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이제 봄이 왔다고 새파랗게 나온다. 저 아래는 꽃도 폈어요. 매화꽃이 폈어” 박민애(가명, 73) 씨는 5km 이상을 걸으며 봄을 봤다. 다리가 아프다면서도 꿋꿋하게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오는데 내가 넋 놓고 앉아 있으면 뭐하노” 그렇게 민애 씨는 경북 성주군 초전면 농협 앞에서부터 약 8km를 걸어 초전면 소성리 마을회관에 이르렀다.
김우리(가명, 9살) 씨도 봄을 찾긴 마찬가지였다. 대열 선두와도 꽤 떨어진 곳에서 우리 씨는 들꽃을 꺾어 움켜쥐었다. 손에 든 꽃과 비슷한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우리 씨는 걷다가, 꽃을 꺾다가 했다.
“혼자 왔어요?”
“아니요, 엄마랑 아빠랑은 뒤에 있어요”
“어디서 왔어요?”
“경산이요”
“몇 살인데요?”
“아홉 살이요”
“여기까지 힘든데 왜 온 거예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중국이랑 가까운 우리나라에 사드를 설치한다고 하잖아요. 근데 설치하려는 마을이 이 마을인 거죠. 제가 너무 늦게 와가지고 빨리 가라고 해서 빨리 가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온 거예요”
우리 씨는 9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말을 잘했다. 잠시 후 뒤에서 엄마가 그를 불러세웠다. 엄마 손을 잡고 우리 씨도 소성리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민애 씨와 우리 씨 앞에도, 뒤에도 수많은 사람이 제각기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내용을 적은 깃발 하나, 손자보 하나를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전국에서 약 5,000명이 시골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원회, 원불교 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 등은 18일 ‘불법사드 원천무효 배치강행 중단을 위한 소성리 범국민 평화행동’을 열었다.
초전면 농협에서 소성리 마을회관까지 걷고, 평화대회를 가진 후 다시 사드 배치 부지로 예정된 롯데골프장까지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총 약 10km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경찰은 애초 행진 장소를 골프장에서 1km 정도 떨어진 진밭교 삼거리로 제한했다. 하지만 법원이 17일 경찰의 제한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법원은 저녁 6시 30분전까지는 골프장 25m 앞까지 갈 수 있도록 결정했다.
대학생, 퇴직교사,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드는 백해무익”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행진···70대 할머니도 꿋꿋하게
오후 1시께 초전면 농협 앞을 출발한 민애 씨는 오후 3시 10분께 월곡교 삼거리에 도달했다. “우와 차 많다” 민애 씨가 가리키는 곳엔 김천 농소면사무소에서 김천 주민을 태워 온 버스 20여 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김천, 성주 주민 그리고 전국에서 찾아온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1.5km 남짓 남은 소성리로 함께 걷기 시작했다.
5,000명은 하나같이 정부의 사드배치 강행을 성토했다. 국민대 학생 이주영 씨는 “사드는 안보라는 명분하에 졸속으로 집행하려는 게 뻔히 보이는데, 안보나 외교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에 큰 타격을 줬다”며 “사실 북핵에 확실한 방어체제인지도 의문이 들고 외교에서는 중국 보복에 정부가 대처도 못 한다”고 지적했다.
경북 포항에서 온 해직교사 이용기 씨도 “박근혜 정부가 억지로, 급하게 사드를 성주에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화가 나서 왔다”면서 “사드 반대 분위기가 활기 있게 일어나고 있다. 반대하는 국민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산에서 왔다는 50대 여성은 “미국 국방장관한테 할 말이 있다. 너희도 양심이 있으면 왜 우리나라를 일본하고 중국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바보를 만드느냐. 정치인들이야 욕심 때문에 바본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은 바보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사드배치를 강행하는 미국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뱉었다.
오후 3시 30분께 길게 늘어선 행진 선두가 소성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이후로도 25분가량 행진 대열이 꾸준히 마을회관에 당도했다. 회관 앞 왕복 2차선 도로가 가득 메워졌다. 롯데골프장 직원들이 사용하던 기숙사 건물에서 성주 방면으로 약 100m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소성리 이장, “국방부 작태는 일제시대 친일매국노와 같아”
진밭교에서 원불교 기도회 천막 문제로 경찰과 충돌 일기도
평화행동 주최 측은 3시 40분께부터 평화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석주 소성리 이장이 무대에 올라 “전국에서 사드를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애국 시민 여러분 감사하다”고 환영 인사를 전했다. 이 이장은 “소성리의 뜻은 아름다울 소(邵)에, 들 야(野)다. 아름다운 고장에 이렇게 난리가 났다. 평화롭고 조용한 이 동네에 사드가 웬 말이냐”고 덧붙였다.
이석주 이장은 “달마산 기슭에 롯데골프장을 롯데기공에서 공사를 했다. 저 터가 얼마나 귀중한 턴데, 저 산을 건들고 롯데기공이 부도가 나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저 땅이 그런 땅”이라며 “국방부가 하는 작태가 일제시대 친일매국노들이 쇠말뚝을 박아 우리나라 맥을 끊은 것과 같다. 사드를 여기에 배치하면 대한민국에 재앙이 온다. 산맥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사드배치가 가져올 재앙(?)을 암시했다.
끝으로 이 이장은 “우리 동네 주민들이 앞장서서 동네를 지키겠다”며 “전국의 애국 시민 여러분에게 호소한다. 그때 함께해서 대한민국 이 땅 어디에도 사드가 배치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길 바란다”고 도움을 청했다.
오후 5시 10분께 평화대회를 마무리한 참석자들은 골프장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진밭교를 지나 약 100m를 더 올라간 뒤에 간단하게 집회를 진행하고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진밭교 앞에서 평화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던 원불교도들이 천막을 설치하면서 경찰과 마찰이 일기도 했다. 경찰은 이날 약 2,500명을 배치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이날 평화행동에는 나경채 공동대표를 비롯해 정의당에서 김종대, 윤소하, 이정미 의원이 참석했다. 박원석 전 의원도 함께했다. 무소속 김종훈, 윤종오 의원도 참여했고, 이재명 성남시장 부인 김혜경 씨도 평화대회에 참석했다. 이 밖에도 함세웅, 문규현 신부,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등 시민사회계와 종교계에서 다수 참석했다.
한편 성주와 김천 주민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촛불집회를 이어갔다. 오늘로 성주는 249일, 김천은 210일차 촛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