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7월 1일부터 19일까지 제7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립니다.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성소수자가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장입니다. 2014년 제6회 대구퀴어문화축제부터 기독교단체를 중심으로 동성애 ‘혐오’ 입장에서 축제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 때문에 중구청의 장소 대여 거부, 최근 법원의 결정으로 다행히 퍼레이드를 열 수 있게 됐지만 대구지방경찰청이 행진 금지를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뉴스민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현실과 대구퀴어문화축제를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글을 연재합니다. 이 연속기고는 뉴스민과?더불어 평화뉴스에도?게재됩니다.?세 번째는?장지혁 대구참여연대 정책팀장의?글입니다.
이 글은 사랑에 관한 글이지만, 사랑에 관한 글은 아니다. 최근 퀴어문화축제와 관련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목격하며, 어쩌면 저들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무지 그들의 주장을 보며 논리적, 귀납적, 역사적, 주관적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 반(反)퀴어(?) 세력들이 주장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난 그들의 실제적인 사랑에 관심이 없다. 관음증이 있지 않고서야 타인의 섹스와 사랑에 왜 관심을 가진다는 말인가?
그들은 반대 이유로 역사적인 전통문화의 훼손, 국가적 노동력 재생산의 위기, 특정한 형태의 섹스에 대한 혐오, 일부 중동설화를 들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이 사랑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미안하지만, 일부 종교 세력이 주장하는 교리적 근거는 반박할 이유조차 못 느낀다. 일부 종교 세력은 중동지역 그중에서도 현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에서 기원한 신화 일부분을 맹신하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활동에 관심도 없고 이의도 없지만, 고작 종교적 몇 문장을 가지고 타인의 민주적 권리를 부정하고 있으며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박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고무, 찬양, 동조의 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일성 어머니의 이름이 강반석(베드로)가 아니었던가?
이들은 특정한 형태의 섹스를 문제 삼는 주장도 일삼고 있다. 잘 모르겠다. 예전에 킨제이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지만, 정확한 통계를 인용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특정한 섹스가 성 소수자들만의 것인가? 난 반독점주의자로서 만일 성 소수자들만이 그것을 독점한다면 반대한다. 그 사랑의 형태는 모든 시민, 모든 사랑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 성 소수자만의 것이 아니다. 예전 중세신학의 거두 토마스 아퀴나스 선생께서는 자신의 저서에서 특정 종교인들이 지켜야 할 체위의 형태를 지정한 바 있는데 현재의 종교인들이 그것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것을 물어보는 것은 민주시민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에 사양하는 바이다.
국가노동력의 재생산 위기는 저출산에 대한 우려에서 도출되는데, 미안하지만 국가 노동력의 위기를 산출하는 건 수많은 이성애자(?) 커플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이다. 높은 의료비와 육아비용, 반육아적인 노동조건과 경제활동의 현상들과 구조 때문이다.
전통적인 문화의 훼손은 정말 어이가 없는데, 그 반동적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는 바이다. 근대화 이전 사랑의 대상은 개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정치적 동맹, 경제적 결합, 사적경제의 생산성을 바탕으로 선택되었다. 물론 자신을 불사르는 열정적 사랑은 초역사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일상적 사랑은 여러 형태의 사회적 조건에 구속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랑관의 파괴는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여성을 사랑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지속적인 장기간의 애정결합을 위하는 낭만적 사랑이 근대적 사랑의 증거였다. 개인들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관계(친족집단, 토지를 중심으로 한 생산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생존하는 노동자계급의 등장처럼 말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기존의 사랑관이 붕괴하고 새로운 사랑관이 등장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시절이며 이른바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시대이다. 그런데 그 전통문화의 훼손은 현재의 사랑을 조선시대로 돌리자는 말이다. 미안하지만 현재의 한국과 조선은 연속적인 국가공동체이지만 그 사회적 원리가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 시대의 사랑은 앤서니 기든스나, 울리히 벡이 주장하듯 다양한 형태의 결합, 일종의 테트리스적 결합이다. 그 대상과 주체가 어떠하든 결합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 결합은 언제든지 다른 결합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 세계, 그럼으로써 이것이 자본주의적, 혹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랑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의 특정한 종교집단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장기간 결합하는 사랑이야말로 참사랑이며, 유일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마치 유학자의 선비가 국가 상소를 올리는 듯한 비장함으로 성 소수자를 규탄한다.
이처럼 이들은 역사적인 반동이다. 한국 사회가 힘들게 이룩해 놓은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부정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퀴어반대세력은 보수세력도 아니다. 근대화의 성과를 무시하는 자들이 어떻게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퀴어문화축제를 음해하는 이 세력이야말로 민주적인 공화국임을 선포한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퀴어문화축제를 지지한다고? 그건 잘못된 말이다. 퀴어문화축제는 지지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 대한민국을 지지한다. 이 말이 어색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을 아는 자들은 퀴어축제를 지지할 수 없다.
사랑과 퀴어는 동의어다. 사랑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들이 보면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퀴어문화축제는 사랑에 대한 축제이다. 비록 말도 안 되는 퀴어반대세력이 있긴 하지만 이들을 긍휼이 여기자. 사랑을 모르는 자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자. 우리의 사랑이 저 반동을 넘어 세상을 비출 것이다. 왜냐고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감정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