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주년 광복절 오후 3시 20분께, 성주 경산리 성밖숲에는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옅은 초록색, 그보다 짙은 초록색, 그리고 푸른색 모자를 쓴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었고, 일부는 번호가 적힌 명찰을 달고 그늘을 찾아들었다.
명찰을 단 이들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사드배치 철회 성주군민 8.15 삭발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애초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는 군민 815명의 삭발식을 추진했지만, 삭발 참여 신청자는 900여명을 훌쩍 넘겼다. 대규모 삭발 한국 기네스 기록을 위해 성주에 온 한국기록원 계산에 따르면 공식 삭발자는 908명이다. 이 중 11명은 여성이다.
류지원 성주청년유도회 회장은 1번 명찰을 목에 걸었다. 그를 포함해 청년유도회 회원 5명이 1번부터 5번까지 번호를 목에 걸고 있었다. 류 회장은 “제일 먼저 신청한 건 아니고, 유림에서 참여한다고 해서 투쟁위에서 앞번호를 양보해줬다”고 말했다.
류 회장은 “성주에 사드가 들어온다는 발표를 듣고 유림에서는 대한민국에 들어오는 걸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반대해왔다”며 “심산 김창숙 선생 숭모제를 모시는 유도회는 심산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서 유림으로서 반드시 사드 배치를 막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또 류 회장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했다. 선비에게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8번 명찰을 목에 건 박신자(54) 씨는 “사드배치가 발표되던 첫날 함께 힘들어했던 엄마들을 대신해 깎았다. 모두들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라며 “머리 깎는 거로 사드배치를 막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깎을 수 있다”고 전했다.
박 씨는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셨다. 사드배치가 통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해보시라”며 “우리는 평화통일을 원한다. 내 땅에서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다. 우리의 뜻을, 의지를 무시하고, 외면하지 마십시오”라고 강조했다.
성주읍민 김근태(42) 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드는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며 “42년 토박이로서 나도, 우리 아이들도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고 삭발 참여 이유를 설명했다.
박 씨도, 김 씨도 사드는 남북의 평화를 저버리는 일이고,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같은 날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사드가 아니면 대안이 없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 나서 “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 할 것”이라며 “사드배치 역시 북한의 무모한 도발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조치”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국민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이런 문제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만약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있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사드유일대안론’을 피력했다.
“날벼락처럼 사드배치 발표⋯일상 잃었다”
“성산을 평화 상징으로 우뚝 세울 것”
오후 4시께 삭발식은 성밖숲 광장 한 쪽에 준비된 공간에서 진행됐다. 그 주변으론 삭발 참여자의 가족, 지인들이 둘러싸고 응원과 박수를 보냈다. 같은 시각 삭발 현장 옆에서는 ‘사드철회 평화촉구 결의대회’가 진행됐다.
성주투쟁위는 공식적으로 결의대회 참석자 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준비한 모자 1만 개가 거의 다 배부됐다며 1만 명 넘는 인원이 결의대회와 삭발식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했다.
결의대회에서 박효정 투쟁위 사무처장은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일상을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박 사무처장은 “날벼락처럼 성주사드배치 발표가 나고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성주군민들은 일상을 잃어버렸다”며 “일 년 내내 농사짓고, 마을 주민들끼리 나들이 한 번 가는 즐거움조차 잃어버렸고, 방학 맞은 아이들 데리고 계곡, 물가로 놀러 갈 기회도 놓쳤다”고 말했다.
박 처장은 “박근혜 대통령님, 지금의 이 뼈아픈 모습을 눈으로만 보지 마시고, 가슴으로 봐주시길 바란다”며 “사드에서 우리를 놓아주시길 다시 한 번 간절히, 간곡히 호소한다”고 울먹였다.
한편 삭발식은 약 50분이 지난 후 공식 종료됐다. 삭발에 참여했던 여노연, 주영미 씨는 삭발 후 결의문을 통해 “성주군민들은 또다시 외세의 도전에 직면했다”며 “가공할 위력으로 덮쳐오는 외세 앞에서 우리 선조들은 무릎을 꿇거나 물러서지 않고 고향을 지켜냈다”고 강변했다.
끝으로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산과 성주를 지킬 것”이라며 “사드를 반드시 막아내고 성산을 평화의 상징으로 우뚝 세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