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국정교과서, 대구 10월항쟁 왜곡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미군정에 대한 투쟁으로 단정
10월항쟁유족회, “가만히 있진 않을 것

11:56

28일 공개된 국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대구 10월 항쟁을 왜곡한 사실이 확인됐다. 교육부가 공개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248쪽에는 매우 짧은 서술로 10월 항쟁을 스치듯 다루고 있다.

신탁 통치 문제로 인한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조선 공산당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영남의 유혈 충돌 사건 등을 일으키며 미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을 전개했다.

교과서는 10월 항쟁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의 일환으로 일으킨 유혈 충돌 사건으로 단정했다. 이에 앞서 교과서는 신탁 통치를 둘러싼 좌·우 진영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교과서는 “조선공산당 등 좌익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했으나 새로운 임시 정부 수립을 포함한 모스크바 성명 전반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면서 “모스크바 공동 성명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1946년 3월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됐다”고 썼다. 신탁을 둘러싼 진영 갈등 심화 가운데, 신탁 통치에 ‘찬성한’ 조선공산당이 10월 항쟁을 일으켰다고 서술한 것이다.

2015년 열린 '한국전쟁 전후 10월항쟁 보도연맹 가창골희생자 합동위령제'
▲2015년 열린 ‘한국전쟁 전후 10월항쟁 보도연맹 가창골희생자 합동위령제’ [뉴스민 자료사진]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0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10.1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국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국정교과서가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것처럼 서술한 것과 전혀 다른 판단을 이미 국가기관이 한 것이다.

진실화해위가 2010년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이 사건(10월 항쟁)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 경찰에게 있다”며 “그러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에는 미군정이 남한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으므로 (중략) 미군정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밝혀 10월 항쟁에 대한 국가기관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대구시가 지난 7월 조례를 제정해 10월 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사업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10월 항쟁이 정치·이념의 산물이 아니라 그때를 살아가던 대중적 요구로 발생한 아픈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에 대한 오랜 연구로 지난 9월 <10월 항쟁>을 펴낸 김상숙 박사(전 진실화해위 조사관)는 “10월 항쟁에 참여한 인원, 계층을 봤을 때 단순히 조선공산당 한 세력만이 주도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며 “다양한 계층, 계급. 당시 시민과 농민들이 다 같이 참여한 사건이고, 요구 내용도 당시 민중의 피부에 와 닿았던 내용들, 식량문제, 토지개혁문제, 친일경찰 물러가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미군정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든가, 정치 상황에 대한 해석 없이 단순히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는 건 사건 자체를 오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당시 조선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두터운 지지를 받았지만, 조직이 탄탄하지 않았고 미군정의 탄압이 심했다. 해방 직후 민중의 건국 운동 열기는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10월 항쟁 유족 단체 반발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기가 막힌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 회장은 “대구시 조례안도 10월 항쟁으로 통과된 마당이고, 국가 배상도 완료된 상황에서 그렇게 서술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더구나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데 그렇게 교육하면 10월 항쟁도 북한과 관련된 걸로 오해될까 우려된다”고 꼬집었다.

채 회장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것처럼 표현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10월 항쟁은 민중항쟁이었다”며 “동학운동이나 3.1만세 운동에 버금가는 민중항쟁이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울분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