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 찬사가 쏟아진 지난해, 민주공화국 시민은 최고 권력자에게 탄핵을 선물했다. 대한민국 곳곳에 숨은 ‘적폐’를 끄집어냈다. 민중총궐기, 그리고 한상균 위원장이 구속된 민주노총은 대한민국 시민의 분노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정작, 노동하는 시민에 무감각했다. 아니 오히려 후퇴했다.
구미 4국가산업단지에는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곳이 있다. 구미시민 22명이 살지만, 시장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곳, 담벼락 넘어선 이들이 24시간 감시하는 곳,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사무실이자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25일 오후 2시께 대한민국 정부와 경상북도와 구미시가 유령 취급한 그곳 문을 열었다. 언제 이곳을 떠날지 모르기에 꼼꼼하게 매조진 천막 문을 열었다. 공장 담벼락을 한쪽 벽 삼아 기대어 앉은 두 시민이 있었다. 올해 46이 되는 오수일 씨와 김 모 씨다.
“설이라 잠깐 들렀다”고 말을 꺼내자 차가운 캔 커피를 가지고 왔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를 가져다 놓지만, 지금은 냉장고가 필요 없다. 차헌호 지회장은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내려와 구미, 김천 노조 순회에 동행했단다. 천막의 다른 주인들은 구미공단 곳곳으로 선전하러 나갔다고 한다.
박사모 이야기부터 나왔다. 이 유령천막에 사는 시민들은 지난해 11월 14일 박정희 전 대통령 99주년 탄신제가 열리던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 앞에서 ‘박근혜 퇴진’ 피켓을 들었다가 극우단체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시민 3명이 부상을 당했고, 극우단체 회원을 고소했다. 그런데 최근 경찰 조사 중에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 박사모 회원이 ‘자신이 폭행당했다’며 자신의 진단서를 제출했다.
당시 박정희 탄신제가 열리는 데 대해 대도시 시민들은 “구미 시민들은 도대체 뭐하냐”고 조롱, 비판했다. 그런데도 아이를 안고 박정희 탄신제를 비판하는 피켓팅을 하던 구미시민이 있었다. 극우단체 회원들로부터 폭언, 폭력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에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 문제 해결 농성장 주인들은 상모동 박정희 생가 앞으로 달려가 극우단체 수십 명이 둘러싼 곳에서도 꿋꿋하게 ‘박근혜 퇴진’ 피켓을 들었다. 극우단체 회원들이 피켓을 빼앗으려고 몸싸움을 벌여왔고, 폭언을 내뱉었다.
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됐다. 덕분에 아사히글라스 농성장에 사는 시민들은 큰 관심을 받았다. 2015년 7월 노조 결성 이후 일방적으로 해고된 지 16개월 동안 이만한 관심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농성장에 사는 구미시민 22명이 구미고용노동지청에 낸 부당노동행위·불법파견 고소 사건은 1년 7개월째 답이 없고, 언론의 관심도 못 받았다. 노동청은 “검찰에 수사지휘를 요청했지만, 회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결과를 확인한 후 재지휘를 받을 것”이라고 알려왔을 뿐이다. 지난해 3월 부당노동행위 판정이 났지만, 아사히글라스가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이 끝날 때까지 다루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아사히글라스 측 법률대리인은 김앤장이다.
농성장은 차가운 한숨이 더해졌다. 10월부터 상경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김앤장 앞에서 집회도 열고, 박근혜 퇴진과 해고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노숙도 했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덮은 광화문 촛불집회에도 참석했고, 싸움을 이어가기 위한 후원주점도 열었던 터였다. 수일 씨가 입을 열었다.
“아사히글라스는 시국이 시끄러워도 피해가 없어요. 노동 문제가 크게 주목받는 것도 아니고. 빨리 대선이 치러지고, 야당 대통령이 된다면 조금 바뀔까요? 우리는 최대한 버티는 것 밖에 없죠”
그래도 100만이 모였던 촛불집회에서 해고 문제를 많이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수일 씨는 “오히려 소외감을 많이 느꼈어요. 노동자가 소리를 낼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좀 전에 민주노총 부위원장 다녀갔을 때 이야기를 꺼냈어요. 부위원장이 ‘노동 문제를 말하면 이탈자가 생길 수 있다. 지금은 노동자 때문에 생긴 정세가 아니므로 최대한 조율해야 했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수일 씨와 김 씨에 따르면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자 신분인 시민들은 자유발언을 신청했다. 그런데 계속 밀렸다. 사람들이 대거 모이는 주말집회에는 행진을 다 마치고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간 밤 11시 이후에 마이크가 처음 주어졌다. 그게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없는 평일 발언대에 올라갔다. 마치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처럼.
김 씨는 “왜 그런 걸 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 다 가고 나면 소리도 잘 안 나올 때…”라고 푸념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아 참, 기자님. 문자 해고는 누가 제일 먼저 받았어요?”라고 물었다. KTX 비정규직 승무원, 이랜드-홈에버 노동자 이야기까지 거슬러갔다. 그러고는 김 씨가 말문을 열었다. 서러움과 서운함이 좁은 말문을 텄다.
“촛불집회 다니다 보면 시민들이 ‘해고’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문자 한 통에 해고된 걸 말이죠. 겪어보기 전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몇백 명씩 일하는 공장에서 말이죠. 아직 시민과 노동자 사이에는 거리가 많은 것 같아요”
기자를 포함한 세 명의 대한민국 시민은 같이 의문을 품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 씨는 “사실 우리나라 자체가 문제가 많습니다. 노동법 만들어 놓으면 뭐합니까. 손해배상 소송은 빨리빨리 처리하는데, 부당노동행위는 한참이 걸립니다.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우리보고 빨갱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일 씨는 해고와 비정규직에 둔감해진 게 아닌지 되물었다. 그는 “아내가 LG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1, 2, 3공장을 몇 개월마다 옮겨 다녔어요. 계약직으로 들어갔다가 끝나고 나오는 게 일상적이니까. 해고에 둔감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예전에 용역업체에서 관리하는 일을 할 때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웃음) 노동법도 모르고, 노조도 몰랐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우리는 평균 이상 일하고 있었어요. 여가도 없죠.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하는 게 일인데 말이죠. 적당히 벌면서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겠죠”라고 말했다.
구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는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수일 씨가 대답했다. “서울 같지는 않았어요. 집회를 준비하고 여는 사람들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거든요”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유령시민이 사는 천막농성장을 나왔다. 문 앞에는 성주군민이 건네준 ‘사드배치 결사반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유령천막을 뒤로하고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를 바라봤다. 등 뒤에 선 두 시민이 7년 동안 제집처럼 드나들던 일터가 보인다. 하늘도 맑고 푸르렀다. 담배 한 대 같이 태우고, 설을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나눴다. 웃으며 손을 내미는 두 사내. 명절이 불편한 시민에게 고작 전해 줄 말이 설 인사밖에 없다니. 기자는 미안했지만, 두 사내는 서글퍼 보이지만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송경동 시인의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다’를 곱씹으며 시민과 노동자 사이의 거리를 곱씹어봤다. ‘시민’이라는 말은 평등하지만, 때로는 폭력적이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도, 박근혜 대통령도, 우병우 전 민정수석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시민이다. 그리고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도, 광화문에서 농성을 5년째 벌이고 있는 장애인도, 사드 배치 철회를 요구하며 200여 일째 촛불은 들고 있는 성주군민도 시민이다.
따지고 보면, 대규모 집회 때마다 경찰 방송차에서 나오는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빨리 해산해주십시오”라는 말은 이렇다. 시민이라는 명찰을 붙였다가 떼어냈다가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시민 스스로, 민주노총 스스로 권력자가 하듯 시민이라는 명찰을 붙였다가 떼어냈다가 하고 있지는 않을까.
구미시민 22명의 가장 큰 걱정은 생계다. 촛불정국에도 별 다른 피해가 없는 아사히글라스는 이들이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유령시민의 초조함을 보지 않는다. 명절이면 “이제 그만 하지. 다른 데서 일하면 되는데 왜 집요하게 그러냐”는 말과 나쁜 남편, 아빠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더 커진다.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시민의식’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