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열아홉부터 여태까지 산 소성리, 도금연(81세)
초희(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촛불 초 부스는 늘 영철 아저씨가 지키고 있다. ‘컵초’를 꺼내놓고 한 개 한 개 불을 붙여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 ‘컵초’는 세상을 환하게 밝혀준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으면 초 부스를 지키러 한 명, 두 명 촛불지킴이들이 나타난다. 머리띠를 꺼내고, 펼침막도 꺼내 방석과 한 세트로 만들어 촛불에 참여하는 분 손에 쥐여 드린다. 세월호 리본과 파란나비 차량스티커도 나눠드린다.
성주촛불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소성리 간판스타 금연 할매와 친구들이 들어선다. 오늘은 차를 태워줄 사람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오셨단다. 차가 없으면 연락하라고 몇 번을 당부드렸지만, “미안스러워서 말을 못 하겠다”고 하신다. 가는 길은 무조건 모셔다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소성리에서 버스 타고 읍으로 길이다. 금연 할매가 꾀를 내어 버스 기사를 살살 꼬신다. “기사 양반, 내려가다가 성주군청 근처에 내려주면 많이 안 걷고 좋은데.” 옆에 앉은 경임 할매가 금연 할매 말을 낚아채며 “그래는 안 해 준다”고 타박한다. “그러면 성주초등 앞에 세워주면 우리가 쪼매 덜 걷고 좋은데, 기사 양반 그래 해줄 수 있는교?” 금연 할매가 한 번 더 시도해보았다. 정작 대답을 바랐던 버스 기사는 말이 없고 경임 할매가 옆에서 “그래는 안 해주더라 안 카나”하며 찬물을 끼얹는다. 금연 할매는 한심하다는 듯이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는데, 하는 말마다 안 된다고 훼방을 놓네. 배 짼다”며 크게 한번 웃는다.
“성주촛불은 사드가 온다고 할 때부터 댕겼어. 나흘인가 빼먹고는 하루도 안 빠지고 다 다녔지. 소성리 마을에 못 움직이는 할매들이 우리더러 움직일 수 있는 늙은이들은 모두 성주촛불 다녀오라고 해. 서울 갈 때 우리가 맨 앞에 앉는 바람에, 우리가 빠지면 표가 금방 나더라. 우리는 ‘사드 병’이 들었으니, 사드한테 맞아죽던가, 사드를 때리패던가, 무조건 가보자면서 매일 성주촛불에 갔어.”
처음엔 성주에 사드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멋도 모르고 군청으로 따라나섰다. 그러다가 군수가 제3부지로 사드를 보낸다며 떠들어댔다. 알고 봤더니 제3부지는 바로 금연 할매가 사는 소성리 마을 위 롯데골프장이었다.
“대통령 박근혜는 묻지도 않고 안 찍어줬나, 할매들은 무조건 1번 찍어 주는 게 젤 편하거든. 1번 찍어줘놨더만, 이 사단을 내고 있으니 기가 차. 군수도 1번이었제, 1번이 좋다고 해서 찍어줬더만, 우리한테 사드를 보냈어. 대장군 남자 같으면 나와서 인사도 하고, 잘못했다고 사과도 해야 하는 거 아니가. 집회 때 보니까 내빼고 없어. 지가 잘못했지, 우리가 잘못했나. 지 잘못을 몰라가지고 인간이 되겠나 싶어.”
제3부지 롯데골프장으로 사드가 들어온다 하니, 금연 할매는 더더욱 성주촛불을 빠질 수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젊은 사람이 말해줬단다.
“미군부대가 들어오면 폐기물 있제. 그걸 막 땅에 묻어뿐단다. 소성리 산이 얼마나 좋노. 그 더런 걸 산속에 묻어뿌면 계곡으로 흘러 내려올 거 아이가. 그라만 동네 다 배리지. 미군들 나다니면 이상한 유흥업소도 막 들어오고 할 거 아이가. 이제와 그 꼴 어떻게 보고 사노.”
금연 할매 생각에 사드는 무조건 안 들어오는 게 좋은 거다.
“마을에 낯선 외지인들 많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본토사람들보다 못해. 인심도 사나와지고. 사드는 우예끼나 안 들어오면 좋은 거제. 안 그렇나.”
열아홉부터 여태까지 산 소성리
택호가 봉정댁인 금연 할매 친정은 초전면 봉정리다. 소성리와는 가까운 거리다.
“우리 형부가 소성리 총각 너무 좋다고 우리 오매 아버지한테 칭찬을 해대니까, 고마 우리 오매 아버지가 내보고 시집을 가라 했어.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갔어. 웃기제.(웃음) 요즘 같으면 가당키나 하나. 우리 영감도 마찬가지. 내 얼굴도 못 보고 장가왔지. 그 때 법에는 시집가도 바로 시집에 안 가고 친정에서 일 년을 살았지. 신랑이 오매가매 했어.”
시댁으로 들어가는 날을 10월로 받아놓고는 9월에 신랑은 군대를 갔다. 신랑도 없는 시집에 신부 홀로 사촌오빠가 운전하는 짐차를 타고 갔다. 새댁이 온다고 시댁 식구들이 잔치를 벌였다. 그날부터 시어머니, 시동생과 시누이, 금연 할매까지 넷이 한방에서 잠을 잤다. 신랑 없는 신부라고 방 하나 내주지 않아서 ‘눈칫방’ 세월을 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옷 갈아입는 게 제일 곤욕스러웠다. 부엌에서 갈아입기도 하고. 나락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갈아입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시동생과 시누이, 시숙과 동서 그리고 질녀까지 식구가 그렇게 많은 집에 물이 없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길어다 써야 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은 금연 할매 몫이었다.
“옛날 옷은 요즘 옷이랑 다르거든. 목화를 명이라고 캐. 그거 씨를 따 빼가지고 활 있제. 활을 이래 휘이가지고 씨를 다 빼서 밤에 녹카놨다가, 활을 쥐고 풀어대면 솜이 되는 기라. 그걸로 핫바지를 만들어. 솜을 넣어서 할배들 쭈구리 해주고, 할매들도 쭈구리를 해줘, 요즈음 말로 ‘돕바’라고 카지. 겨울 내내 뜨시게 입게 솜이 들어간 돕바야. 이게 엄청 따시거든. 근데 이게 빨래를 할라면 지랄 같은 기라. 얼마나 일이 많노. 요즘이사 세탁기로 돌리면 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어디 있노. 그 많은 식구들 옷을 다 개울에 갖고 가서, 방망이로 뚜두리가미 빨았어. 그리곤 풀도 먹이야 했지.”
남편은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 시숙이 있었다. 손윗동서는 인정이 없고, 무뚝뚝했다. 10월에 시집와서 설을 쉬고 나니, 6월 시아버지 환갑이었다. 환갑이라고 술을 얼마나 많이 담갔는지, 큰 단지 세 개는 담갔다. 환갑 전날 술을 걸러내는데 동서는 애를 업고 어딜 가서는 오지 않았다. 다행히 시어머니랑 종시누이 하나가 있었다. 종시누이는 받치고, 금연 할매는 무거운 단지를 들어 날랐다. 다 해놓고 보니 동서가 나타나서 시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동서는 둘째 며느리만 이뻐한다고 투덜거렸다. 신랑 없는 서러운 시집살이가 금연 할매 속을 뒤집어 놓았다.
“고마 기가 차. 참말로 그래 사는 기라”
제대한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을 안겨줬다.
“큰아들이제, 인물 좋다고 모두가 다 좋아라했지. 그런데 세 살 적에 놀랬는가 잃어버렸어. 그때 윗동서가 딸을 하나 낳았제. 7월에 우리 애가 죽고 나서 동서가 자기 딸래미한테 옷을 입혀놓았어. 사람들이 그걸 들여다보고 웃는데, 나는 우찌 그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겠노.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데 멈추질 않더라구. 아기도 선몽이 되더라구. 옛날엔 아기가 죽으면 돌멩이로 묻거든. 돌멩이로 묻은 그걸 ‘애장’이라고 해. 며칠 지나고 나니까 꿈에 아기가 나타나서는 ‘어매, 배 아파라’ 이카대. 잠시 잠깐 잠든 사이에 나타난 거야. 그것도 두 번이나. 이상타 싶어서 시아버님께 ‘아버님 아~가 자꾸 꿈에 나타나서 배 아프다고 웁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 아버님이 ‘와카노’ 하면서 ‘내가 한번 가보고 오마’ 하시더라구.”
알아보았더니 들에 풀어놓은 소가 돌무덤을 밟아서 아기 봉분이 꺼져있더란다. 시아버님이 손자 돌무덤을 손봐주고 난 이후 금연 할매 꿈에 아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큰아들 죽고 나서 이태 지나 첫 딸을 낳았다. 그렇게 딸 둘에 아들 셋을 낳아 키웠다. 시댁은 나락 농사를 지었다. 시집갈 때만 해도 ‘싸리 집’이었는데 원불교 정산종사 생가 싸리 집보다 낮은 볼품없었다. 남편은 집을 짓겠다고 벽돌을 사서 쌓아두었지만, 벽돌은 두 번이나 팔아 써버려 집은 짓지 못했다.
“젊었을 때 서울 갈 뻔했어. 조카가 중앙에 높은 양반집에 새 먹이 주고, 나무 가꿔주고, 식모살이하러 서울 가라고 소개해 줬거든. 말하자면 머슴살이지. 그런데 시숙이 어른하고 같이 안 살라고 해. 시어른은 또 둘째 아들네랑 살고 싶어 해. 그래가지고 시어른이 부모 모시는 아들한테는 논 열 마지기 주고, 안 모실 사람은 서 마지기 줄라 해. 나는 논도 받고 싶지 않았어. 서울 가고 싶었지. 그런데 시숙이 논 서마지기만 받고 자기들이 나갈라는 거야. 우리는 떨자버리고. 시아버님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너거하고 살란다’ 하시지. 하는 수 없이 부모를 못 버려서 여기 주저앉았어.”
시아버지 모시면서 세상 버릴 때까지 해장국 끓이는 걸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잡수셨다. 해장국은 메밀묵을 해놓거나, 국수를 말아드렸다. 아침마다 식구들 밥을 했다. 가스난로도 없던 시절에 시아버님 해장국 끓여놓고, 식구들 밥을 해대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불평 한마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시숙은 고령으로 이사했지만, 먹고 살길이 없어 다시 성주로 돌아왔다. 고향만 한 곳이 없었나 보다. 시어른 봉양은 여전히 금연 할매 몫이었다.
“우리 아들이 있제. 한 번씩 칸다. ‘오매 그때 서울 갔었더라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잘 됐을낀데 와 안 갔노’ 이칸다.”
그때 서울에 갔었더라면 지금 사드 때문에 온몸에 멍은 안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학교 같은 거 구경도 못 해봤어. 우리 집이 딸만 줄줄이라. 아버지가 딸래미만 챙기면 동네사람들이 흉본다고 아무도 학교를 안 보내줬어. 막내만 학교를 보냈어. 내가 못 배운 설움 때문에 딸은 공부시키고 싶더라고. 우리 집 영감은 딸래미를 초등학교만 보내고 중학교를 안 보낼라 해. 내가 와 안 보낼라고 하노, 따졌지. 딸래미 중학교 보낼라고 살림은 시어매한테 맡겨놓고 동네 품삯 일을 쫓아다녔지. 빚을 내서 논도 두 마지기 장만했어.”
딸을 중학교 보내서 공부시키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돈을 벌게 했다.
“대구 식당까지 갔어. 북부주차장에 ‘부엉식당’이라고 트럭이 들어가는 왼쪽으로 식당이 쭈욱 늘어서 있었거든. 거기서 겨울 농한기 때 석 달 동안 일하러 갔다가, 농사지을 때는 들어왔지. 시어매가 살림을 해주니까 식당에서 일하면 월급은 받자나. 허락을 받아서 갔지. 집에 소를 먹였거든. 식당에 일하면서 콩나물 다듬으면 콩대가리랑 콩깍지 많이 나와. 그때만 해도 우리 마을에 버스주차장이 있었어. 북부주차장에 버스가 소성리까지 들어갔어. 그 버스 기사한테 부탁해서 콩대가리랑 콩깍지 한 봉다리 실어 보내면, 우리 마을 점빵에 내려줘. 점빵 주인이 마을방송으로 우리 집 영감을 불러. 그러면 우리 영감이 지게를 지고 가서는 봉다리를 가지고 집으로 가. 그러면 식구들이 그 봉다리를 안고 울었다고 해. 매일 콩나물 대가리를 한 자루씩 버스에 실어 보내줬거든.”
식당 부엌에서 함께 일했던 여자는 식당 안주인 여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서 믿고 의지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금연 할매의 품 넓은 인심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반찬 남은 거 좀 들고 가면 어떠노. 그걸 들고 간다고 안주인이 지 동생한테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자빠졌대. 내가 있기 전 부엌아줌마가 여동생이 반찬 가지고 가는 걸 고자질을 했나 봐. 같이 부엌에 일하면서 사이가 안 좋았나 봐. 나는 모른척 해주거든. 반찬 많이 남으면 들고 가라고 일부러 싸줘. 나는 식당 음식은 못 먹겠어. 우리는 미원 같은 거 안 쓰거든. 나는 집에서 간장 한 병, 된장 한 통 들고 와서 밥 먹을 때도 집 간장이랑 된장으로 밥 먹었거든.”
그렇게 고생해서 다섯 자식 공부를 시키고 싶었다. 대학은 하나도 못 보냈다며 부끄러워한다. 고등학교만 겨우 보냈다. 큰딸은 중학교만 나와서 안 됐다는 생각에 가슴에 돌덩이가 턱, 걸리는 것 같았다. 큰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공장으로 갔다. 어느 날 큰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 떡 먹고 싶어.” 금연 할매는 떡을 해가지고 어딘지도 모를 공장을 찾았다. 베 짜는 공장이었다. 큰딸은 그곳에서 총각을 만나 연애하고 일찍 결혼했다. 아이도 일찍 낳았다. 큰딸 아이들이 외할머니가 혹시나 사드 반대하러 다니다 다칠까 싶어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해댄다. “할매 다칠라. 앞에 나서지 마래이.” 금연 할매는 이렇게 답했다. “할매는 꾀순이라서 절대로 안 다친다. 걱정 말거래이.”
“내가 여기 소성지 옆에서 식당을 안 했나. 처음에는 집도 안 짓고, 못을 팠거든 소성못 말이다. 낚시꾼들 라면 끓여주면 안 되겠나 싶어서 큰아들이랑 했지. 그럼 어매가 라면 끓여줄 테니까 니가 배달하면 되겠네, 캤어. 집도 없이 가스버너랑 냄비만 들고 라면 끓여주는 걸로 시작했는데 손님이 터져나가. 그래서 하우스를 하나 지었어. 하우스에 팔레트 깔고 상도 두고. 낚시꾼이 많이 와서는 새우를 엄청 잡았거든. 손님이 너무 많아서 하우스를 하나 더 지었어. 영감은 산으로 들로 나물 캐 와서 비빔밥 해달라면 비빔밥 해주고, 칼국수 끓여달라면 끓여주고, 부침개도 부쳐줬지. 그런데 절 같은 데서 방생한다고 ‘배스(공격력이 아주 강한 어종으로 새우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산다)’를 풀었어. 그러고는 새우가 싸악 사라졌어. 하나도 없대. 낚시꾼들 발길도 뚝 끊겼어. 그때 아들네랑 며느리가 같이했는데, 내가 성질머리 못 됐거든. 며느리는 새댁이니까 뭐라 말을 할 수가 있나. 장사하면 온갖 부류의 인간들 다 만나. 내가 못된 말 많이 했어. 그걸 생각하면 맘이 아파.”
그렇게 소성지 앞에 식당 터를 잡고 하우스로 운영하던 식당은 집으로 바뀌었다. 낚시꾼들 빈자리는 롯데골프장 손님들이 채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고 장사 준비를 하려는데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린다. 이상하다 싶어서 거울을 보니 얼굴은 멀쩡한데 한쪽 감각이 없더란다. 한의원 가서 진단해보니 ‘와사풍’이었다. 와사풍 치료를 받으려고 석 달 열흘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주읍 한의원에 치료받으러 다녔다. 몸이 성치 않으니 식당일에서 손을 뗐다.
“골프장 손님들이 할매 아숩다 캐 쌌는데 어쩔 수 없었어. 아들은 롯데골프장에서 이것저것 다 손보는 일 하다가 롯데가 저렇게 되는 바람에 김천으로 일을 옮겼어. 한 7년 다녔는데 임금도 많이 안 올려주고 그랬어. 나락 농사 조금 짓고, 내랑 식당같이 하면서 살았어.”
부지런히 치료한 덕에 ‘와사풍’은 다 나았다. 그러나 사드는 아직 물리치지 못했다.
“경찰 너거 진밭에 가서 사드 끌어안고 자빠져 있거라”
사드 장비 반입을 예고한 것은 경찰의 움직임이었다. 다른 날보다 경찰이 늘었다. 서울에서 경찰이 대거 성주로 이동한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날따라 경찰들의 행동은 민첩해 보였다. 낌새가 수상쩍어 김천, 성주, 원불교 그 옆에 천주교와 개신교까지 긴장하면서 소성리에서 밤샘을 준비했다. 사드가 소성리로 들어오기 전날 성주촛불로 내려가려던 금연 할매는 난롯가에 앉아서 “오늘은 여기에 있자”고 했다. 느낌이 이상했었나 보다. 소성리 할매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난롯가에서 늦은 밤까지 지키고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은 작전에 들어갔고, 새벽녘 소성리 정적을 깨우는 사이렌이 울렸다.
“처음에 방송할 때 눈이 퍼뜩 뜨였어. 시간 볼 여가 어딨노. 첫 방송 하자마자 막 뛰어나온께 경찰들이 골목에 있더라구. 집 앞에도 경찰이 서 있대. 나는 있기나 말기나 빽, 틀어서 뛰어갔어. 이것들이 미리 다 준비했어. 그래서 한번 도로로 나가보질 못했어. 돌멩이(평화캠프와 별빛축제를 위해 돌탑 쌓기 프로그램으로 돌을 준비했었다.) 있제. 저거는 흰 선 안에 안 들어가고 흰 선 밖에 다 나와 있대. 우리보고는 불법이라고 해놓고. 저거는 와 다 흰 선 안에 안 들어가고 흰 선 밖에 나와 있노. 저거는 불법해도 되나. 도로로 나갈라 한께 이것들이 자꾸 막아. 망할 놈의 경찰 새끼들이. 가시나가 자꾸 나발(경찰 경고방송)을 불어 싸서 듣기 싫어 죽겠어.”
사드 장비가 마을 앞을 지나가고 나서 분통한 금연 할매는 경찰에게 소리소리 질렀다.
“나도 너거 같은 손자들이 있다. 와 안 보내주노. 이제 사드 왔으니까 가뿌라. 진밭에 가서 사드를 끌어안고 자빠져 있거라. 안 그러면 너거 대갈빡에 사드를 다 박아 뿔기다.”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이리저리 아무리 다녀 봐도, 경찰이 빽빽하게 다 막아서 한길로 가는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가 많아서가 아니라, 경찰이 너무 많아서였다. 사드 장비가 들어오는 4월 26일 새벽 2시부터 소성리 할매들과 주민들, 그리고 연대자들은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경찰에게 포위당해서 갇힌 시간을 보내야했다. 소성리 할매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할마이들 어디 가겠노? 젊으면 떠나보기라도 하겠다. 갈 데도 없는 할마이들은 여기서 사드나 막다가 죽어야지.”
가는 봄에 사드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소성리 논둑의 봄까치꽃도 작은 주먹을 말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