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사도법관 김홍섭의 후배법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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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도법관 김홍섭의 후배법관들에게 -/

채형복(시인.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법은 사랑이라고
법은 생명이라고
법은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라고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살다간 김홍섭
사람들은 사도법관으로 부르며 추앙한다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고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수마저 가슴에 품은 그는
죄수들의 맏형이자 어버이였다

수도원 종지기로 살고 싶다
그의 소원 병마로 이루지 못했지만
聖프란치스코를 본받아
평생 가난을 벗 삼아 살다간 그가 있어
이 땅의 법률가는 부끄럽지 않다

2.
2015년 7월 16일 제헌절을 하루 앞둔 날
검은 법복을 입고 높은 법대에 앉아
근엄한 표정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김홍섭의 후배법관들은 오늘도 유무죄를 판단한다
이 땅의 사법 정의는 그들 손에서 죽고 산다

대법원-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 깨고 파기환송
유무죄를 다시 판단하라!
서울중앙지법-세월호 추모집회 불법행위 주도 혐의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박래군을 구속한다!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 받는 가난한 이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지 못하고
상처 입은 세상의 아픔과 절규에 귀 기울지 않고
법을 체제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사도법관 김홍섭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마저도 연민의 마음으로 가슴 깊이 품을까

3.
간밤
고향 뒷산 공동묘지에는
검은 법복 입은 도깨비 모여
깨춤을 추었다
통제되지 않은 인(燐)불이 광란으로 날뛰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밤새 울었다
한쪽 눈을 가린 안대를 풀고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서러웠다
성황당에 걸린 그녀의 하얀 소복이
갈기갈기 찢어져 바람에 휘날렸다

2015년 7월 17일 제헌절 아침
나라 곳곳에서 열리는 경축 행사
굳은 표정으로 허수아비들 모여든다
음울한 장송곡 따라 울려 퍼지는 조사弔詞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죽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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