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아사히글라스((주)아사히초자화인테크노한국). 2010년 기준 연매출 1조 4,500억 원, 세계4대 유리기판 제조업체, 경상북도와 구미시로부터 공장부지 34만㎡ 10년 단위 50년간 무상임대, 5년간 국가세금 전액면제, 15년간 지방세 감면 혜택을 받는 외국투자 기업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일본기업 1,493곳 중 국내에 현존하는 299개 전범기업 중 하나인 기업이기도 하다. 아사히글라스의 천문학적인 매출은 직영노동자 200여 명, 사내하청노동자 300여 명이 만든다. 비정규직이 그러하듯이 생산라인 대부분은 사내하청노동자가 담당하지만, 임금은 늘 최저임금 수준이다. 임금인상은 매년 법정최저임금이 오를 때 그 인상분만큼만 인상될 뿐이다. 회사 매출에 비한다면 이건 착취다.
지난 2015년 5월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노동자 140명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첫 임금교섭을 요구했었다. 그날 저녁 기뻐하고 감격해 하던 얼굴들이 생각난다. 지금껏 느닷없이 사직서를 쓰라고 해도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회사를 떠났던, 그런 동료들을 보고 똑같이 힘없는 노동자로 일해 왔던 이들에겐 역사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밝던 얼굴빛은 며칠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사히글라스는 전기공사를 한다며 이들을 사업장에서 퇴거시켰고, 곧바로 용역직원 100여 명을 배치했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도급계약은 중도해지됐고, 하청업체는 폐업해버렸다. 이들은 전기공사를 한다던 그날 이후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하루아침에 140명이 해고됐고, 용역직원들에 의해 사업장 출입이 가로막히던 그 날 이후 시작된 길바닥 농성이 500일이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 단결권. 그 권리 한 번 사용한 것치고는 너무 참담하고 가혹한 결과다.
지난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의 도급계약 일방해지에 대해 부당노동행위라 판정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의 재취업과 생계대책을 마련하라는 이례적인 구제명령까지 내렸지만, 아사히글라스는 아직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달리 강제할 방법도 없다. 우리 법은 구제명령의 강제이행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아사히글라스의 부당노동행위와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고소했지만, 노동부는 1년이 지나도록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고소 사건 처리기한은 두 달이 원칙이다. 두 번의 국정감사에서 수차 지적된 사항이지만, 여전히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사히글라스가 고용한 용역직원은 늘 노조 간부들을 미행하고 노조 활동을 감시하고 조합원의 동태를 어디론가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있었고, 아사히글라스 노사협의회 의장은 조합원을 개별적으로 만나 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녹취록에서 이런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그들은 처벌되지 않고 있다.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러하지 못했다. 오히려 법은 다른 곳에서 다른 관점으로 매우 신속하고도 엄격하게 집행되고 있었다.
경상북도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내쫓겨 길바닥 농성을 하던 그 상황에서도 아사히글라스에 10년 단위 공장부지 무상임대계약을 갱신해줬다. 관련법령과 조례는 지원 혜택에 대해서는 명시되어 있지만 갱신을 거부할 만한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한다.
구미경찰서는 노조의 집회신고를 교통방해를 이유로 금지했다. 집회 참가인원을 23명으로 신고했는데 교통방해라니. 경찰은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도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구미시는 공무원·경찰·철거용역 700여 명을 동원해서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노조 농성장 천막을 강제철거했고, 이를 막던 조합원들을 공무집행방해혐의로 현장에서 연행했다. 시민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민원이 제기되었다는데, 그곳은 구미4국가산업단지 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평소 시민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이다.
농성장은 다시 설치되었지만, 이번에는 아사히글라스가 사적 공간에 불법시설물이 설치되었다면서 천막농성장 철거를 요구했다. 철거하지 않으면 1일당 500,000원의 간접강제금이 발생한다는 법원 집행문을 갖고서. 노조 농성장 천막 끈이 공장 담벼락 끝부분에 걸쳐져 있다는데, 아사히글라스는 언덕 위에 위치한 공장이어서 공장 담벼락은 언덕 위 공장 내외부를 구분하는 울타리와도 한참 떨어져 있는 언덕 아래에 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가처분신청을 하는 회사, 그걸 또 받아준 법원.
법이 그렇게 집행되는 동안 조합원은 23명으로 줄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숫자는 더 줄어들 것이다. 지금껏 농성장을 지켜 온 조합원이라면 갈수록 투쟁의 의지가 약해져서가 아니라 생계의 어려움이 한계치에 이르러서 일 것이다.
생각건대, 아사히글라스가 노조를 혐오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조합원들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나설 수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합의금을 빌미로 노조 해산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노동부와 검찰은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곤란한 처지일 것이다. 심증적으로는 아사히글라스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싶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칫 법적 판단 결과가 어느 한쪽에 힘을 몰아주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노사가 어떤 형태로든 합의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을지 모른다. 경상북도나 구미시는 불똥이 튀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애초 지자체는 노사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며 주무부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사히글라스 노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위는 현재 없는 듯하다. 어쩌면 모두 한쪽이 손을 드는 상황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금속노조가 지원하던 기금은 지난 9월에 끝이 났다. 다행히 여러 연대단위에서 후원을 하고 있고, 지난달 부터 시작한 CMS 후원계좌에도 수백 명이 호응해주고 있지만 아마도 역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노조 재정은 바닥날 것이다. 누군가는 생계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농성장을 떠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 노조를 떠날 것이다. 긴 투쟁이 힘든 이유는 수만 가지겠지만, 그중 가장 힘든 건 생계가 끝이 날 때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이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아직도 노조결성 당일의 감격을 잊을 수 없노라 말하고 있고, 전국을 돌며 어느 노조보다 더 연대투쟁에 앞장서고 있고, 연대투쟁을 다녀와서는 오히려 몰랐던 세상사를 배웠노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비록 자신이 먼저 농성장을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이 투쟁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음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말들과 행동과 눈빛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결의가 되고 있음은 분명한데 난 그 모습이 안타깝고 또 슬프다.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본다. 아사히글라스가 손을 들 만한 상황을 노조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노조가 손을 들 상황을 아사히글라스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건 누군가가 애써 만들지 않아도 이대로 간다면 곧 다가올 일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생계문제로. 문제는 노조가 손을 들 상황에서도 손을 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아사히비정규직지회는 지금껏 그러했듯이 조합원이 하나둘 농성장을 떠나가는 날이 올지라도 또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 농성장을 지킬 것이다.
나는 노조가 백기를 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노조가 생계문제 때문에 서서히 고사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들의 가정도 이미 고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오고야 만다면 아마도 난 노조를 설득할 것만 같다. 지금까지도 할 만큼 했다. 아직 노조가 힘이 남아있을 때 합의를 하시라. 그게 남은 조합원들을 위하는 길이다. 어쩌면 그게 성과이고 승리일 수 있다고. 지금껏 개별 조합원들에게 남몰래 다가가 노조탈퇴를 회유했던 그 사람들처럼.
지금껏 난 후회할 일들을 많이 했다. 노조에게 투쟁을 접으라고 설득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도 난 또 후회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더 많은 이들이 노조를 위하는 모습으로, 조합원을 위하는 모습으로 나처럼 다가갈 것이다. 단지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그 상황이 오지 않게끔 노조가 더 잘 버티기를 바랄 뿐이다.
“저 너머를 보라, Look Beyond” 아사히글라스 사명이다. 우리는 어디를 보아야 하나. 아사히글라스에게 저 너머 말고 발아래 우리부터 봐달라는 외침은 공허한 외침이다. 법이 곁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들이 발아래 여기 우리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알지 못한다. 단지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이명박근혜의 시대도 끝이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