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성주를 향하는 자동차 안, 배미영(38) 씨는 잔뜩 들떴다. 빚을 내긴 했지만 처음 갖는 집. 그 집에서는 네 가족 모두 모여 사는 것도 처음이리라. 미리 봐 둔 아파트는 맘에 쏙 들었다. 썩 넓진 않았지만, 남향에 창문으론 볕이 쏟아졌다. 다락방도 딸려 있어 더 따지지 않고 계약했다. 이사 오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점검하러 오는 길, 차 안에서 보니 도로표지판에 낯익은 지명이 보인다.
‘하빈이 성주에 붙어있었네?’
하빈. 유년시절 기억은 배미영 씨가 살던 좁고 아늑한 집처럼 따스했다. 골목대장으로서 마을 아이들과 누비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며, 배미영 씨는 회상에 젖어 들었다.
하빈 공소에 딸린 집에 살며 사랑 받은 어린이
김해공항 쪽 이사로 그늘진 얼굴
중국 유학에서 만나 남편과 성주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꿈꾸던 성주 생활
어릴 적 집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관할 하빈공소에 딸려 있었다. 공소 강당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배미영 씨네 방과 주방이 나왔다. 화장실이 강당 왼쪽에 있어, 해가 지고 나서 엄마 없이 갈 수 없는 것만 빼면 불편함도 없었다. 미사가 없는 날, 공소 미끄럼틀은 배미영 씨와 남동생 차지가 됐다. 동네 아이들과 온종일 놀면서 매일같이 아이스크림콘을 손에 들고 퇴근할 아빠를 저물녘까지 기다렸다. 마을 아이들을 챙겨서 유치원에 갈 때는 부러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쪼르르 달려가 인사하기도 했다. 아빠가 인사에 엄격하기도 했지만, 기사 아저씨가 귀엽다며 유치원까지 태워주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공소 허드렛일과 가사노동으로 바빴다. 미사 준비를 도맡았다. 어느 날 성탄절에는 트리를 꾸미느라 밤을 새웠는데, 엄마 곁에 붙어있느라 잠을 못 자는 바람에 쌍코피가 흘렀다. ‘미영아, 내가 니를 이렇게 피곤하게 했구나’라는 엄마 음성은 따뜻했다.
엄마는 부업도 했다. 똑딱이 핀을 만드는 걸 유심히 지켜보다 옆에서 거들었다. 배미영 씨가 건드리는 핀은 계속 불량품이 됐다. 그래도 엄마는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모난 데 없이 자란 배미영 씨는 마을에서도 사랑받는 아이가 됐다.
배미영 씨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 것은 김해 대저읍(현재 부산시 관할)으로 옮기면서부터다. 대저에서 기억은 괴물 같은 공포로 시작해 날카로운 신경증으로 점철됐다. 부산비행장이 1976년 대저읍에 들어서며 김해공항이 됐고, 대저는 소음에 시달리게 됐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 가는 길, 짭짤이토마토 농가를 지나면 공항도로가 나온다. 머리 바로 위로 착륙하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기겁할 소음과 진동이 따라왔다. 13살 배미영 씨에겐 커다란 공포였다.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다가도 뚝뚝 멈추기 일쑤였다. 집안 텔레비전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부모님 목소리도 같이 커졌다. 귀가하는 아빠 얼굴은 꽁꽁 언 아이스크림 같았다. 좋은 말만 해주던 엄마 얼굴도 딱딱해졌다. 미영 씨와 동생이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하자 도시락 4개를 싸야 했고, 출퇴근 거리도 늘어 여러모로 힘에 부쳤다.
22살 대학교 2학년이 되는 해, 버티다 못한 배미영 씨네 가족은 대저를 떠나 부산 번화가로 나왔다. 그즈음 배미영 씨는 학보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공항이 없는 곳으로 나오고 대학 생활도 바빠지며 어둡고 소극적이던 모습도 다시 나아지기 시작했다. 동아리나 학회도 여러 곳 다녀봤다. 1997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도 추락하던 시기지만, 학내 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했다. 토요일 신문 인쇄 전 금요일 마감을 위해 편집실에 남아있다가 갑자기 백골단이 들이닥쳐 책상 밑으로 숨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날은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자연스레 부모님도 알게 됐다. 집에서 학보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떨어진 것도 문제가 됐다. 편집권 문제로 학교본부 앞에서 학보사가 단식농성에 들어가며, 죄책감이 들면서도 힘에 부친 배미영 씨는 학보사를 그만뒀다.
관심을 돌렸다. 2학년이 되며 학교 밖으로 나가 여러 아르바이트를 진전했다. 식당, 톨게이트 검표원, 학원 강사. 여러 곳에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성격도 바뀌기 시작했다. 어둡고 칙칙했던 청소년기와 점점 이별하고 있었다. 배미영 씨는 돈을 모아 북경으로 갔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당시였다.
배미영 씨가 마주친 중국은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이었다. 출생 신고도 하지 못하는 헤이하이즈(黑孩子)를 왕푸징 거리에서 처음 봤다. 한 아이는 머리를 다쳐 두개골이 보였다.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관리자가 일부러 치료도 안 해주는 듯 했다. 푼돈 받고 일하는 농민공(農民工)들은 거리마다 가득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날이었다. 배미영 씨는 거리에 쓰러져 있는데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응급차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다들 구경만 했다. 겨우 휴대전화를 빌려 한인회 사람에게 연락했다. 그는 유일하게 유학생 중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에 돌아온 배미영 씨는 2004년 그 유학생과 결혼했다.
결혼 후 배미영 씨는 남편 직장이 있는 경주에 자리 잡았다. 거기서 2007년 린이를 낳았다. 3년 만에 힘들게 낳은 아이다 보니 육아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남편은 맞벌이를 원했고, 처음으로 남편과 크게 싸웠다. 결국, 린이는 부산 친정에 맡겼다. 2009년 낳은 재서도 부산으로 갔다. 경주관광안내소에서 안내원 일하던 배미영 씨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뒤집기 하는 모습, 옹알이하는 모습, 기어 다니는 모습을 영상으로만 봤다. 까만 줄무늬 치발기를 쥐고 옹알이하는 린이를 화면으로 보는 배미영 씨 얼굴은 웃음과 눈물로 뒤범벅됐다. 뱃속에서도 팔다리 힘차게 젓던 린이는 열심히 팔을 흔들다 치발기를 얼굴에 떨어트렸다. 울지도 않고 옹알이하는 모습에서 미영 씨는 외로움을 느꼈다.
손님으로부터, 그리고 안내소 고참들로부터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던 차. 배미영 씨는 부모교육 강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뒀다. 린이에게 화풀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린이가 경주로 오고 나서, 의도치않게 린이에게 직장 스트레스를 풀게 됐다. 물을 쏟는다거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심하게 화를 냈다. 몇 개월이 지나자 린이는 부분 탈모를 겪을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어린이집 선생님 탓인 줄로 알았지만, 아니라는 걸 후에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경주로 데려온 것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린이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 아마도 린이는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나를 길렀던 것처럼, 화내지 않고 또 아이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1년 성주에 정착하면서 배미영 씨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무탈한 일상이었다.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여 살며, 육아에 힘썼다. 아이들은 미영 씨가 개발한 경비놀이를 좋아했다. 경비놀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학생들도 와서 어울려 놀게 됐다. 맞벌이 부모님 아래서 심심한 아이들이 “나도 해도 돼요?” 라며 자주 모여들었다. 미영 씨는 아이들끼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중재했고, 아이들도 잘 따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신발 던지기’, ‘비석치기’를 하다 보면 해는 지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나날이었다. 틈틈이 부모교육도 받으며, 온 가족이 놀 수 있는 놀이터 같은 학교를 만들어야겠다는 꿈도 만들었다. 그곳에서는 엄마도 아빠도 함께 놀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구나 즐겁게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
아이들을 자주 보기 위해 작업실도 학교 앞에 만들었다. 분식집이었던 가게를 싼값에 얻어 재봉틀을 들이고 서문시장에서 옷감을 떼왔다. 가게에도 아이들이 놀 공간을 만들었다. 남편이 와서 데크를 깔았다. 콘크리트 벽, 좁은 창문과 환풍구와 어우러져 아지트 같은 느낌을 풍겼다. 공간이 생기자 아이들과 친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이 따라 들어오는 학부모들과도 조금씩 안면을 텄다. 여름이면 물놀이 가서 고기도 잡고 헤엄치는 걸 즐겼다. 저녁으로는 운동장에서 인라인스케이트도 탔다. 미영 씨는 평화로운 가정을 성주에서 처음 느꼈다.
평화로운 가정을 망가뜨린 사드
학보사에서는 도망쳤지만
성주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투쟁위 참여하며 처음겪는 투쟁
사드 배치 발표로 짧은 평화는 꿈처럼 사라졌다. 사드에 대해서는 마땅히 들은 바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전자파 피해에 대한 공포는 와 닿았다. 너무도 급작스러웠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사드가 무엇인지, 어떤 피해를 주는지, 신뢰 가는 내용을 접할 수 없었다. 린이, 재서 생각부터 났다. 1318카톡방에 초대됐다. 200명도 안 되던 카톡방이 순식간에 1,318명까지 불었다. 13일 성밖숲에서 집회한다는 소식도 카톡방에서 들었다. 여러 소식이 넘쳐나는 와중에 배미영 씨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살지···아이들은 어쩌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갈팡질팡하던 새 한 엄마(배정하)가 아이와 등교를 거부하고 함께 군청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4일 손피켓을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군청으로 향했다. 잠시 열었던 가게도 아예 걸어 잠궜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병에라도 걸릴듯했다. 마음속 가득 불안을 안고 1인시위로, 집회장으로 향했다. 학보사 기자 시절을 떠올리며 여러 자료를 찾아봤던 배미영 씨는 결론을 내렸다. 사드는 우리한테 필요한 게 아니다. 미사일을 막는다는 사드는 오히려 전쟁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성주가 타격 대상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배미영 씨는 공포심에 몸서리를 쳤다.
사실 당시만 해도 배미영 씨 부부는 훗날 경주로 돌아가 살 것으로 생각했다. 성주로 옮긴 것도 남편 직장 위치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따져가며 고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에게 경주 좋은 땅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해 놨고, 그 땅에서 집 짓고 오순도순 살 계획을 세웠었다.
대학 시절 학보사에서 도망치듯 나온 순간이 생각났다. 더이상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도망간다는 건 아이들한테도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교육 강의 시간 참가 부모들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부모가 정의롭지 못하고 비겁하면 아이들도 배운다. 말보다 행동을 보고 배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던 차 16일, 성주사드배치저지 투쟁위원회가 발족했다. 치맥페스티벌에 손수 중국어를 쓴 피켓을 들고 사드 반대 홍보에 나선 27일, 배미영 씨는 투쟁위 기획팀장을 만났고, 그길로 투쟁위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기획분과에 들어간 후, 투쟁위 공동위원장 중 한 사람이던 정영길 경북도의원 성주군 사무실에 터를 잡았다. 그 뒤로는 회의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다. 10만 서명운동, 815삭발식, 인간띠잇기 등 굵직한 행사 외에도 사소한 행사까지 기획해야 할 일이 많았다. 투쟁위 일을 차치하더라도 이 시기 성주군민은 평상시처럼 생활하기 힘들었다. 불안감이 컸고, 불안감 해소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런 불안한 마음 탓에 촛불이라도 들려고 군청 광장으로 나오는 사람이 1천 명이 넘었다. 미영 씨도 처음 접하는 ‘투쟁’에 몸을 실었다. 회의가 없더라도 가게 대신 이미현 씨가 운영하는 카페 봄앤봄으로 출근했다. 처음이라서일까, 미영 씨는 아이들을 비롯해 자기 삶을 돌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작은 일에도 마음이 요동쳤다.
8월이 되면서 투쟁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815삭발식을 치르자마자 투쟁위는 국방부와 접촉했다. 성산포대가 최적지라던 국방부는 성주지역 안이라면 사드 부지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도 흘렸다. 21일, 투쟁위는 소위 제3부지에 대한 입장을 표결에 부쳤다. 제3부지 찬성 측이 다수인 상황에서 답답한 회의를 이어가던 순간, 노광희 투쟁위 홍보단장이 의결도 거치지 않은 입장을 발표해버렸다. 회의 중 뜬금없는 소식을 들은 미영 씨와 투쟁위원들은 급히 군청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에는 기자들이 주욱 서 있었다. 쫓아 나온 투쟁위원들은 노광희 단장 발표가 무효라고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19일 촛불집회에서 ‘제3부지’도 검토될 수 있다고 슬쩍 흘렸던 김항곤 군수도 결국 22일 성산포대를 제외한 제3부지 검토를 요청했다. 군수의 기자회견을 막으려 했던 이재동, 배현무 씨가 끌려 나오는 걸 보며 미영 씨는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배신감도 들었다. 군수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미영 씨는 또다시 눈물흘렸다.
투쟁위는 제3부지 찬성 측이 빠져나가고서 재편됐다. 기나긴 투쟁은 힘들었지만, 배미영 씨는 발길을 끊지 않고 집회에 나왔다. 경험이 쌓이며 일상과 투쟁을 조율하는 법도 배웠다. 접어뒀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는 아이들 덕분이었다. 잘 참는 듯했던 아이들은 사실 힘들어했다. 엄마가 옳은 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들 나름대로도 일상이 뒤틀렸다. 특히, 엄마와 경비놀이를 하지 못하는 상황도 힘들었다. 아이들은 사드 때문에 엄마와 놀지 못한다면서 사드를 미워했다. 가끔 정영길 의원 사무실에 심심함을 이겨내려는 아이들 보기가 미안했다. 1318카톡방을 보며 아이들이 보채는 소리에 건성으로 반응했던 하루, 린이와 재서가 울기 시작했다. 미영 씨에게 놀아달라고 조르던 아이들은 반응이 없자 참지 못한 것이다. 미영 씨는 아이들 눈물을 보며 자책했다. 미영 씨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너희를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정작 너희를 못 봤어. 이야기를 안 들어줘서 미안해”
배미영 씨는 아이들과 집회에 나가는 날까지도 의논해서 결정했다. 함께 나가는 날은 아이들도 잘 따랐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처지로 집회에 따라 나온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생기고 나서는 오히려 아이들이 촛불집회에 나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투쟁에 나서며 배미영 씨는 성주를 다시 보게 됐다. 사드는 백해무익이지만, 사드로 인한 마주침은 소중했다. 정부의, 정치의, 국가의 새로운 모습을 경험한 성주군민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성주로 들어오는 듯했던 공항도 결국 촛불집회에 나오던 사람들이 뭉쳐 막아냈다. 이제 사드만 막아내면 성주에 뿌리내리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도 즐거워하며, 더욱이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미영 씨 최선의 모습이리라고 생각했다. 권력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최고의 교육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뛰어놀기만 하는 듯했던 아이들도 보고 듣고 배우고 있었다. ‘박근혜는 왜 세월호에 탔던 언니 오빠들을 구하지 않았어?’, ‘탄핵은 왜 하는 거야?’ 아이들은 질문했다.
하루는 재서가 물었다.
“엄마, 성주 최고의 무기는 뭐게?”
“응, 뭐지?”
“그것도 몰라? 평화잖아. 평화!”
린이도 말했다.
“엄마, 나는 성주에 사드가 안 들어오고 여기서 그냥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 성주가 평화로웠으면 좋겠어”
사드 배치 발표 이후 왜곡보도, 믿었던 정당, 정치인의 배신, 호도된 여론을 직접 겪은 배미영 씨는 깨달았다. 그리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세월호 분향소를 찾았다. 평화리본과 함께 붙은 세월호 리본, 팔찌, 스티커는 성주군민의 일상 곳곳에 녹아있다. 배미영 씨는 자기 일이 아니라며 가볍게 넘겼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같은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미영 씨의 팔에도 언제나 평화팔찌와 함께 세월호 팔찌가 걸려있다.
2017년 4월, 배미영 씨는 아이들과 함께 무탈히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4월, 세월호 참사 3주기 추모 준비에 나섰다. 재서가 미끄럼틀에 머리를 부딪친 2015년을 떠올린다. 그때 서문시장에 원단을 사러 갔던 미영 씨는 남편의 연락을 받고 어떻게 운전한지도 모르게 병원을 향했다. 그때 운전석에서 느꼈던 마음은 세월호 참사 당시 불안에 떨었던 부모들 마음에 비할 수 없겠지만, 미루어 짐작할 때마다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영 씨는 사드에서도 세월호를 본다.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도망간 선장 대신, 아이들과 모두를 위해서, 미영 씨는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