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혁명’, 나만의 생각이다. 그냥 붙여 본 것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제3세계 나라들의 민중혁명에 꽃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 말이다.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 이집트의 연꽃 혁명, 그루지아의 장미 혁명 등. 그런데 왜 혁명에 꽃말을 결합시킬까. 혁명이 힘과 힘의 대결이라면 꽃은 그 반대 개념이 아닌가.
어떤 시인은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다. 꽃과 피(血)는 동의어다. 꽃에 붙는 동사는 다른 것이 아닌 ‘피다’이다. 혁명엔 피의 희생이 따랐다. 따라서 혁명은 꽃이면서 피다.
(꽃이) ‘피다’의 반대말은 ‘지다’이다.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지는(패하는)’ 것이다. 꽃이 지는 것과 혁명에서 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꽃과 혁명을 조합한 이유이다. 그럴듯하지만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우리 촛불 혁명에 꽃을 갖다 붙인다면?
수선화가 어떨까. 수선화 혁명.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수선화가 겨울꽃이라는 것. 개화 시기가 12월에서 3월 사이이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우리의 촛불집회 기간과 일치한다.
둘째, 수선화 꽃말의 의미이다. 여러 뜻이 있지만, 자기애(自己愛), 고결, 가르침 등의 뜻에 주목하고자 한다. 촛불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다. 시민이 주인임(자기애)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3개월 동안 20회에 걸쳐 촛불을 밝혔다. 참석자는 연인원 1천6백만 명을 넘었다.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단 한 건의 불상사(구속자 무, 부상자 무)가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참가자들의 높은 시민 의식, 즉 수선화와 같은 고결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 촛불집회는 좋은 학습의 장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목소리를 냈지만 목표는 같았다. 박근혜 탄핵! 현장에서 여러 다른 소리를 들음으로써 사고(思考)의 폭을 넓혔다. 수선화의 꽃말 ‘가르침’의 전용(轉用)이다.
넷째, 우리나라가 수선화의 주요 서식지 중 한 곳이라는 점이다. 수선화의 말뜻이 우리 촛불집회와 부합한다 해도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아 생소한 꽃이라면 문제다. 하지만 수선화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친근한 꽃이다.
수선화 혁명, 듣기와 말하기에도 자연스럽다. 우리 촛불집회를 나는 앞으로 이렇게 부르려 한다. 촛불집회를 2018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개인이 아닌 기관 및 단체가 받은 전례가 있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수선화 혁명'(?)은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기본 동력이 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거기에 더해 국민의 높은 민주주의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각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즐거운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