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트럼프 앞에서 공연할 수 없다’ 여성무용단 로케츠의 저항

트럼프 취임식 다음날 대규모 '여성행진' 예정
트럼프도 박근혜처럼 대중의 저항에 부딪혀 내려 올 수 있지 않을까

13:34

뉴욕의 크리스마스 풍경 하면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록펠러 센터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유명 백화점 쇼윈도의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 거리 곳곳에 빛나는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 장식들…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다.

▲로케츠의 ‘크리스마스 스펙타큘러’ 공연 중 한 장면. [사진=flick.com @Ralph Daily]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중 하나가 맨하튼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스펙타큘러(Christmas Spectacular)’ 공연이다. 1932년부터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열리는 이 유명한 쇼는 라디오시티 전속 무용단인 로케츠(Rockettes)의 대표적인 무대다. 11월 초부터 연말까지 약 두 달 동안 매일 열리는 이 쇼를 보려고 일부러 뉴욕을 찾는 관광객도 있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 손을 잡고 한 번쯤은 꼭 보러 간다. 마치 동화 속 세계를 그대로 무대로 옮겨 놓은 듯 환상적인 공연이다.

1925년 만들어진 로케츠는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무용공연단이다. 단원 수십 명이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듯 정교하고 절도 있는 안무로 유명하다.

이들이 올해 크리스마스에 또 다른 이유로 화제에 올랐다. 발단은 크리스마스 직전인 12월 22일 저녁, 로케츠 고용주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 컴퍼니(MSG)’ 제임스 돌란 회장의 발표에서 시작됐다. 그는 다음 달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축하공연에 로케츠가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셀린 디온, 엘튼 존, 안드레아 보첼리 등 유명 가수들이 공개적으로 불참을 선언하면서 취임식 축하공연 연예인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 상황에서 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로케츠 단원들은 즉각 MSG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공연발표를 한 바로 그 날 저녁, 로케츠 단원 중 하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가 대통령 취임식에서 공연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부끄럽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나와 같이 공연하는 여성들은 모두 지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사람을 위해 공연하라고 한 (사측의) 결정이 너무 끔찍하다.”

그녀는 돌란 회장 발표를 들은 단원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공연을 했다고 덧붙이면서, “우리는 강요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로케츠의 단원 Phoebe Pearl은 인스타그램에 일방적인 트럼프 취임식 공연 참가에 항의하는 글을 올렸고, 많은 지지자들이 SNS에 이와 관련 글을 올렸다. [사진=인스타그램 @and_um_well_i]

익명을 요구한 다른 단원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트럼프 취임식 때 공연한다면 트럼프가 지금까지 여성에 대해 말한 것에 우려하는 많은 여성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의 팬인 많은 어린 소녀들이 ‘나도 크면 언니들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 우리가 트럼프 취임식에서 공연한다면, 이는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것을 홍보하는 것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로케츠 단원들이 트럼프 취임식 공연을 보이콧 하겠다는 소식은 곧바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널리 퍼졌다. 많은 사람은 로케츠의 행동에 지지를 보냈다. 어떤 이들은 로케츠의 트럼프 취임식 공연 보이콧은 경기 시작 전 국가가 연주될 때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표시로 기립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어 화제가 된 유명한 미국 프로풋볼 선수 콜린 캐퍼닉에 견주며 지지를 표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보여준 여성차별, 혐오 발언과 행동을 볼 때 로케츠 단원들이 트럼프 앞에서 공연하기를 거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아무렇지 않게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 앞에서 공연한다는 건 한 단원의 표현처럼 너무나 ‘위험한 일’ 이기도 하다.

단원들은 바로 미국예술가노동조합(American Guild of Variety Artists)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조원의 이해를 도모하고 지지해야 할 노조는 로케츠 단원들의 우려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도리어 노조는 노조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사용자 편을 들었다. 전속 단원들은 정치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계약상 무조건 공연에 응해야 하며, 만약 이에 불응하면 해고되거나 고소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용주의 일방적인 공연 강요와 노조의 태도에 많은 사람들은 로케츠 단원들을 응원했다. 고용주와 노조에 항의 전화와 이메일을 보내고, 그들의 결정을 비판하는 주장이 소셜미디어에 넘쳤다. 어떤 사람은 로케츠에 대한 공연 강요가 여성의 의사에 반해,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트럼프 취임식에 딱 어울리는 일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MSG와 노조는 다음날 즉각 태도를 바꿨다. 그들은 취임식 공연에 자원하는 단원만 참여할 것이고, 원하지 않은 단원이 강제로 공연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을 바꾸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로케츠 단원들과 이들을 지지한 대중들은 갑에 맞서 승리하는 “크리스마스 스펙타큘러”를 이뤄냈다.

사실 취임식 축하공연을 거부하는 단원들이 아무런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미국 노동통계청 2015년 통계를 보면, 직업을 무용가라고 밝힌 사람 중 단 1.4%만이 전속 무용공연가로 취업하고 있다. 즉, 절대다수 무용가는 전문 무용인으로서 전속 직업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상황이다.

취임식 축하 공연을 거부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들과 달리 로케츠 단원들은 공연업계에서 상대적으로 약자들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취임식 공연을 거부한 로케츠 단원들은 이후 재계약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여성차별과 혐오에 맞서 공연을 거부한 이 여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고용주의 보복과 불이익에 맞서 이들이 다시 싸운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지지하고 힘을 보탤 것이다.

여성을 멸시하고 비하할 뿐 아니라 수없이 저지른 성폭력 행위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한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여성이, 트럼프가 공격한 이민자, 유색인종, 성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충격받고 실망했다. 하지만 이들은 절망하며 가만히 있지만 않는다.

트럼프 당선 후 곧바로 전국에서 벌어진 트럼프 반대 시위에 많은 여성이 참여했고, 여성이 주도한 성차별 반대 시위도 줄을 이었다. 대통령 취임식 전후로 수도 워싱턴에서는 다양한 트럼프 반대 시위가 조직되고 있다. 그중 취임식 다음 날인 1월 21일 예정된 ‘여성행진 (Women’s March)’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트럼프 취임식에 맞춰 예정된 여성행진. [사진=페이스북 womensmarchonwash 페이지]

지금까지 수십 년간 싸워 쟁취한 여성의 권리가 트럼프 정권에서 후퇴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항의 행진이다. 주최 측은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워싱턴에 집결해 행진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여성들의 동조시위가 미국 대부분 주(州)와 전 세계 20여 개 도시에서도 동시에 벌어질 예정이다.

총득표 수에서 300만 표 가까이 뒤지고도 노예제의 잔재인 비민주적인 선거제도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임기도 시작하기 전에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 당선인임을 여러 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는 집권 기간 내내 그가 모욕해 온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도 박근혜처럼 대중의 저항에 부딪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밝아오는 2017년 새해가 절망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트럼프. [사진=flcik.com @Gage Skid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