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파면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에 맞서 시민들이 광장을 지키면서 되뇌던 말이다. ‘달라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최고 권력자 자리를 윤석열에서 다른 누군가로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닐거다. 그날 밤 이후 매일 같이 열리던 광장에서 이야기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각 분야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변화의 시작, 그것이 ‘달라야 한다’는 의미였을 거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대구와 경북도 마찬가지다. 12월 4일 오후부터 대구 도심에서 윤석열 탄핵과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시국대회가 열렸다. 이날 하루에만 1,200여 명이 모였다. 시국대회는 그 길로 7일(토요일)까지 나흘 연속 열렸다. 국회에서 1차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던 7일엔 2만 5,000여 명이 거리에 나왔다. 8일 하루를 쉬고 9일부터 다시 매일 시국대회는 이어졌고, 2차 탄핵소추안 표결이 있던 14일엔 4만 5,000여 명이 거리를 메웠다.
뉴스민은 이곳에서 만나는 시민들의 이야길 기록했다. ‘민주주의자들’이라는 연재 기획을 통해 광장에서 만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기록했고, 첫 시국대회부터 4월 4일 파면의 날까지 광장을 생중계했다. 기록을 통해 드러난 대구·경북의 광장은 단순히 윤석열 퇴진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각 영역의 의제가 분출됐다. 광장은 어느 때보다 다양한 대구·경북 시도민의 목소리가 모이는 현장이 됐다.
이곳에선 가장 손쉽게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연대를 호소했고, 불탄 공장 옥상에서 1년 넘게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에게, 드디어 남태령을 넘어선 농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광장에서 분출된 이 다양한 목소리가 윤석열이 파면된 후 세상을, 대구와 경북을 바꾸는 밑거름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윤석열 파면이 결정되기가 무섭게 대구와 경북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것처럼 과거 회귀를 요구받고 있다. 대구·경북은 이미 정치·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특정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고, 국면마다 그 이미지로 소환돼 반복 소비된다. 줄곧 보수 정당만 지지하는 보수의 섬이라는 이미지이고, 그 보수 정당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가 그대로 지역에 투영돼 고루하고 답답하며, 폐쇄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이미지가 도시 안팎을 휘감는다.
마치 과거에 우리가 북한 주민을 뿔 달린 괴물로 묘사한 것처럼, 안팎에서 대구·경북 주민은 뿔 달린 괴물처럼 그려지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 이미지가 대구·경북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며 감히 출사표를 던진 국민의힘 후보들은 당연하다는 듯 하루가 멀다하고 대구·경북을 찾아온다. 그들은 “새로운 박정희”가 되겠다고 하고, “이념이 먹고 사는 문제”라며 철 지난 노래를 반복하거나, 대구·경북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에 커서 그것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구·경북에도 다른 목소리가 다양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박정희에게 사법 살인 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대구·경북을 무대로 활동했고, 올해로 그들이 하늘로 돌아간지 50주기가 되었다. 4월 한 달 동안 대구·경북 곳곳에서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기억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전태일 열사의 고향으로, 그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회고한 대구 남산동 시절의 옛집은 시민들이 직접 모금으로 매입해 기념관으로 탈바꿈했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올해 17회차 맞는 대구퀴어축제는 서울 다음으로 오래 열렸다.
사회적 다양성을 담보하기 위한 아래에서부터의 운동이 이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되는 곳이 많진 않을 거다. 그럼에도 대구·경북은 단지 연례적으로 열리는 선거 결과만을 두고 한 가지 이미지로 소비된다. 아마도, 6월 3일 이후에도 큰 변화는 없을 거다. ‘내란’의 와중에도 ‘내란 잔당’을 다수가 선택했다는 이유로 분리 독립을 시켜야 한다느니, 대구·경북에만 계엄령을 내려 통치하자는 혐오와 폭력이 난무할 것이다.
당선이 유력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3년전이나 다를 것 없는 지역 공약을 재탕했다는 보도를 두고도 벌써부터 ‘어차피 안될 곳, 무슨 공약이 필요하냐’는 힐난이 되돌아온다. 지난 4개월여 광장에서 노래하던 ‘다시 만난 세계’가 결국 이거였느냐는 반발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윤석열 파면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고작 대통령 한 명 갈아치우려 이 고생을 한 게 아니’라는 동료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갈 우리들의 ‘다시 만날 세계’가 있기에,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맨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