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민 합동단속 시작···가석방 김민수가 마주친 세상

    "버스 운전 안 할 거지요. 외국인들과 일 안 할 거지요." 가석방 심사관의 물음
    "그 사람들을 어떻게 피해 다닙니까. 내 사는 곳에 없는 곳이 없는데."

    14:22
    Voiced by Amazon Polly

    중국식 회전 식탁에 팔보채와 탕수육이 놓였다. 평소보다 거창하게 차린 식탁이다. 대경이주연대회의 소속 김용철, 김헌주, 고명숙 씨 맞은편에 김민수(가명, 43) 씨가 앉았다. 이주노동자 통근 버스를 몰다 사고를 내 교도소에 갇혔던 김민수다. 김민수는 앞에 덜어 놓은 요리를 잠시 살펴보다가 둘러앉은 사람들을 다시 바라본다. 젓가락만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입에는 같이 나온 엽차만 가져다 댔다.

    3월 마지막 금요일인 28일, 김민수는 1년여 수형생활을 하던 중 형기 만료 5개월을 앞두고 가석방됐다. 시간이 정지한 듯했던 교도소 생활에 비해 출소 과정은 순식간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교도소 사동에서 나와, 입출소실을 거쳐 세상으로 나오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처럼 짧게 느껴졌다.

    “이렇게 투옥될 것이었다면···”

    교도소에서 김민수가 골몰했던 생각이다. 강제 추방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또 아무런 좋은 일도 이루지 못했다며 자책했던 시간이었다. 출소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김민수는 일상에 복귀하지 못했다. 전자시계를 마련하고 휴대전화를 다시 개설했지만, 김민수는 여전히 2년 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민수는 아직 사람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며, 그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석방된 김민수의 회상
    가슴에 맺혔던 과거의 강제 단속

    항소심에서 판결이 확정된 후, 기결수가 된 김민수는 교도소 취사장에 배치됐다. 취사 담당을 맡으면서 1인실을 쓸 수 있었다. 조출조로서 새벽 3시부터 근무를 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등 강력범죄 혐의로 재판 중이던 때, 김민수는 살인 등 다른 강력범죄 수형자들과 같은 생활관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 김민수는 일상에서 긴장을 놓지 못했고,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면 예민하게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

    평생 공단에서만 일해 온 김민수는 취사 담당을 맡으며 처음으로 칼질을 해 보았다. 밥 짓기, 그리고 칼질이 맡은 임무였다. 하루에 2,700명분의 밥을 짓고, 한 번에 양파 250kg을 썰었다. 많은 양의 식재료를 손질하는 단순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상념도 찾아왔다. 김민수는 자동차 부품 업체를 전전하며 성장한 시절부터, 2023년 8월의 사고로 교도소에 들어오기까지 여정을 수없이 되새겼다. 그 어느 때고, 교도소에서 칼질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공단에 근무하면서, 김민수는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와 인연도 쌓게 됐다. 김민수에게 이주노동자는 동료이자, 또한 상처였다. 공단에서 연차를 쌓으며 관리 업무를 맡게 되었고, 김민수는 일하는 곳에서 강제 단속을 겪는 일이 잦았는데, 매번 그 경험은 전쟁 같았고, 같이 일하던 이주노동자가 추방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여러 번 봤다.

    공장에서 한창 일 하던 2016년. 법무부 출입국 단속반이 공장 문을 두드렸다.

    “법무부입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대답할 새도 없이 단속반이 들어왔고, 공장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는 속절없이 붙잡혔다. 그때 이주노동자가 했던 “과장님 도와주세요”라는 외침이 귓가에 맴돌아, 김민수는 그 후 오랜 기간 술에 의존해 잠들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김민수는 그날을 후회하며, 곱씹었다. 그 뒤로 김민수는 단속 시 이주노동자를 숨기는 요령을 고민했다. 공장 곳곳의 사각지대를 확인했다. 김민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알렸다. 몸을 피하는 방법을. 그리고 피하지 못할 상황이면 오히려 두려워 말고 도망치지도 말라고도 했다.

    운행하는 버스를 멈춰 세우고 단속하리라 예상하진 못했다. 2023년 8월 그날, 김민수가 몰던 버스가 단속 차량에 둘러싸이고 단속이 시작되자 이주노동자들의 절규가 버스 안에 가득했다. 김민수는 우발적으로, 상황 판단을 깊게 할 겨를도 없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

    깍둑썰린 양파가 회전 식탁에 올랐다. 김민수는 여전히 엽차만 홀짝인다. 식탁에는 출소 이후 김민수가 했던 일들에 대한 질문도 올랐다.

    교도소 앞에서 출소한 김민수를 맞이하려던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는 김민수 출소 후에야 가석방 소식을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민수조차도 출소 당일에 가석방 결정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초 접견을 신청했던 회사 친구가 마침 교도소에 와, 접견실이 아닌 교도소 밖에서 만날 수 있었다. 사동에서 교도소 밖까지 거리는 짧았다. 교도소에서의 삶이 새삼스러웠다.

    구속 이후 아이 둘을 처음으로 마주할 생각을 하며, 김민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보여야겠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는 접견도 한번 하지 않았다. 1년 5개월 만에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출근, 아이들은 학교에 있었다. 하교한 아이들을 보고선 김민수는 짧게 말했다고 한다.

    “뭐 임마, 아빠 여행 갔다 왔다.”

    아이들이 화제가 되자 김용철 금속노조 성서공단지회 상담소장이 큰아이 소식을 물어본다.

    “아이들이 손 편지 쓴 건 알죠? 출입국 직원들에게 잘못했다고, 선처를 바란다고 썼는데. 결국 직원 일부가 선처 탄원서도 썼고요. 아, 모르셨구나.” (김용철)

    김민수는 말없이 찻잔을 든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김민수 아버지 산소, 장인어른 산소를 각각 다녀왔다.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어머니를 찾아 인사드리진 못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김민수가 출장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지만, 김민수는 여전히 어머니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한다. 조금만 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한다.

    ***

    ▲출소한 김민수(가명)를 김헌주, 고명숙 활동가가 만났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식사를 마치고, 성서공단지회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자리에서 김민수는 이주노동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책도 선물 받았다.

    모인 이들이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김민수는 출소 직전에 가석방 심사를 맡은 법무부 직원들과 대화를 떠올렸다. 한 명씩 두 사람에게 김민수는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버스 운전 안 할 거지요. 외국인들과 일 안 할 거지요.”

    처벌 원인이 된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확인을 받기 위한 질문으로 여겨졌다. 김민수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피해 다닙니까. 내 사는 곳에 없는 곳이 없는데. 집 밖에 안 나올 테니 생활비 줄랍니까.”

    김민수는 10대에 공단 생활을 시작해 40대가 되기까지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면서, 가끔 동창회에 오라는 연락을 받아도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됐다. 이미 예전의 친구들과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들을 보면 주눅이 들기도 했다. 김민수는 스스로를 이주노동자로 여겼다.

    이제 일상을 되찾는 것이 김민수 앞에 놓인 과제다. 트라우마 탓에, 통근 버스 운전대를 다시 잡지는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평생 했던 공단 일에서 손을 뗄 수는 없다. 어떻게 되든 또 다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김민수는 또 다시 강제 단속의 현장에 놓이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김민수는 후회한다고 말했다. 교도소에서 그 질문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버스 안에서 들렸던 울음소리가 계속 귀에서, 아직도 맴돌아요. 어차피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끝까지 도망쳤어야 했나. 이렇게 가도 답이 없겠다는 생각에 중간에 멈췄지만, 그래도 끝까지 도망갔어야 했나. 더 좋은 대처를 할 수는 없었을까. 혼자 교도소에서 할 것도 없이 계속 그 생각만 했어요.”

    이것이 김민수의 후회다. 답은 쉽게 내릴 수 없다.

    김민수가 교도소에 갇혔다가 풀려나서 발디딘 이곳. 강제 단속 문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대구에서는 지난 2월 출입국 단속을 피해 공장에서 도망치다 이주노동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특히 다발성 골절상 등 큰 부상을 입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치료를 중단하고 원룸으로 돌아갔다.

    같은 달, 전남 영암군 한 돼지농장에서 일하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당 농장주는 사망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요, 상습적 폭행 등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3월에는 양주출입국의 단속 과정에서 대형 압축 기계에 몸을 숨기려던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발목이 절단됐다.

    4월 14일,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부상, 사망, 절규를 딛고, 법무부는 77일간의 정부 합동단속을 시작했다.

    “제가 절망하고, 다 포기하고 있을 때 도와주셨어요. 손을 내밀어주신 것, 진짜 감사드립니다. 교도소에 갇혔을 때는 완전히 폐인이었어요. 세상 다 잃은 느낌이었고. 그런데 이런 일이 나 하나로 끝날 건가요. 아닐 거 같아요. 또 다른 제가 또 나올 거예요. 대한민국에 외국인들이 안 들어오면 어떻게 될 거 같나요. 단속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관련 기사=접견 시간은 10분, 동료시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24.2.28.)
    강제단속 일변 불법체류 대응, 또 다른 ‘김민수’ 만들까(‘24.3.4.)
    7,300여 명의 탄원, “이주노동자 걱정하는 마음, 재판부 선처를···”(‘24.3.5.)
    이자스민, “한국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없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됐다”(‘24.3.6.)
    교도소에서 온 ‘통근 버스’ 김민수의 편지···”여러분이 저의 희망”(‘24.3.7.)
    미등록 강제단속 차량 추돌, 김민수의 마지막 공판(‘24.4.3.)
    통근 버스 기사 김민수 항소심도 실형···유예된 법원 온정(‘24.5.1.))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