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해방일지] 경상도 K-장녀가 딸과 함께 윤석열 퇴진 광장 향한 이유

[뉴스민 광장통신원] 원하다 씨
딸과 함께 향한 대구시민시국대회
내가 아닌 '장녀'로 살았지만
딸은 자기 삶을 살기를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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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시민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지연되는 동안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극단주의적 지지층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면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극우적인 집단은 법원 폭동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 했듯 사회 전면에서 가시화됐다. 윤석열이 4월 4일 비상계엄 선포 123일 만에 마침내 파면되면서, 내란 사태의 1막은 내려갔다. 이제부터 펼쳐질 2막에서 광장의 목소리는 어떻게 이어질까?

<뉴스민>은 시민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또 윤석열 파면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기 위한 기록 모임 ‘윤석열 내란에 맞선 기록, 광장 해방일지’를 기획했다. 신청을 받아 뉴스민 광장통신원(시민 기록자) 7명을 모집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4월 2일부터 하루 1편씩 공개한다. 광장통신원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시민도 환영한다. 문의는 nahollow@newsmin.co.kr.

1) 김민지: 광장에 나온 우리,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다
2) 김아영: 나를 살게 한 ‘광장’

3) 권지현: 대구 광장에서 뿌린 씨앗, 과실은 모두의 것
4) 박다연: 대구 광장에서 혼자가 아닌 우리
5. 원하다: 경상도 K-장녀가 딸과 함께 윤석열 퇴진 광장 향한 이유

광장에 나서기 전까지 나는 고립돼 있었다. ‘경상도녀’, ‘K-장녀’와 같은 말들은 나를 수식하는 단어였는데, 나 또한 그 말들의 테두리에 갇힌 채 살아왔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게 됐지만, 역설적으로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시민들의 광장이 펼쳐졌고, 나는 그곳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그 말들의 테두리에서도 벗어나는 듯했다. 나는 그 광장에 딸과 함께했다. 이 글은 딸과 함께 윤석열 퇴진 대구시민시국대회에 참석한 사람으로서 남기는 소박한 기록이다.

처음에는 대구에서 열리는 집회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14일에야 동성로에서도 집회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곧바로 광장으로 나섰다. 7일 국회의 윤석열 탄핵안 불발로 막막함만 느끼다 나간 광장에서 나는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당시 집회장에 모여든 인원이 엄청났다. 처음에는 교보문고 방향 편도 차선을 가득 채웠는데,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반대편 차선까지 모두 채웠고 차량 통행은 전면 통제됐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 후로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했다. 그곳은 학교였다. 기후위기에 관한 이야기, 이주노동자의 처우에 대한 발언을 들었다. 차별금지법, 유튜브로 연대한 남태령의 양곡법, 나눠주신 전단지로 알게 된 AI 디지털 교과서 강제 도입 등등. 일상에서는 전달되지 않았던 소식, 외면했던 소식이었다. 부끄러워졌지만, 이제라도 알고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대구에서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구나. 어떻게 살아왔든, 어떤 정치 성향을 지녔든, 탄핵만큼은 뜻이 같구나. 이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일렁였다. 광장에서 4.16연대에서 준 따뜻한 떡을 받아 들었을 때, 추운 겨울 내내 차디찬 길바닥에 앉아 고개를 들어 살펴본 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도 똑같이 마음이 울렁였다.

▲대구시민시국대회에서 대구416연대에게서 받은 떡 (사진=원하다 제공)

딸과 함께 향한 대구시민시국대회
내가 아닌 ‘장녀’로 살았지만
딸은 자기 삶을 살기를

매주 집회에 참석하다 보니 딸과도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됐다. 딸이 왜 혼자 가느냐고 묻기도 했고, 이 광장에서는 딸도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혐오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평등과 배려가 느껴졌다. 연대에서 오는 따뜻함은 어딜 가서 따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혹 난입하는 사람이 있어도 주최 측에서 잘 해결했다. 고성을 지르며 대오에 난입하려는 사람들 보곤 놀랐던 딸은 내게 ‘처음엔 무서웠는데, 다 함께 있다는 걸 생각하니 괜찮아졌다’고 했다. 마음이 울렁였다. 딸은 내가 집회에 다녀와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곤 자기도 그렇다고 호응했다. 차도에 내려와 행진하는 경험도 새롭다고 했다. 어떤 날은 집회를 마치고 단둘이서만 뒤풀이를 하기도 했다.

딸과 함께 광장에 나서다 보니 문득 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가족과 정치 얘기는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치 이야기는 금기시돼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 학생 때는 ‘공부에나 신경 쓰지 그런 건 몰라도 된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이는 20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서른이면 상폐녀’란 소릴 듣고도 마음속으로만 반발했다. 마흔이 되었다. 친정도, 시댁도 모두 가부장적 문화가 강했고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보수정당을 비호했다. 마흔이 된 나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정치에 무심해서는 안 된다고. 또 ‘상폐녀’와 같은 말을 들어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의 의견만을 무조건 따르지 말고, 너의 생각도 꼭 들려달라고. 부모로서 최대한 바른 선택을 하려고 하겠지만 항상 옳지는 않을 거라고. 어릴 적의 내가 가족에게 듣고 싶었던 얘기를 딸에게 하며 설움을 달래본다. 광장에서 만난 연대로 시작한 행동이다. 비록 나는 내가 아닌 ‘장녀’로 살았지만, 내 아이는 다르게 살 수 있다면, 내 서러움 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대구시민시국대회에 함께 나온 딸 (사진=원하다 제공)

윤석열이 파면되기까지 4달, 평일엔 도서관에 가서 시민운동이나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봤다. 주말에는 집회에 향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렀다. 막바지에 접어들어서는 마치 탈옥이라도 한 것처럼 윤석열이 풀려나왔고 내 불면도, 사회에 대한 불신도 심해졌다. 하지만 끝없는 터널 같았던 이 상황도 결국 지난 일이 되었다.

윤석열 파면 선고를 보고 나는 딸과 함께 축하파티를 했다. 이제 우리는 길었던 터널의 끝에 서 있다. 하지만 그다음 터널도 기다리고 있다. 광장에서 발견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아직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만난 이들은 이미 여러 현장에서 행동하던 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과 함께 소리 내고자 한다.

혼자서 외칠 땐 되바라진단 말이나 들었다. 이제는 함께 외칠 수 있다. 이젠 혐오 발언에 얼굴만 붉히던 전과 달리 잘못을 지적할 것이다. 성별 고정관념, 임금 격차와 같은 여성 차별 문제도 이야기할 거다.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꺾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딸과 함께 꾸준히, 그리고 폭 넓게. 그러다 보면, ‘TK의 딸’이란 말도 더 이상 서글픔이 아닌 강하고 끈기 있는, 끝끝내 쟁취하고 승리한다는 상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하다 씨가 대구시민시국대회에 응원봉과 달곰이지부 인형을 들고 나왔다. (사진=원하다 제공)

원하다 광장통신원(필명)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