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는 1강 2중 2약의 판세라고 떠들고 있다. 9년 권좌의 영화를 누렸던 극우 세력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 색깔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선거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홍준표 후보의 구호가 “좌파 정권 안 된다”로 바뀌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다.
그들의 주군(主君) 박근혜는 탄핵당했다. 야권, 그들이 부르는 이름대로 좌파에 의해 물러난 게 아니다. 국가 기관인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했고, 헌법재판소가 ‘인용’ 결정을 내림으로써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정한 법의 판결로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엔 촛불시민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박근혜가 만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도 없어져야 할 당이다. 거기에 붙어 국정 농단에 협조나 방조한 사람들도 조용히 물러앉아 참회의 시간을 갖는 게 옳다. 그런 지가 얼마 된다고 좌파에게 정권을 넘겨줘선 안 되니 홍준표에게 표를 달라고?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더 가관은 새누리당을 가짜 보수로 낙인찍고 건전 보수라며 바른정당을 만든 일부 의원들의 작태이다. 그들은 박근혜 탄핵에 일조한 사람이기도 해서 더 의아하다. 그들 중 비(非) 유승민계 일부가 정권을 좌파에게 줄 수 없다면서 바른정당을 탈당, 홍준표 지지로 돌아섰다.
정치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 없는 정치인은 ‘철새’와 다름없다. 가짜 보수, 국정 농단 세력이라고 낙인찍고 나온 정당에 석 달여 만에 다시 들어간다는 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이다. 거기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찾은 명분이 좌파 집권 위기론이다. 좌파에게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참으로 치졸하다. 아무리 실리를 쫓는 게 우리 정치 현실이라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이들이 조금의 생각이라도 있다면 궁색한 말로 자신을 합리화해 정치 생명을 연장할 것이 아니라 정치를 그만두는 게 낫다. 바른정당 탈당파들의 작태는 구태 정치의 전형이다.
극우 정치인 뺨치는 몇몇 목사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들의 극우적 행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교계 지도자연(指導者然)하는 기독교도 몇 사람이 어제 자유한국당을 찾아가서 홍준표 지지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범(汎)’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이 없다.
그들 목사 중 하나는 선거 때마다 1천2백만 기독교도 운운하며 정당을 만들어 기독교인 전체, 아니, 하나님 얼굴에 먹칠하는 이다. 그리스도 이름을 앞세우며 치른 선거에서 매번 꼴찌에서 손가락 꼽을 정도밖에 득표하지 못한다. 이런 게 무슨 하나님이 만든 정당인가.
’범’기독교를 참칭하는 이들의 홍준표 지지 명분도 정권을 좌파에게 넘겨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 명분 치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옹색한 분이신가. 좌파라면 무서워서 도망가시겠는가. 그들을 배척하며 문을 잠그고 계시겠는가. 좌파 없는 세상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기를 원하시겠는가.
난 단언컨대 한국 기독교는 이런 자들 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명분은 홍준표가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노선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몇몇 목사의 의사를 꺾을 생각은 없다. 제발 ‘범기독교’ 운운은 더 이상 쓰지 말기 바란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워서 하는 말이다.
정치에서 좌우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로 알고 있다. 혁명 후 의회 좌석 배치에서 의장을 중심으로 왼쪽(左)에 몽테뉴당, 오른쪽(右)에 지롱드당이 앉았다. 몽테뉴당은 개혁 또는 진보적 입장을 취했고, 지롱드당은 부르주아 중심으로 현실 안주 입장을 취했다. 근대 이후로 좌와 우는 역사 발전의 두 수레바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권을 좌파에 넘겨 줄 수 없다고? 이건 우익의 희망 사항일 뿐 판단과 결정은 국민이 한다. 좌든 우든 정치하는 사람들은 예의염치(禮儀廉恥)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속한 통치 집단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대통령이 탄핵되었는데도 좌파 운운하며 표를 구걸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기조차 하다.
미국 언론인이자 진보적 역사학자인 토마스 프랭크가 10여 년 전에 책을 하나 출간했다. 제목이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캔자스에 무슨 일이 있었나?)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흥미 있는 문제를 찾아 원인 찾기에 나선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캔자스주가 왜 부자를 위하는 공화당에 몰표를 주고 있는가.
이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프레임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우익 정당에 투표하는 행위는 미국 캔자스와 비슷하다. 프랭크가 밝혀낸 원인이 이른바 ‘문화전쟁’이다. 선거에 이슈가 되어야 할 삶의 문제(정치, 경제 등) 대신에 국민 눈을 다른 데로 돌린다는 것이다. 가령 낙태와 동성애, 진화론, 총기 소지 문제 등. 이 문제를 갖고 싸우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공화당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도 ‘문화전쟁’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선거에서 ‘이념’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시켜 알겨먹는 것처럼. 그러니까 미국의 문화전쟁은 우리 이념전쟁과 유사한 프레임이라 할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이념전쟁은 극우 보수 세력에 늘 유리하게 작용해 왔다.
홍준표나 바른정당 탈당파들, 그리고 ‘범’기독교계를 참칭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좌파 집권 위험론’도 정치, 경제 이슈를 희석시켜 서민들 표를 얻으려는 얄팍한 선거 전술에 불과하다. 좌파에게 정권을 넘겨 줄 수 없다는 것은 이념이라는 낡은 프레임에 의지해 정권을 틀어잡겠다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그들의 바람에 불과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는 정당에, 부자들이 부자를 위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계급 투표라고 한다. 오늘날 온전한 계급 투표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나를 위하는 정당과 후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투표하는 것은 필요하다. 잘못된 지배 논리는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또 표로밖에 보지 않는다.
국민이 진정한 섬김의 대상이 될 때, 그 나라는 비로소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된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쳐 지난 9년간 극우 보수 정권에서 우리는 대통령이 국민 위에 군림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똑똑하게 보았다. 국가 발전을 진정 원하는 사람들의 투표 행위는 어떠해야 하는가. 정말 숙고(熟考)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