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는 길이다.
가까워 오는 망월동을 느끼며 가슴은 메타세콰이어 길의 소실점처럼 한없이 아득해져 가는 듯하다. 몸에서 시작된 에이는 느낌도 겨울이기 때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해마다 맞이하는 5월의 봄에도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른여섯 해라는 짧지 않은 세월에도 여전히 시린 가슴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 또한 80년 사태에서 새겨진 상처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5월의 폭동’이 ‘5.18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지만, 국가에 의해 죽어간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유공자가 됐지만, 그것의 정체는 ‘보훈’의 행위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상처이거나 채워질 수 있는 결핍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상처’나 ‘결핍’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평화나비광장에서 시작되는 광주
김천과 약속이 어긋났다. 덕분에 성주에서 출발하여 김천으로 향했다. 역방향으로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길이다. 그런 사연 끝에 성주와 김천 주민들은 버스 한 대에 실려 동행자가 됐다. 사실 백 수십일 전부터 성주와 김천은 이미 동행자였다.
서로가 사드배치철회투쟁으로 함께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이 초면인 사람들이다. 사드투쟁이 시작되기 전 성주나 김천 주민들에게 광주는 무척이나 먼 곳, 먼 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5.18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하고, 매일 촛불집회를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한다. 5.18광주역사기행은 오래전 평화나비광장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그렇게 성주는 이미 광주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별빛동맹’
성주 주민들이 심심치 않게 섬겨대는 말이다. 별 고을 성주와 빛 고을 광주, 참 예쁜 이름이다. 성주는 ‘평화의 성지’가 되어간다. 덩치야 광주에 비해 너무나 작지만 충분히 비견될 만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많은 분들이 초행이었다. 그래도 사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행차라 몇 번은 가본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을 가진 분들은 거의 없었다. 버스 안에서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나는 내가 해마다 이 길을 감을, 그 이유가 내가 5.18유족임도 밝혔다. 나이 탓인지 5월 27일 도청에서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감정으로 막혀버린 목을 뚫고 올라오기 힘들어했다. 핑 도는 눈물과 엉켜버린 숨결을 정리하고 겨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광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된 것은 아마도 말보다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공명하고 그것이 증폭되어 나가기를 원한다.
민주의 의미인 ‘광주’가 이미 평화나비광장에까지 다가와 있듯이 우리 또한 광주 시민들에게 ‘성주’라는 평화의 땅을 선사하러 가는 것이다. 사드배치 철회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성리 주민의 삶에 대한 호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광주 시민에게 드릴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광주의 들문 담양
가끔 5.18묘역에 들렸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들리는 담양이다. 이번에는 광주로 향하며 들어섰다. 예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담양시장에 들려 죽순도 사고는 했다. 사실 죽순(竹筍)은 대나무죽에 죽순 순이라는 의미가 겹친 중의어다. 담양에 오면 학창시절 소풍 길에 자취하던 촌놈들 따라 죽순서리를 하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교련 가방에 엇갈려 두 개를 넣으니 가득 찼다. 하지만 너무 센 놈을 잘라와 그것으로 음식을 해 먹는 일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筍의 旬은 열흘 순이다. 싹이 돋아 열흘이 넘기 전에 채취해야 음식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담양 땅이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 숲은 오랜 흉년 끝에 죽창에 찔린 지주의 피로 번져나갔고, 그것으로 흉년이 해소됐다는 살벌한 전설도 있지만, 담양 어디서나 흔한 대숲은 타지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의 신비함을 선사해 준다.
항상 식구들과 왔었다. 이번에는 다른 ‘식구’들과 함께 한다. 사드배치철회투쟁을 통해 백 수십 일 동안 함께하며 ‘식구’가 된 이들이다. 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서른여섯 해 동안 지속하여온 아린 가슴과 푸석한 몸속에 슬며시 들어선다. 서른여섯 해를 외톨이가 되어있던 통증들이 떠들어대는 이들의 소리에 섞이며 내려앉는다.
5.18재단에서 계획한 일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담양 메타세콰이어 길을 걸어보고 출중한 전라도 음식도 맛보기 위해서다. 메타세콰이어 길은 예전엔 차를 타고 가끔 지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입장료를 내고 걸을 수 있는 관광지가 됐다. 양쪽으로 뻗어 나간 나무들이 맞닿은 것처럼 느껴지는 끝을 보고 있지만, 우리가 걷고 있는 민주주의 길은 어쩌면 이렇듯 곧게 뻗어간 길이 아닐 것이다. 동행하는 친구들과 상의하며 한발 한발 걷는 길일 것이다. 항상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아나가는 길, 그것이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길인 것 같다.
개척되는 길, 그것은 서산(西山)의 말처럼 앞 선이의 발자국조차 없는 길일 것이다. ‘No Direction Home’ 밥 딜런에 대한 마틴 스콜세이지의 영화 제목처럼 오히려 당연한 듯 걷던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닐까?
여전한 아픔을 간직한 곳, 망월동
담양을 거쳐 ‘5.18국립묘지’에 도착하였다. 헌화와 분향, 묵념을 마쳤다. 묘지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아픔이 더한 것 같다. 아픔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며 5.18을 선형적 역사에서조차 제외하려는 현 정부의 행위로부터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국가의 탄압은 투쟁의지를 키워주기도 하고 또한 우리를 슬프게만 하지도 않는다.
오래된 듯하다. 5월 17일 유족 추모행사에만 참여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폭력의 당사자인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5월 18일의 기념식이 싫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에 의해 시작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5.18은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으로 자리 잡으며 ‘항쟁’이 아닌 ‘민주화 운동’이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국가에 저항했고, 무장한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되었음에도 5.18은 국가가 인정하는 민주화 운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한 통합을 통해 사태는 그렇게 진정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5.18은 이런 역사화를 종종 범람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치를 치안과 통치로 강요하는 자들에 의해, 국가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리 잡으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역사의 비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적 비극’의 의미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광주는 비극 이전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광주항쟁과 5.18묘지를 중심적 인물들과 아이의 죽음을 통해 영웅과 국가의 잔인함을 설명해주고려는 해설사분들의 이야기 속에서조차 배제된, 이름 없고 자격 없는 수많은 죽음들의 슬픔이 슬며시 자리 잡는다.
이런 슬픔은 80년 5월 22일 투쟁지도부의 자격을 물어오던 자격을 갖춘 자들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항쟁 이전의 자격과 관계가 다시금 해방의 장에 들어서게 된 순간 기나긴 슬픔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비극에 대한 애도를 넘어 ‘역사화’ 속에서 들리지 않는 죽은 이들과 산자의 소리를 들어야 함이 무덤 앞에 선 자들의 몫일 것이다.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하는 것,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항쟁에 대한 민주화 운동으로의 ‘기념’은 죽은 자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산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만든다. 그것은 ‘폭동’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폭동’의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순치되지 않는 힘, 여전한 활화산처럼 터져 오름은 역사 속에 기억되는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합의와 합치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지워진 야생의 그것, 삶의 본성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묘역에서 행해지는 화려한 ‘보훈’행사는 이런 민주주의의 힘들을 희석하는 역사들로 자리 잡는다.
광주민주광장에서 시작되는 성주
광주 촛불집회 맨 앞자리에 사드배치철회 내용이 담긴 현수막과 띠를 들고 들어섰다. 박근혜 탄핵은 가결되었지만, 여전히 황교안 과도정부에서도 사드배치는 진행형이다. 과도정부가 들어서게 된 것은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을 중단하라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올라선 무대에서 내려다본 대열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자 행진에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끝없는 촛불들이 무대를 향해 몰려왔다. 아름답고 도도하게 흐르는 촛불의 강이 펼쳐졌다.
연설이란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을 보낸 광주. 80년 5월, 형과 손을 잡고 다녔고 형이 떠나간 이곳 금남로에서 광주시민에게 말하고 싶었다. 함께 해 달라고, 성주에도 여러분의 형제들이 살고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성주와 김천에서 함께 온 주민들과 ‘사드배치철회’ 등이 쓰인 펼침막을 들고 무대 위에 올라섰다. 부모를 따라온 어린아이들도 함께 했다. 특별히 원고를 준비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해 둔 것도 있지만, 몸이 원하는 대로 맡겨 두기로 했다. 다행히도 말을 하는 나보다는 들어주는 시민들이 훨씬 뜨거웠다. 호응하는 촛불의 오르내림이 눈앞에 환하게 전개됐다.
성주와 김천에서 사드배치철회 투쟁을 151일째, 112일째 하는 주민들이라고 하는 인사에 촛불이 솟아오르며 뜨거운 함성이 퍼져나갔다. 이제는 ‘광주 금남로에서 성주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신명난 투쟁이 만나고 공명하면서 증폭되어 가는 중이었다.
80년 광주 현장에도 기쁨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형의 죽음으로 그것을 오랜 세월 동안 떠올릴 수 없었지만, 알 수 없었던 어떤 흥미에 이끌려 항쟁 기간 시내를 돌아다녔음이 언젠가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주에서 사드배치 철회 투쟁을 하는 동안 몸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었다.
광주를 슬픔과 아픔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을 통해 미래로 가고자 하는 특정한 역사관적 강박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80년 5월 광주에서 느꼈던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성주 한개마을에서 만난 오랜 지인 같았던 차명숙 씨 또한 그러했다고 한다. 그날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 나왔던 그분의 인터뷰 내용은 분명 그러했다.
“18일 오후쯤, 그때부터 구경을 다녔어요. 구경하니까 옆에서 빵도 주고 그래서 먹고 그리고 재미도 있었어요. 아무튼 나는 재미있었어요.”
차명숙 씨는 전옥주 씨와 함께 광주항쟁에서 차량으로 선전방송을 담당하던 분이다. 그것은 흔히 이야기하던 5.18이라는 비극적 서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투쟁은 비극이나 슬픔, 혹은 분노와 증오의 감정에 휩쓸린 사태가 아니라 본래 기쁨과 흥미, 매력적인 사태로의 휩쓸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150일을 넘어온 성주 촛불의 힘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공포나 불안, 분노와 증오 같은 ‘슬픔의 감응’으로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슬픔의 감응’은 만남을 통해 힘이 감소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을 통해 힘이 감소된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이들은 ‘기쁨의 감응’을 통해 신명남으로 삶과 투쟁의 힘이 증가한다.
성주촛불은 항상 “투쟁은 즐겁게, 신나게, 질기게, 건강하게”라고 외치며 투쟁의 긍정성을 상기시킨다. ‘신명’은 좌절과 포기를 지워버리고, 공포와 불안도 넘어서게 하는 투쟁 동력이다. 그 힘은 서로가 어우러지며 더욱 증폭되어 간다. 전국에 번진 박근혜 퇴진 촛불 또한 그러하다.
이제 금남로의 끝없는 신명의 촛불로부터 성주가 시작됨을 목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