시 감옥 안으로 들여보냈다. 다른 수감자와 함께 감옥 안에서 문을 찼다. 교도소에는 스무 명가량 정치범이 있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구호를 외쳤다. 분위기가 수감자들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폭동처럼 분위기가 고조됐다. 수감자들은 서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수감자들은 감옥 안에서 5.18, 8.15 등 기념식을 진행했다.
옥중동지회가 결성됐다. 평소에는 영치금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반입한 서적으로 스터디를 하는 정도였다. 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김충환 현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도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옥중동지회 사람들은 이제 파란 죄수복도 안 입고, 사제 추리닝을 입을 정도로 힘이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김충환 씨에게 경비교도 신참이 훈계하자, 동인 씨가 달려가서 뺨을 올려붙였다. 경비교도대 30여 명이 몰려오고 패싸움이 벌어졌다.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도 나오자 교도관들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서 87년 6월항쟁이 터졌다. 옥중동지회는 탈옥을 모의했다. 광주항쟁처럼, 만약에 계엄령이 떨어지면 군인들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탈옥은 서울시장 후보로 나오고 국회의원 2선을 지낼 김민석 씨가 제안했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똥차를 탈취해서 후문 쪽으로 돌파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아무도 운전을 못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보냈더니, 다음날 6.29선언이 열렸다. 분위기가 나아지자 탈옥 시도는 하지 않았고, 7월 대부분 석방됐다.
석방 이후 ‘민중의당’에서 정당운동을 시작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노동상담소, 노조 결성 등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마르크스, 레닌의 이론을 공부하고 세상을 보니 이론이 세상과 맞아떨어졌다. 세상이 점점 발전할 것 같았다. 대구에서 굵직한 노조가 나왔다. 태화연공노조, 상신브레이크, 델파이…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그즈음 동인 씨는 ‘회사’에서 근무했다. 지하조직 이름이다. 회사에서 서경희 씨를 만났다. 조직 안에서 죽이 잘 맞았다. 동인 씨는 경희 씨를 교도소에서 나온 87년, 경북대 북문 책방에서 만나고 마음에 담았다. 얼굴이 예뻤다. 서점 점무원을 ‘점례’라고 불렀는데,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별말은 붙이지 못했다. 추후 알게 됐지만, 인연은 84년도에 시작했다. 교회 청년회에 사물놀이를 가르치러 서경희 씨가 왔다.
그때 경희 씨는 문예활동을 했다. 당 활동에서는 죽이 잘 맞을뿐더러 사상도 비슷했다. 자연스레 함께 일하는 시간이 늘며 가까워졌다. 그즈음, 동인 씨가 보기에 김문수와 이재오 씨가 민중당 내에서 패악질을 부리고 다녔다. 91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김문수가 방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인 씨와 경희 씨는 당 중앙위에 가서 김문수와 이재오 관련 문건을 수집해 폭로하려 했는데, 오히려 제명당한 건 동인 씨 쪽이었다. 그들은 당내에서 이미 간부였다. 이후 대구노동교육협회를 만들며 노동운동을 이어갔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혼이었다. ‘회사’는 결혼을 금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을 포기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92년, 노동운동을 그만뒀다.
운동의 근간이던 마르크스주의가 소련 몰락과 함께 마음을 떠나며, 동인 씨는 방황하는 세월을 보낸다. 생업을 위해서는 상인동에서 비디오 가게를 했다. 그러면서 다른 철학책에 빠지기 시작했다. 들뢰즈, 푸코, 라캉, 니체에 이르는 프랑스 현대철학에 눈을 돌렸다. 무협소설 ‘생사박’에서 손과 발의 힘줄이 잘린 파계승 흑저가 몸으로 투쟁하며 성장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동인 씨의 화두는 ‘몸’과 ‘감각’이 됐다. 94년, 김충환 씨에게 비디오 가게를 물려주고 성주군 초전면 돼지농장에 취직했다. 돼지 똥을 치우고 교배시키고, 치료하는 일에 몸을 썼다. 그러면서 ‘몸’에 사유를 집중했다. ‘이성’보다 ‘감각’이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칸트의 ‘이성’, 헤겔과 마르크스의 ‘발전’은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으로 느껴졌다. 오히려 감각과 무의식은 분명했다. 사회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감각도 있지만, 그와 무관하게 몸이 가지는 원초적 감각도 있었다. 그 원초적 감각에는 고통과 쾌락이 한데 엉겨 있었다. 그 감각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가 강요하는 ‘담론적 감각’이 아닌, 생명으로 충만하길 몸이 원하는 순수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광주를 다시 생각했다. 공수부대를 잠시 물리치고 열린 해방 공간. 여기서 작은 분란이 생긴다. 처음 공수부대에 맞서 총을 들고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었고, 이유도 단순했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한개마을에서 어쩌다 만난 차명숙 씨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먹을 것도 주고, 재미있을 거 같아서 항쟁에 참여했다고. 그는 항쟁 당시 차량 위에서 선동 방송을 하던 사람이다. 투쟁이 주는 쾌락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항쟁 속에서도 재야운동에 매진했던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에게 “뭐하던 사람들이냐”라고 자격을 묻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투쟁은 고결한 어떤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으로 보였다.
동인 씨는 감각의 문제를 고민하며 떠올린 생각을 세상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 성주에 사드가 들어온다며 소동이 벌어졌다.
성주 촛불에서 투쟁의 기쁨을 보다
자격을 묻지 않는, 비장하지 않은 투쟁
적을 만들기보다 즐겁게
“성주 투쟁은 또 다른 기쁨을 만들며 변화할 것”
7월 14일, 성주 촛불 이틀째, 동인 씨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집회장을 찾았다. 집회장에서는 김충환, 박수규 씨 등 앞서 연을 맺은 사람들이 많았다. 페이스북 라이브로 집회를 중계하며, 자연스레 방송 관련 일에 함께했다. 투쟁을 고민하며 쓴 글을 1318 카톡방에 올렸다. 그 글을 본 백재호 씨와 연락이 닿아 성주군민 소식지 제작에도 나섰다.
동인 씨 눈에 성주 투쟁은 아주 건강하게 이어졌다. 그는 이 투쟁을 주이상스(Jouissance) 적인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이 만든 이 개념은, 고통 속의 쾌락, 죽음의 충동과 결합된 쾌락이다. 고통스럽지만, 멈출 수 없는 극치의 즐거움이다. 자기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쾌락이고, 이 쾌락을 위해 고통을 무릅쓰게 된다.
성주 투쟁의 어떤 순간, 동인 씨는 주이상스를 확인했다. 투쟁이 자격을 묻지 않았다. 비장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기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주와 마찬가지로 성주 투쟁도 시작은 공포와 결연함, 분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고통의 순간에 찾아오는 기쁨이 있었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매 순간 쫓겨났지만, 쫓겨난 곳에서 자유를 느꼈다.
2016년 9월, 김항곤 성주군수가 사드 반대에 적극적인 여성더러 “술집하고 다방하는 것들”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성주군민들은 “나는 술집여자 아닌데?”라고 반응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광주에서 재야운동세력의 “너희들은 뭐하던 사람이냐”라는 물음에 보통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듯, 성주 투쟁에서도 물러서는 사람이 생길 터였다. 하지만 성주 사람들은 “술집하고 다방하는 게 무슨 문제냐”라고 반응했다. 성주군수가 ‘자격’을 물었는데, 군민들은 이를 재치있게 뛰어넘은 것이다.
집회에 나오는 비교적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동남청년단’을 보고도 동인 씨는 기쁨을 느꼈다. 2017년 4월 26일, 사드가 결국 소성리에 들어왔다. 절망을 느끼고도 동남청년단을 비롯한 성주군민은 다시 절망을 털어내고 싸움을 시작했다. 동남청년단은 소성리에서 상황 감시 당번도 서고, 그 와중에 자기들끼리 라이브 방송으로 고민과 생각을 풀어나가는 모습이 좋았다. 그런 모습은 분노로만 되지 않는다. 분노와 공포를 이겨내고 투쟁에 나서게 하는 것은, 그를 뛰어넘는 매력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려됐던 순간도 있었다. 열렬히 투쟁했던 일부 사람들과 다툼이 벌어져서다. 동인 씨가 보기에 그들은 분노와 결의로 투쟁하며, 싸울 대상을 찾는 듯했다. 동인 씨가 생각하는 기쁨과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분노와 결의, 증오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낼 거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투쟁 방향을 두고 생각이 다른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모든 사람이 다 같지는 않기에, 분노하는 경향도 물론 있을 수밖에 없다. 동인 씨는 좀 더 멀리, 훗날 함께 기쁨을 느낄 기회를 기원했다.
이 투쟁이 어떻게 끝나게 될까. 그때 동인 씨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동인 씨는 질문을 던져 본다. 그때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길. 헌신보다는 흥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는 삶. 동인 씨는 오늘도 거리 위에 촛불을 들고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 표정 속 기쁨을 읽으며, 동인 씨도 몸이 원하는 대로, 신명을 향해 간다. 투쟁하는 과정에서 슬픔과 분노가 몸을 잠식하더라도, 오래 달려온 성주의 투쟁은 또다시 새로운 기쁨을 만들며 변화할 것이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