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년, 저년, 미친년, 이 여자, 저 여자, 정신 나간 여자…광장에 나온 이들은 온갖 ‘년’과 ‘여자’를 호출한다. 87년 이후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일으킨 주범에게 ‘여자라서’라는 그럴듯한(?) 이유가 붙고 있다.
지난 19일, 대구에서 열린 시국집회에 ‘혐오와 차별없는 평등 연대’가 적힌 피켓이 등장했다. 주최 측이 준비한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피켓 뒷면이다.
“여성으로서 사생활” 때문에 검찰 조사를 받지 못한다는 대통령 변호인 말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였고, 또 다른 여성혐오를 불렀다. 공인인 대통령도 당연히 사생활이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생활은 보장해주면 된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사생활은 ‘가려져야 할 것’ 또는 ‘드러내서는 안 될 것’으로 요청한 게 발언 요지다.
수많은 정치인 입에서 ‘저잣거리 아녀자’, ‘강남 아줌마’, ‘공주’, ‘아가씨’ 등 대통령과 최순실을 칭하는 온갖 여성이 나왔다. 국정농단 주범이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로 온갖 여성들이 그들을 비하하는 지시대명사로 쓰였다.
대구 중구 한일로 앞 100m에 달하는 ‘A4 데모판’이 길게 서 있다. A4용지에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 약 1천장이 붙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쌍욕은 차치하고라도, ‘그네년’, ‘병신년’, ‘미친년’ 등이 등장했다. 누군가는 A4 용지가 아닌 데모판 위에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말이 수십 개 쓰여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에도 여성혐오는 그대로 나타났다. ‘여자라서’ 그렇다는 아주 쉬운 논리적(?) 귀결이다. ‘공적 영역=남성, 사적 영역=여성’이라는 남성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가 논리의 근거다. 사적인 곳에 머물러야 할 여성이 남성의 영역(이라고 여겼던)에 들어와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
사적인 관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 등 공적 영역에서 능력은 성별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사오입 개헌을 하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도, 쿠데타를 일으킨 이도, 4대강에 삽질한 이도 남자라고 욕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욕을 먹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욕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고, 그건 이 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나씩 반박해야 하는 현실이 당황스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주말, 대구 시국집회 사회를 맡은 남은주 대구여성회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성형을 했는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궁금한 건 대통령으로서 그분이 무엇을 하셨고,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사생활요? 당연히 보장되어야죠. 우리는 그 여자, 그 년, 병신, 이런 혐오에 기대지 않아도 박근혜 퇴진을 이야기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죠. 혐오와 차별이 없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합니다”
A4 데모판 위, 외롭게 붙은 문구가 있었다. “여성은 죄가 없다.” 이년, 저년, 미친년이라 부른다고 대통령은 내려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