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수많은 ‘사실들’을 누가, 언제,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과거에는 권력을 가진 자들만 역사를 기록했다면, 오늘날에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기록하기 위해 투쟁을 벌인다.
‘10월항쟁’도 그중 하나다. 가진 자들에 의해 ’10월폭동’으로만 치부됐던 사건. 1946년 10월 1일 대구부청 앞에서 시위 중이던 민간인 2명이 경찰 발포로 사망하면서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 실패로 흉흉해진 민심에 불이 붙은 이 사건을 우리는 이제 ’10월항쟁’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10월항쟁에 앞서 살인적인 노동 조건과 미군정에 저항하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노동자들의 9월 총파업이 있었다는 점은 간과하기 쉽다.
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부산에서 먼저 시작했다. 이후 대구는 물론 전국 여러 직종으로 파업이 확산된다. 대구는 당시 노동운동 세력이 강했고, 파업이 무력진압 되지도 않았다. 지속되던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10월항쟁으로 이어진다. 민주노총 대구본부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서 이어진 파업은 전체 산별 노조가 참여한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투쟁이었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노동자와 민중이 연대파업과 투쟁을 전개한 곳이다.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오는 2016년 10월 1일 오후 2시, 10월항쟁 70주기를 맞아 전국노동자대회를 대구역 일대에서 열기로 했다. 대구역은 10월항쟁 당시 경찰 발포에 분노한 민중이 시위를 벌이던 곳이다. 노동자대회는 지역에서 열리는 정기적인 집회로 제주4·3항쟁, 5·18민중항쟁에 이은 세 번째다.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당시 9월 총파업에서 제기된 노동자의 요구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 주요 요구는 ▲최저임금제 실시 ▲8시간 노동제 실시 ▲유급휴가제 실시 ▲완전고용제 실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 보장 ▲완전한 자주독립 실현 등 10여 가지였다.
민주노총도 오는 전노대에서 ▲민중생존권 쟁취 ▲민주노조 사수 ▲사드배치 막아내고 평화통일 실현 ▲비정규직 철폐 ▲경북대병원 주차현장 비정규직 원직복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 10여개 주요 요구를 제기하며 투쟁할 계획이다.
민주노총 대구본부는 “1946년 새로운 사회건설과 노동탄압분쇄, 민중생존권 쟁취를 걸고 일으킨 전평의 9월 총파업이 10월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해방이 되면 세상이 바뀌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미군정의 폭정에 묵살되며 분노가 커졌고 총파업과 항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택흥 민주노총 대구본부장은 “대구 노동운동이 침체된 상황에서 10월항쟁 당시 노동자가 선도적 투쟁을 하고 여기에 민중이 붙어서 폭발적 인민 항쟁이 발생한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민주노총은 그때와 같은 선도적 투쟁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10월항쟁 70주기 전국노동자대회를 준비하는 권택흥 본부장을 만났다.
대구에서 10월항쟁에 맞춰 노동자대회를 여는 이유는?
민주노총은 최근 민중총궐기 등으로 노동자만의 문제를 넘어 민중 전반의 문제를 제기하며 싸워왔다. 돌아보면 70년 전 대구 10월항쟁에도 같은 과정이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전권을 이양받으려는 과정에 1945년 9월 미군이 들어와서 미군정이 시작됐다. 미군정은 들어오자마자 노조를 탄압하고 쌀을 공출했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미군정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결국 민중 생존권 문제로 8시간 노동시간 보장, 노동탄압 중단, 쌀 배급 문제를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요구를 보면 우리가 작년에 총파업할 때 내걸었던 요구와 같다. 당시 대구에서도 파업이 있었고 시민들도 함께했다. 집회마다 노동자만 4천여 명, 1~2만여 명의 군중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 상황에서 10월 1일 경찰의 발포에 노동자 2명이 죽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노동자 총파업에서 인민항쟁으로 바뀌었다. 우리 고민은 70년 전 대구에서 민주노총이 선언했던 총파업의 양상이 대구에서 70년 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대구’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여는 특수한 이유나 효과도 있지 않을까
전국 광역시도에서 대구가 가지는 근로조건이나 지역적 경향성을 따져서 보수꼴통 동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진보적인 도시였다. 그것이 대구지역 선배 노동자의 역사와 전통이다. 이번 전노대를 통해 이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문제도 고민하고 있다. 대구의 10월항쟁을 시작으로 여순항쟁, 제주4.3항쟁으로 이어진다.
해방정국에서 만들어졌던 민중항쟁의 효시가 바로 시월항쟁이다. 그리고 그걸 발발하게 했던 것은 노동자의 구월 총파업이다. 이것은 대구만의 문제가 아닌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대구지역 노동운동은 지금 침체돼 있다. 변혁성도 떨어진다. 나쁘게 얘기하면 노사협조주의나 단위사업장 이기주의에 빠져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배들이 가졌던,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계기로 전국 노동자대회를 대구에서 열기로 했다. 70주년 10월항쟁을 맞아 역사를 복원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구에는 앞서 열리는 10월항쟁 추모제도 있다. 이 추모제와 노동자대회는 어떤 관계인가?
올해도 10월항쟁 추모제를 위한 10월항쟁 행사 준비위원회 틀이 만들어졌다. 10월 1일 즈음해서 추모문화제가 열릴 것이고 여기에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사회가 함께 참여한다. 전노대는 이 계획에 포함된 프로그램이다. 전노대에서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한다. 아이러니한 것이 10월항쟁이 46년에 일어났는데 그때 구금됐던 사람들이 5년형 정도를 받았다. 그래서 형을 살고 나오면 한국전쟁이 터지게 된다.
당시 보도연맹사건이 있었다. 형무소에 갇혀있던 정치범들도 그때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학살됐다. 이런 식으로 시월항쟁 참여자가 학살을 당했다. 이러한 역사적 진상규명과 국가 배상문제가 과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시월항쟁에서의 노동자의 역할이다. 당시 노동자는 전평을 만들고 농민은 농민조합을 만들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했는데 미국이 막았다. 미군정의 분단정책에 맞서 사회변혁 투쟁을 했다. 우발적으로 미군정 폭정에 저항하거나 쌀배급 정책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동자의 전면적 총파업 투쟁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선도적 투쟁에 인민들이 붙었다. 우리도 작년에 총파업하고 국민들에게도 함께하자고 했다. 우리는 10월항쟁에서 노동자들이 선도적 투쟁을 하고 여기에 시민들이 붙어서 폭발적인 인민항쟁이 발생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현 시기에도 민주노총이 노동자 민중의 아픔을 앞장서서 싸워나가고 있고 선도적 투쟁하려고 한다. 지금은 구체적으로 노동개악 전면 중단, 경대병원 집단해고 중단을 외칠 수 있다.
대구시와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관과의 관계도 문제다. 집회하는 문제부터 관에 요구해야 할 것들도 있다. 대구시에 10가지 정도 요구가 있다. 노동기본권 보장에 나서고 경대 주차노동자 해고 해결에 나서는 것 등이다.
마지막으로 더할 말은?
민주노총은 대중운동을 해야 한다. 이번 전노대를 대구시민들이 봤을 때 노동자가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다. 전노대 하나로 얼마나 큰 파문이 생길지는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과 시도다. 많은 노동자 시민이 지역 역대 규모의 노동자 대회에 관심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됐다. 독점자본이 성장했고 일부 재벌이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다. 당시와 지금이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노동자의 삶을 보면 별로 달라진 것도 없다. 당시 선배 노동자는 어떻게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는지. 조직된 노동자가 어떻게 앞장서서 싸웠는지. 이것을 복원 계승해야 한다. 역사가 역사로 기록되는 걸 넘어서 여기서 미래의 전망을 찾아야 한다. 대구 전노대의 지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