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의 봄
-3월 18일, 소성리 평화발걸음을 다녀와서
김수상
SCENE #1
꽃이 핀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신호다
꽃이 핀다는 것은 내가
여기서 열매를 맺겠다는 다짐이다
수천 명의 신호와 다짐들이
깃발을 들고 초전에 모였다
풍물을 앞세우니 하늘도 구름을 거두며
빛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봄바람에 나부끼는 성주촛불 깃발을 따라
끝도 없이 행진하는 푸른 발자국의 대오들,
모두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깃발이 있었나!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랑이 있었나!
SCENE #2
꽃을 밀어내고 얼굴을 내민
하우스의 참외들도 신이 났다
아이들은 거름냄새에 코를 움켜쥐고도 환하게 웃었다
참외들도 주먹을 쥐었다
“사드가고 평화오라!”
“사드배치 원천무효!”
“박근혜를 감방으로!”
길목 곳곳에는 먹을거리가 수북하고
가다가 행여 지칠까 노래 소리도 드높다
인심이 만장이니 깃발도 만장이다
홈실의 오르막길 애기사과나무는
천개의 푸른 눈을 달고 천개의 깃발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이 기록하지 못한 역사는 자연이 몸에 새긴다
홈실 고갯마루의 애기사과나무들은
푸른 평화의 발자국 하나하나를 꽃망울에 새겼다
SCENE# 3
소야의 초입 삼거리에는 전국에서 당도한
평화버스들이 깃발을 말아놓은 듯 알록달록하다
김천에서 내려오는 깃발 깃발들,
초전에서 내려오는 끝을 모를 깃발 깃발들,
깃발의 물결이 삼거리에서 합류하자
거대한 파도가 되어 소야로 간다
마중 나온 할매들이 눈시울을 붉힌다
앞치마로 연신 눈물을 훔친다
함께 길을 걷던 옆 사람이 말했다
“할매들의 저 앞치마는 행주대첩을 완성한 행주치마가 될 거예요.”
그래, 그렇지, 우리는
‘소성리대첩’을 완성하러가는 평화의 발자국들이지
SCENE #4
“사랑은 차량처럼 문제가 없는 거예요.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운전자이며
승객이고 도로일 뿐이에요.”
나는 카프카의 문장을 가방 뒤에 붙이고 걷는다
걸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을 난폭하게 몰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사랑이 다쳤다
우리는 그 난폭한 운전자들에게 항의하고
면허증을 몰수하러 가는 길이다
소성리의 봄하늘 위로 구호들이 번진다
하늘이 그 구호들을 고스란히 다 안아준다
깃발들은 평화의 풍선들로 화답했다
떠오르는 평화,
받아주는 하늘,
소성리의 봄하늘이 울먹였다
SCENE #5
길을 빼앗기면 꿈도 빼앗긴다
평화의 순례길을 도둑질한 놈들이
이제는 철조망까지 쳤다
길을 되찾기 위해 찬서리를 맞으며
밤을 새는 사막의 은수자(隱修者)들이 있다
그 평화의 구도자들을 위해
사람들이 작은 천막 하나를 치려고 하자
그것을 때려 부순 경찰들이 소성리에 있다
전국의 깃발들이 그 야만을 다 지켜보았다
여성활동가 한 사람이 트럭 위에서
폭력의 경찰들에 맞서며 목이 터져라
구호로 맞서 싸우고 있다
소야의 봄꽃들도 쪼막만한 주먹을 쥐고 구호를 따라 불렀다
SCENE #6
밤이 되자 썰물처럼 깃발들이 다 빠져나갔다
할매들만 마을회관에 남아서 아픈 관절을 만진다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낡은 유모차도 저 혼자 쓸쓸해졌다
머리띠도 풀었고 구호도 물러갔다
소야의 벌판 위로 별빛만 쏟아진다
아, 우리는 다시 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버려져 다시 외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만 남아서 길가에 드러누워 싸우는 것이 아닐까,
서러운 꿈이 물러가고 손님처럼 아침이 왔다
마을회관으로 밥이 오고 물이 오고
빵이 오고 떡이 오고 반찬이 왔다
사람들이 오고 깃발이 오고
시가 오고 노래가 왔다
너희의 봄은 이해타산의 계산으로 오지만
우리의 봄은 합산으로 온다
소야의 봄은 왁자지껄 붐빈다
소야에선 하늘과 땅 사이가 좁다
우리가 그 사이를 평화로 채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빈터에 사랑을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소성리에 봄이 와야 진짜 봄이다!
소성리 할매가 웃어야 진정한 봄이다!
사드는 가고 평화는 오라!
전쟁은 가고 평화여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