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양현 종사와 만들어진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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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음력 3월 12일, 이진영의 방문을 받은 김령은 당시 조정을 시끄럽게 했던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 이야기를 듣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문묘는 문성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유학의 창시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성균관에 설치된 문묘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유학 탄생기 성현들으로부터 송대 시대 성현들까지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성균관에는 중국에서 조선 유학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동방의 성현들까지 배향했다. 이 기록이 있던 시기까지는 설총이나 최치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안향, 정몽주, 김굉필 등과 같은 인물이 배향되어 있었다.

당시 시점에서 가장 최근 문묘에 종사된 인물은 이언적과 이황이었다. 서인들 관점에서 볼 때, 동인(이후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만든 인물들이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과 같은 반열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학통은 동인에게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 당파가 가진 정통성을 보장받고 있었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서인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에 하려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이와 성혼을 지칭하는 양현兩賢에 대한 문묘 종사는 서인 전체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조선 최고 유학 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서인들이 먼저 여러 차례 양현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와 더불어 모든 여론이 양현 종사 찬성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각 지역 서인들 역시 대대적인 상소 운동에 참여했다. 문묘 종사는 오랜 역사적 평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예민한 주제였고, 이로 인해 반대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조정이 시끄러운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역 상소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문관 홍내범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양과 이웃한 여러 읍들에 편지를 띄워 강제로 모두 상소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당색이 명확치 않았던 한반도 북부지역이었지만,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홍내범의 당색으로 인해 평양 주위 여러 읍들의 향교 등에서는 양현 종사를 위한 상소 운동에 참여해야 했다.

이진영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당시 이진영은 평양 주위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산향교(현 평안남도 증산군 소재) 유생 한 명이 그를 방문했다. 홍내범 아들 편지를 받고 평양으로 가는 길에 평상시 알고 있었던 이진영에게 문안 인사차 들렸다고 했다. 이진영 역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증산군에서 평양까지 먼 길을 찾은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유생은 홍내범의 아들로부터 밭은 편지를 언급하면서, 내몰려 마지못해 왔다고 계면쩍어했다.

당시 이진영과 동석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양현 종사 문제를 알지 못했던 이도 있었던 듯하다. 그 중 박응석은 양현, 즉 두 현인이 누구인지 유생에게 묻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로 평양까지 찾아온 유생은 머뭇머뭇 하더니 “한 명은 율곡 이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성成씨 입니다”라는 대답을 겨우 내어 놓았다. 아마 성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던 듯했다. 여기까지 했으면 되었는데, 이 유생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한참 생각하다가, “성삼문입니다”라고 다시 답했다.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던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삼문이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갑자기 호출되자, 일순 좌중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지역을 넘어 한양까지 퍼지면서, 당시 여론 현실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실제 증산 향교 유생의 이 같은 행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정 권신들이 양현을 종사해야 한다고 하니, 마지못해 따라야 하는 지역 유생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증산 향교 유생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자, 서인들 측에서는 이진영이 고의로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고 원망했다. 동인들의 의도적인 방해 공작으로 읽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김상헌이 대사헌으로 있는 사헌부에서는 이진영을 벌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표명할 정도였다. 잘못된 여론 문제를 가짜 뉴스 프레임으로 전환하려 했다는 말이다.

올바른 여론은 올바른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올바른 논거에 기반해서, 논거와 주장의 관계를 정확하게 판단한 뒤에 모여진 개인 의견의 총합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제는 논거와 주장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을 내리는 ‘주체적 개인’이다. 올바른 여론의 전제 조건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개인’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 양현 종사 여론은 기본 전제 조건도 충족하지 못한 채, 몇몇 권신들을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던 논의였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론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지지하는 방향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원칙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역과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후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특정 주도 세력이 지지하는 기호‘만’ 찍는 우리의 여론 지형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다. 게다가 이를 호도하는 가짜 뉴스까지 보태지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까 하는 걱정도 인다. 다행스럽게도 위기의 시기, 깨어 있는 시민들이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늘 불안불안하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