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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하며 고향을 떠난 딸은 이제 1년에 2번, 명절 때에만 본가에 들른다. 영상을 전공한 감독은 기나긴 귀향길 여정을 카메라로 기록하곤 한다. 2014년 2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제법 긴 시간 걸려 도착한 오랜만의 집. 늘 봐 왔던 풍경이 펼쳐진다.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엄마와 옆에서 이를 챙기는 할머니,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아빠와 집안 남자 어른들의 풍경이다.
딸은 그렇게 수십 년 내내 봐온 반복되는 풍경에 색다른 게 추가된 걸 포착한다. 엄마의 방에는 중고생들이 씨름할 법한 교재들이 잔뜩 쌓였다. 늦깎이로 공부를 다시 시작한 엄마는 ‘가방끈’ 긴 딸에게 이것저것 과외를 청한다. 엄마와 딸의 흔한 대화와 과외 수업이 교차하며 계속된다. 딸은 자신이 대학 시절 메던 가방을 엄마에게 주며 가방 기능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한다. 모녀 관계가 묘하게 역전되는 기분이다.
몇 달이 지나 추석이 돌아왔다. 딸은 다시 고향 집으로 내려오는 여정을 치른다.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여행길은 닮은꼴이다. 돌아온 집 풍경 역시 시간이 멈춘 듯하다. 오직 엄마의 방만 빼고. 딸에게 질문하는 내용도 연초와는 사뭇 달라졌다. 노트와 시험지에는 깨알같이 메모가 빼곡하다. 단어 암기에 급급하던 엄마는 이제 문장 독해에 애를 먹는 중이다. 그래도 엄마는 공부하는 게 즐겁다고 한다. 모녀는 함께 추석 달맞이를 위해 밤 산책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귀향한 이주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고향 풍경
지역의 인재가 타지로, 특히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대개 대학 진학 이후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회를 찾으러 기왕 떠났으니 칼 뺀 김에 무라도 잘라야 한다. 다년간 고생해 서울에서 취업하면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위풍당당히 명절에 본가로 복귀할 수 있지만, 취업준비생 시간이 길어질수록 명절이 다가오면 피곤하고 그저 도망치고만 싶은 심정이 된다. 집안의 기대와 물적 지원을 독식한 만큼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탓이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감독 또한 그런 처지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딸을 반기면서도 엄마는 타박을 섞는다. 1984년생이니 30줄 된 딸, 똑똑해서 서울로 대학 보내놨더니 카메라 든 백수로만 보이는 엄마다.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번듯하게 자리도 잡지 못하고 근사하게 차려입고 바쁜 티도 못 낸단 말인가. 기웃거리며 부스스한 엄마 몰골만 살금살금 몰래 찍고 있으니 미더울 리 만무하다. 초반 대화는 그렇게 가시와 푸념이 뒤섞인 채로 오간다.
경상도 사투리가 질펀하게 흘러나오는 집 안에서 보이는 광경은 대구라면 너무나 익숙한 바로 그 풍경이다. 손 하나 꼼짝 않고 부엌은 여자들 일이라 치부하는 아재들의 천하태평 거실과 9월이라지만 여전히 선풍기 돌아가는 가운데 손 쉴 틈 없는 주방의 교차. 뚫어지게 집안 남자 어른들이 독식하는 텔레비전에는 TBC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다. 스치는 찰나 같지만 지역의 색깔을 관광명소 굳이 출현시키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각인하는 장치들이다.
첫 번째 촬영 당시에는 그저 단순한 물리적 조건이었을 두 번의 귀향길은 어느 틈에 ‘반복과 변주’로 대비를 조성하며 관객에게 각인되어 간다. 아마 첫 촬영 후 돌려보고 또 돌려보면서 어떤 특징을 포착하고, 두 번째 귀향에선 최대한 의도적으로 찍는 집요함을 내비친다. 여비에 쪼들려서인지 굳이 KTX를 타지 않고 덜컹덜컹 시간 2배 걸리는 완행을 타고 오다 보니 얻어걸린 풍경이 강조된다. 지루한 여정을 보내고자 카페 칸에 죽치고 있는 젊은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가족 중심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튀다시피 하는 이질감이다. 대체 왜 감독은 이 장면을 굳이 삽입한 걸까? 거의 복사해 붙인 것처럼 별다른 차이도 느낄 수 없는데 말이다.
아마 감독은 자신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되, 본인의 현재 처지를 투영하는 대상을 표현하고 싶었을 테다. 그렇다고 자신을 카메라로 촬영하며 독백하는 건 피하고픈 상황에서 그들 이방인의 소집단은 곧 자신과 동병상련의 신세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나마 저들은 열심히 돈이라도 벌고 함께 고락을 나눌 동료라도 있건만,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홀로 집으로 달랑 카메라 하나 들고 향하는 자신의 처지가 나을 것도 없어 보인다. 물론 그런 신세 한탄 넋두리보다는 그들과 자신이 국적을 초월해 별반 다를 것 없다는 동일시의 감각이 감독이 노린 한 수일 것이다.
만학도 엄마와 과외선생 딸의 역전된 모녀관계
엄마는 황혼이 다가오는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고자 결심한다. 젊은 시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많이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엄마를 보며 딸은 의아하다. 아예 문맹 수준인 것은 아니고, 굳이 학력이 인정된다고 해서 엄마가 이를 발판 삼아 다른 일자리를 찾거나 할 생각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별다른 실익이 없는 일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는 엄마를 솔직히 전적으로 이해하긴 힘들다.
하지만 엄마는 공부에 진땀 흘릴 때가 가장 집중이 잘 되고 잡념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모르는 걸 하나 새로 알 때마다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 반갑기만 하다. 그게 굳이 금전적 이익으로 환산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너무 고령이 되어 자신처럼 도전하기 역부족인 감독의 할머니-시어머니의 무력한 모습이 뜬금없이 종종 화면에 잡히는 게 의문이었는데 후반에 엄마가 보이는 확고한 의지와 명백히 대비를 이룬다. 그나마 본인의 의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시도해 볼 기회라도 뒤늦게 얻을 수 있는 부모세대와 비교하면 조부모, 특히 할머니들은 대개 영영 그런 기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했다.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에 문맹이 어디 있냐고 반문할 이들이 제법 나올 법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던 격랑의 세월 이후에도 생각보다 교육의 기회는 평등하게 부여되지 않았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 주변 여건 혹은 타의에 의해 배우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었던 이는 적지 않았고, 특히 시골-여성의 경우 그 비율은 압도적으로 증대했다. 그래서 요즘도 은근히 농어촌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한글 문해력 교실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 만학도들의 활약(?!)을 기록한 대표작으로 대구 바로 옆을 배경으로 한 김재환 감독의 2019년 다큐멘터리 <칠곡가시나들>이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60년대 이전 출생한 농어촌 여성들의 문맹률은 10% 대를 넘어설 정도다.
물론 감독의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다. 아마 중졸이나 고등학교 중퇴 정도 학력에 그쳤을 테다. 환갑 바라보는 나이에 일상생활에는 별 불편하지 않을 정도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추석 명절을 치른 다음 한숨 돌린 엄마는 딸에게 속에 품었던 이야길 조금씩 꺼내기 시작한다. 자신은 그나마 덜하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이 검정고시 준비하러 학원에 다니는 걸 감추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창피하고 민망하기 때문이란다.
그 순간, 딸의 뇌리에 문득 스치고 지나는 게 있다. 자신이 어릴 적 엄마에게 막연히 모르는 공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어땠느냐고 묻는다. 엄마는 유독 그 질문에 몇 번이고 무슨 뜻이냐며 반문한다. 이해가 안 되는 건지, 답하기 곤란한 마음인지 관객은 쉽게 판단하기 힘들다. 한참 뜸을 들이던 엄마는 고통스럽던 순간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감독뿐 아니라 형제자매들과도 비슷한 경험이 적지 않았다며, 오해도 받고 속앓이했던 상처를 비로소 말하게 된다. 응당 딸에게 척척 공부를 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 다른 학부모들에게 주눅이 들어 기를 못 펴고 오히려 고고한 척한다며 의심을 사던 곤란함은 아마 인생에서 처음 입 밖으로 나왔을 테다. 왜 굳이 뒤늦게 공부를 하고자 결심했는지 다른 답이 더 필요할까?
일상에서 의미를 포착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본격 출사표
그렇게 모녀관계는 사제관계를 더하며 견고해진다. 둘은 지역 시민이라면 금방 알아챌 장소로 밤 산책을 떠난다. 다행히 구름 속에서도 보름달이 반짝 등장한다. 딸은 엄마한테 카메라를 들려주고, 엄마는 주변을 이것저것 촬영한다. 딸은 찍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하늘의 달을 팍팍 당겨가며 포착한다. 그저 즐겁고 신나는 엄마의 한때 같지만, ZOOM 초보적 기능을 십분 활용해 그녀의 시야, 넓게는 세계가 배움을 통해 확장하는 과정을 상징화하는 의미로 새겨진다. 그런 생각을 품고 다시 보게 된다면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그와 함께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별 상관 없어 뵈는 장면 포착이 등장한다. 다리 난간에 친 거미줄이다. 누구나 관리상태 엉망이라며 냉큼 찢어버리거나 투덜대기 일쑤인 거미줄을 모녀는 너무 정교하게 잘 짜였다며 경탄한다. 밝은 조명에 힘입어 거미줄의 기하학적 문양이 반짝반짝 빛난다. 거미는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감독의 카메라에 잡힌 대구 본가의 세월 흔적이 퇴적한 잡동사니 가득한 풍경과 은근히 비교되는 산뜻함이 아닐 수 없다. 집이란 무엇인가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려는 모양새다. 그렇게 은근슬쩍 그냥 지나치는 버릴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작업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영화의 제목을 어떻게 ‘띄워’ 읽거나. 표기해야 할지 난처할 테다. 이 역시 감독의 ‘노림수’가 분명하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뉠 텐데, 첫째는 ‘어머니가 방에 들어가신다’라는 가장 일반적인 표기법이다. 이 경우는 엄마가 끙끙 앓으면서도 새로운 세계와 접속하는 공간으로의 진입을 상징한다. 둘째는 ‘어머니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다소 변칙적이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딸이 엄마에게 가방을 물려주며 이건 여기에 넣고 저건 저렇게 넣고 꼼꼼하게 설명하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챙기던 장면 때문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 역전을 예고하는 이 장면은 후반부 영작법 띄움 과외를 통해 대구를 이루며 감독의 작명 의도를 극대화한다.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공부가 하기 싫어 죽을 맛인 너희로서는 공부할 기회에 목마른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이 대사 한 줄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 일부가 봇물 터지듯 분출하는 셈이다. 압축 성장의 뒤안길에서 불과 부모세대만 해도, 특히 여성들에겐 이런 아픔이 허다했다는 걸 어느새 잊어버린 자녀세대에게 감독은 자신이 깨달은 어떤 진실을 전달하고자 애쓴다.
그저 가정사의 흥미로운 소재감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세대, 거창하게는 역사의식으로 확장하는 시도다. 흔히 ‘사적 다큐멘터리’라 분류하는 2010년대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 주류가 된 경향이 보이는 치명적 맹점을 극복하는 모범적 예시 격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 숱한 작업이 가족이나 심지어 자신까지 카메라 앞에 전시대상으로 소모하거나, 또는 단순한 브이로그와 차별화가 모호해지고 만 한계를 본 작품은 가볍게 돌파해 버렸다.
이후로도 감독은 가족 구성원 개별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지난 삶을 들여다보고 교감을 나누는 일련의 작업을 펼친다. 그와 함께 지역-공간 & 사람을 연결하는 정밀한 구조적 기획을 병행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계에서 견고한 봉우리를 올리는 중이다. 그런 장윤미 감독의 귀향 연작들을 지역 영화의 범주 안에서 해석할 의의는 충분하다 못해 놓친 감이 있다.
<작품정보>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Mom goes into her room
2014|한국|다큐멘터리
미개봉|40분|전체관람가
감독/제작/편집 장윤미
촬영 장윤미, 한점선
출연 한점선, 장윤미, 박노연김상목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