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맑스주의 철학자?에티엔 발리바르가 프랑스의 진보 일간지 <리베라시옹(Lib?ration)>에 쓴 최근 그리스 정세를 바라보는 프랑스인에 관한 글이다. 철학자 최원 씨가 번역한 글을 역자 동의 하에 싣는다.
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거기에 달리기라도 한 듯이 그리스 위기의 이어지는 일화들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쫓아가고 있는가? 왜냐하면, 자신들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그 문제에 관해]자신의 개인적, 직업적, 지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이유는 정치적 이유다. 정치의 현행성, “통치(gouvernance)”에 대한 정치의 저항, 자유인들의 사회 안에서 그것이 차지해 마땅한 자리를 다시 정복할 수 있는 정치의 능력 말이다.
여기 내가 공유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는, 다섯 개의 가설이 있다[사실 발리바르는 여섯 개의 가설을 제시한다. 세 번째 가설이 두 번 제시된다. – 역자].
첫 번째 가설은 프랑스 시민들(그리고 다른 나라 시민들)은 위임받은 바를 실행하기로 결심한 [시리자] 정부와 그 지도자들의 지적이고 완강하고 용감한 전투를 열정적으로 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유럽을 지배하는 “제도들”과 “대연합”의 목표가 그리스를 참사(“원조계획”은 이 참사를 연장하고 있다)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가 “부패된” 구조들을 개혁하도록 돕는 것도 아니라는 것, 결국 그리스를 치욕적인 포기로 몰아넣어 그러한 사례가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을 점점 깨달아 왔다. 국민투표를 계기로, 그들[프랑스 시민들 및 다른 나라 시민들]은 브뤼셀과 유로그룹 등에 의해 뿌려지고 주로 우리의 언론에 의해 중계되는 정보가 편견이라는 것을 또한 이해했다. 대안들이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프랑스 시민들 및 다른 나라 시민들]이, 각국과 유럽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권력들의 정당성이 의존해 있는 민주주의의 재가동이라는 문제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사례를 주었고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물론 그리스인들만으로는 해결책을 가져올 수 없는 문제 제기였다. 수 주 동안 “어느 한 국민의 인민적 의지는 조약들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주장이 울려 퍼졌고, 그 주장은 “어느 한 나라 국민의 의지는 다른 18개국 국민의 의지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주장이 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18개국 국민은, 치프라스와 그의 정부가 작동시킨 적극적인 형태 안에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유럽에서 민주적 요구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가설은 그리스인들이 유럽건설의 [현재의]지배적 방향에 반대하는 좌파의 진정한 형태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민주의”의 (또는 유럽 건설에 대한 원칙적으로 동일한 선동과 심지어 적대 안에서 [“인민주의”와] 섞여 있는 “극단주의”의) 스테레오 타입을 풍비박산내고 있다. 치프라스는 유럽에 찬성하고 금융정책에 반대한다. 프랑스엔 그것이 없고, 프랑스에선 논쟁이 오히려 국민전선 쪽으로 이동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흥미를 주고 있으며 우리를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세 번째 이유가 나온다. 오늘날 좌파의 어떤 정치가 [요구되는가]? 21세기에 그 이름에 걸맞은 좌파의 어떤 담론, 어떤 투쟁적 실천, 어떤 목표가 [요구되는가]? 프랑스에서 우리는 모든 약속을 망각한 채 지배적인 자유주의와 연대하고 있는 좌파와 분열되고, 종종 말이 많거나 주저하는 “좌파의 좌파” 사이에서 우울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시리자나 [스페인의 반긴축 정당인]포데모스를 보면서 우리는 영감을 구한다. 그러나 경쟁적으로 비교하면서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이 번역 가능한 모델이란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이유: 트로이카 [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 국제통화기금 IMF]의 살인적인 강요에 대한 시리자의 저항, 시리자가 현재 수행해야만 할 투쟁(왜냐하면, 국민투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고, 단지 카드 몇 장을 옮겼으며 내기 판돈을 올렸을 뿐이므로)은 경제가 선택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경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이다. 경제학자 대다수는 부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고 긴축을 그만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거대한 질문은 유럽 대륙 사회들의 협조적 발전과 연대다. 시리자는 이 질문을 힘 있게 제기했다. 퇴보와 불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프랑스에서 이 질문은 힘차게 메아리치고 있다.
마지막이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유: 치프라스는 자신의 정부와 인민과 함께, 그들의 목표는 유럽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기초 위에서의 유럽의 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반대로 우리의 현재 “지도자들”의 교조주의와 고집이야말로 유럽의 종말을 향해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몇몇이 위기의 시작부터 말해온 “구성적 계기”가 정말 거기에, 우리 앞에, 있다. 그 [구성적]계기는 유럽 대륙 전체에서 여론이 충분히 그리고 아주 빨리 변하지 않는 한 물질화될 기회가 없다. 그렉시트(한 나라 국민의 유럽 공동체로부터의 축출)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유럽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떤 수단에 의해서인가? [오히(oxi=반대)에 투표한] 거대 다수의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유럽의 건설에 찬성하지만, 완전히 다른 유럽의 건설을 원한다. 우리는 이것이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임을 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에게 이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글: 발리바르
번역: 최원
원?출처: http://www.liberation.fr/debats/2015/07/07/les-raisons-de-la-passion-francaise-pour-la-grece_1345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