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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이 조심스레 철제이동장을 들어 옮겼다. 사육사 너댓명이 철제이동장 상단 작은 고리에 묶여 있는 밧줄을 줄다리기 하듯 당기자, 문이 열렸다. 긴장감 속에 정적이 흐르다 불쑥 까만털과 코가 문 밖으로 툭 드러났다. 이윽고 새까만 털옷을 입은 반달가슴곰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순식간에 이동장을 벗어나 내실로 내달렸다. 반달가슴곰 햇님이와 달님이가 한 마리 씩 차례로 새 집으로 입성했다. 이들 옆집에는 10개월 전에 이곳으로 이사온 백사자 부부가 햇볕을 쬐고 있다. [관련기사=[현장] 백사자 부부, 3평에서 150평 집으로 이사 가던 날(‘24.6.18)]

지난 17일 반달가슴곰 햇님이와 달님이는 경기도 소재 A 동물원에서 대구 달성군 네이처파크로 이사를 왔다. 지난해 동물학대 논란을 빚던 대구 실내동물원에서 백사자 부부와 긴팔원숭이, 알락꼬리여우원숭이를 구조한 네이처파크는 관련법 개정으로 반달가슴곰 관리에 고민하던 A 동물원의 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지난 2023년 12월부터 시행된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동물원수족관법)’에 따르면 동물원이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됐고, 야생동물 특성에 맞는 서식환경을 조성, 구체적인 동물관리 계획 수립, 허가권자 감독 의무가 강화됐다. 기존 동물원은 동물원 환경을 개선하거나 폐업할 수 있도록 2028년까지 법 적용을 유예 받았다.
법 개정은 이전부터 산발적으로 논란이 되던 전시 동물들의 열악한 환경과 학대 문제가 배경이 됐다. 대구에서도 민간동물원에서 동물 학대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분이 일었다. 10개월 전 네이처파크로 이사 온 백사자 부부도 공분이 된 동물학대 사건의 피해 동물들이다. 지하 동물원에서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굶주린 사자들이 3평 남짓한 우리에 갇힌 모습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관련기사=‘대구 동물원 동물학대’ 항소심도 징역 1년·집유 2년(‘23.06.09), 수성구 ‘동물학대 논란’ 실내동물원 동물 매각(‘24.05.16)]
햇님이와 달님이는 동배 어미에게서 난 남매다. 2살 무렵에 A 동물원으로 가 5년 동안 실내동물원 생활을 했다. 지난해 10월 A 동물원 측에서 네이처파크에 반달가슴곰을 받아줄 수 있느냐는 문의를 했고, 네이처파크가 긍정적인 답변을 회신했다. 11월에 각 동물원 관계자들이 사전 답사를 하고 시설 리모델링, 신고 절차까지 진행한 후 이날 햇님이와 달님이의 이사가 이뤄졌다.
A 동물원 관계자는 “유예 기간이 상당 기간 남았지만, 유예 기간을 다 채우기 보다는 하루라도 좋은 환경을 찾아주기 위해서 전국 동물원에 문의를 했다. 네이처파크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주셔서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수컷인 햇님이는 약 120kg, 달님이는 약 80kg으로 추정된다. 새까만 털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덩치에 걸맞지 않은 날렵한 모습은 맹수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경기도에서 대구까지 이동하며 장시간 이동장에 갇혀 있던 스트레스를 살피기 위해 대기하던 김신우 수의사(동인동물병원)는 “곰들은 동굴과 같은 좁고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오자 마자 내실 쪽으로 둘 다 달려갔을 것”이라며 “겉보기엔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이동 과정에서 긁으면서 생긴 발톱 상처는 상황을 봐서 약을 처방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달님이와 햇님이의 새 집 주변에는 ‘불법증식 시설 및 열악한 환경에서 구조한 곰 두 마리가 네이처파크로 온다. 더 나은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이들의 이사를 위해 네이처파크는 통나무로된 행동풍부화 시설을 방사장 한 가운데 설치하고 다른 한 쪽에는 작은 인공 폭포도 준비했다. 네이처파크 측은 지난해 먼저 온 백사자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반달가슴곰 남매도 잘 적응해 나갈 걸로 기대했다.
전근배 네이처파크 사육팀장은 “백사자 부부는 기존 사자와 합사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고, 지금은 보다시피 한 공간에서 잘 지낸다. 완전 합사가 된 것은 한 달 정도인 것 같다”며 “원숭이들도 처음에 왔을 때 잔병치레도 좀 했지만 지금은 완적 적응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백사자 부부의 이사 소식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저 백사자로 불린 이들은 현재 ‘레오’, ‘레아’라는 이름과 함께, 룸메이트도 생겼다. 백사자 부부가 이사하고 곧 이어 긴팔원숭이, 알락꼬리여우원숭이도 이곳으로 이사해 왔다. 네이처파크 홍보팀 관계자에 따르면 떠들썩하게 이사를 한 뒤에도 관람객들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졌다. 반달가슴곰 남매가 이사온 이날도 봄 소풍으로 동물원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맹수들을 바라보며 신기해 했다.
전근배 사육팀장은 “햇빛과 바람을 많이 쐬게 해주는 게 우선이다. 그렇지 못한 공간에서 살던 애들이니까 자연 환경을 잘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며 “알락꼬리여우원숭이는 지난 일요일에 쌍둥이 새끼도 낳았는데, 잘 적응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고 전했다.
전 팀장은 “긴팔원숭이는 처음에 경계가 심했는데, 요즘에는 관람객들에게 다가와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인다. 호기심이 많은 녀석들이다. 사육시설 안에도 보다시피 원숭이가 놀거리를 많이 만들어 뒀다”고 말했다.
그는 “이 친구들이 정말 자연에서 그냥 지내는 게 아니라 (여기도 동물원이니까) 부족한 게 있을 수밖에 없다. 본능을 고려해서 최대한 자연 환경과 비슷하게 꾸며주고, 애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개선하고 공부하고 노력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장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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