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글쓰기 모임이 있는 날은 언제나 설렌다. 오늘은 구미로 남성 동지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서 더 그랬다. 평화광장에 모여 함께 출발했다. 차창 밖 풍경은 온통 메말라 있고, 굶주려 있는 듯했지만, 봄처럼 따뜻한 날씨와 여인네들의 웃음 섞인 이야기 덕분에 모든 것이 예쁘게만 느껴졌다. 러블리 토끼, 소희는 벌써 몇 번이나 다녀갔는지 거침없이 한달음에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천막 농성장을 보니 성주 평화광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은 편안했지만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인도 위에 지어진 두서너 채의 ‘천막 저택(천막집이지만 하도 잘 지어서)’ 옆에는 땔감으로 쓸 나무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걸 보니 평화나비광장의 강쇠들인 우리 ‘동남청년단’이 생각났다. 버선발로 마중을 나와 주신 차헌호, 오수일 회원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두 사람은 우리 다정 글쓰기회원이기도 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난로의 배를 불룩하게 불려놓았다. 난로는 후끈후끈 타고, 방바닥은 절절 끓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남정네들은 정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절절 끓는 방바닥만큼 우리 ‘다정’ 회원들의 이야기꽃도 활짝 피었다.
세계 4대 유리 제조업체가 있다. 연평균 매출 1조가 넘고, 50년 동안 토지 12만 평을 공짜로 쓴다. 그것도 모자라서 각종 세금 특혜까지 받는 기업 이름은 아사히글라스다.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종잇장처럼 얇은 유리는 하청노동자 손에서 만들어진다. 극심한 노동 강도를 견디며 죽으라고 일하다 아차,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징벌조끼’를 입고 일을 해야 한다. 입사한 지 9년 된 사람이나 신입사원이나 월급이 10원도 다르지 않다. 시간당 6,030원인 최저임금을 받고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없었다. 노예로 살기 싫어서 그들은 노조를 만들었다.
“19살 때 근무했던 현장보다 지금이 더 열악해요. 사회가 발전했다지만 노동자의 생활은 나빠졌어요. 생계 때문에 들어왔으니 일을 열심히 했어요. 그렇지만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지요. 징벌조끼를 입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회사를 그만둔 직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정규직 직원들은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회사에 다녔어요.”
차헌호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과 함께 노조를 만든 오수일 회원이 말했다.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한 며칠 뒤, 회사는 비정규직 직원 170명이 일하는 현장에 전기공사를 한다며 하루 동안 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내왔다. 해고 통보였다. 하루의 휴가를 끝내도 결국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 개인 물품은 아직도 회사 캐비닛 안에 그대로 있다. 고용창출이라는 명목으로 경상북도와 구미시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고 들어온 경북 최대 외국인투자기업, 아사히글라스. 그곳엔 아직도 컨베이어벨트가 돌고 있다. 생산을 위한 최적의 속도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톱니바퀴처럼 몸을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 노동시스템 안에서 다른 생각들은 불온한 것이다.
누구를 위한 고용창출일까. 일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우리는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며 그들이 목소리를 냈다. 농성천막을 쳤다. 그러자 경찰과 철거용역 700여 명이 천막을 쓸어버렸다. 중앙노동위원회가 회사의 노조파괴 개입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 해고 노동자들의 생계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아직 법과 권력은 자본가들 편인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회사는 폭력적으로 우리를 대해요. 특히 초반에 아주 세게 나가요. 노동자들이 싸움을 통해 생각이 성장하고,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걸 회사도 알거든요. 힘든 고비를 잘 넘겼고 지금도 잘 싸우고 있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해고노동자예요. 언제까지 생계 문제를 미루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회사가 우리를 고소하면 즉각 판결이 나요. 우린 집행유예나 벌금을 다 받았어요. 그런데 부동노동행위와 불법파견으로 우리가 회사를 고소하면 검찰이 1년 반이 지나도록 기소도 하지 않고 있지요. 그들은 우리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저는 싸움의 승패에 상관없이 싸웁니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예전에는 커피도 혼자 뽑아 마시다가 이젠 다른 사람 것도 뽑아 줘요. 나에서 우리로 생각이 바뀌는 거지요. 싸우는 과정 속에 배움이 있어요.”
차헌호 지회장이 귤을 우리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이들은 왜 1년 7개월째 하고 있을까. 오수일 씨도 단호하게 말했다.
“돈 문제만은 아니에요.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이만큼 생겼는데, 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심각한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 전에는 사회에 너무 무관심했어요.”
한낮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은 많은 양의 물을 쏟아부어도 좀처럼 식지 않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깔린 얇은 은박지가 뜨끈뜨끈한 열기를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뜨거운 바닥 열기를 온전히 몸으로 받아내며 외쳐야만 했던 우리는 어설픈 시위꾼들이었다. 좌욕하는 기분이라며 깔깔거리기까지 했다. 민중가수라는 사람들이 성주 평화나비광장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노래했다. 국악인들은 찾아와 창을 했고, 춤꾼들은 몸짓을 했다.
180여 일을 지나며 성주의 촛불들은 점점 ‘전문 시위꾼’ 자질을 갖추어갔다. 심금을 울리는 민중가수의 노래는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구성진 창은 5.18의 함성이었으며, 춤꾼들의 몸짓은 노동의 신성함을 외쳐대는 노동자의 절규였다. 어설픈 시위꾼들이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새누리 콘크리트 지지층이라 말했던 대구도, 누적합계 1,000만을 넘는 광화문 촛불도 이제는 아름다운 성주 촛불과 한 몸이 되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책임을 지는 연대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우리 ‘다정’ 글쓰기가 아사히글라스 천막농성장을 방문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성주와 아사히글라스의 싸움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싸우면서 터득했다.
차헌호 지회장과 처음 인사를 나눴던 날이 생각난다. 사드배치 반대 촛불문화제 준비로 바빴던 날이었다. 평화나비광장에서 문화제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그는 발언권을 얻어 처음 보는 성주군민 앞에 서서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며칠이 지나, 아사히 투쟁의 꽃이라는 ‘몸짓패’ 공연으로 촛불문화제 분위기를 한껏 띄워줬다.
그런 만남이 있은 뒤에 그들의 투쟁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리를 옮겨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젊은 혈기의 삼십대와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는 사십대 초반 가장이 대부분이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한 달 후에 170여 명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됐다.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500일을 지나고 있다. 이제 남은 인원은 22명이다. 문자해고 방식을 처음 만든 대한민국 최고의 대형로펌 ‘김앤장’과 법정다툼. 외투, 대기업 노동자 처우,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서비스 인력의 비정규직화, 아르바이트로 내몰리는 청년들, 천막 안에서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집에 돌아와 긴 생각에 잠겼다. 노동자, 노동자, 노동자. 노동자란 단어에 아버지가 떠오른다. 1994년 8월 4일 가장 무더웠던 오후 2시. 업무 중 전기감전으로 인한 즉사!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열악한 업무 환경과 고도의 육체노동, 긴 근무시간으로 늘 지쳐있었고 많이 힘들어하셨다. 산업재해 사망에 따른 보상금 청구와 절차는 또 얼마나 까다롭고 구질구질 하던지. 가족들도 많이 아팠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삶을 마감하신 아버지를 존경의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22년이 지났지만, 지금 노동자의 삶은 좀체 나아지질 않았다. 2015년 10월,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서 먼저 사업장 공동투쟁을 제안하고 현재 11개 사업장이 마음을 모아 상경투쟁과 생계비 마련 투쟁을 함께해나가고 있다. 한발 앞서 기획하고 서로 어깨를 내어주며 나아가는 아사히 동지들의 앞날에 승리의 꽃이 피기를 기원한다. 노동자로 생을 마친 아버지, 노동자로 살고 있는 나, 노동자로 살아가게 될 나의 자식들, 그리고 많은 이웃들. 힘겨운 터널을 지날 때, 작은 불빛도 하나 없이 캄캄한 거리를 혼자 걷는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그들에게 마음을 내고 연대의 손을 맞잡는다.
“1년 6개월 동안 농성장에서 생활하며,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조합원 생일날이 되면 생일축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6년 동안 공장을 다녀도 동료의 생일 한 번도 축하해준 적이 없었어요. 모두 해고되고 나서야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불렀던 것이지요. 해고로 인해서 동지가 생겼어요. 우리는 비로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지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천막 농성장을 차린 첫날 기억이 생생합니다. 함께 힘을 모아 천막농성장을 짓고,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습니다. 농성장에서 보낸 첫날밤을 잊을 수 없어요. 험난한 투쟁의 시작이었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순간이었지요. 연대를 생각했습니다. 연대의 반대말은 고립입니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연대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화답할 것이다. “진군의 날, 어디 즈음엔 노동자의 깃발이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리라!” 차헌호 지회장 눈에 물기가 고였다.
차헌호 지회장은 “박근혜 퇴진과 비상식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에 함께해야 해요. 그러나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해고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를 마련하는 일조차 어려워져서 투쟁 현장을 떠나고 있어요. 70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한 달에 투쟁기금 1,000원만 모아도 장기 농성 중인 해고 조합원들이 고립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했다.
구미공단은 비정규직노조가 거의 없다. 아사히글라스노조는 구미공단 제조업 가운데 최초의 비정규직 노조다. 구미공단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구미공단 조직화 사업을 힘쓴 결과, 구미 옵티칼 노동자 530명이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성과를 함께 만들어 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은 눈물 나게 잘 싸우고 있다. 이 땅에 노동착취가 없는 노동해방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힘내시라. 당신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꼭, 승리하리라 투쟁!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차헌호, 오수일 회원의 모습에서 대인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기는 굶더라도 조합원 동지들 월급날을 놓치지 않는 가난한 사장님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를 마중하는 얼굴이 착한 소년들 같았다. 우리는 사드철회 촛불을 밝혀야 한다. 오늘은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투쟁의 아픔도 함께 녹여 초를 피워야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여인네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연대의 힘을 보았고 느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봄날이 되면 우리의 싸움도 끝이 났으면 좋겠다.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가 여기에 다시 모여서 천막을 걷어내고 한바탕 잔치를 벌였으면 좋겠다. 꽃이 필 것이다. 성주로 돌아가는 길, 가슴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