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해방일지] 나를 살게 한 ‘광장’

[뉴스민 광장통신원] 김아영 씨
광장을 넘어, 현장으로
나를 오래 살게 할 경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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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시민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지연되는 동안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극단주의적 지지층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면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극우적인 집단은 법원 폭동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 했듯 사회 전면에서 가시화됐다. 윤석열 탄핵 심판 선고일이 4일로 정해지면서, 이번 사태의 출구도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출구를 통과하면 마주할 세상은 어떠할까.

<뉴스민>은 시민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또 윤석열 파면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기 위한 기록 모임 ‘윤석열 내란에 맞선 기록, 광장 해방일지’를 기획했다. 신청을 받아 뉴스민 광장통신원(시민 기록자) 7명을 모집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4월 2일부터 하루 1편씩 공개한다. 광장통신원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시민도 환영한다. 문의는 nahollow@newsmin.co.kr.

1) 김민지: 광장에 나온 우리,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다
2) 김아영: 나를 살게 한 ‘광장’

“아이돌 플레이브 응원봉 들고 온, 20대 이성애자 비장애인 (시스)여성입니다.”

2024년 12월 9일, 윤석열 탄핵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되었던 7일 이후의 첫 집회에서 나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광장식 자기소개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에 내 몇 없는 정상성을 꺼내 놓은 것이다. 약자들은 자신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만 다수자는 라벨링 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체화 방식으로 정상성에 대한 편안함을 깨보고 싶었다고, 이유야 구구절절 나열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는 무서웠다. 민주주의를 살리려는 시민들의 힘을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까지 살릴지는 미지수였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숨겼다. 그리고 약 3개월 뒤, 나는 얼굴과 이름, 나이, 지역이 다 까발려지고서도 발언대에 올라 맨 얼굴로 자기소개를 했다.

▲첫 발언에 나선 김아영 씨(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저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 생존자이고, 자살 유가족이고, 정신질환 당사자입니다.”

내 밑천이 다 드러났다. 위의 열거된 경험을 내 것으로 소화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그 과정이 쉽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침내 나를, 광장식 자기소개에 따르면, ‘생존자’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살아있고 내 삶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내 삶은 생존이고 투쟁이었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투쟁에 연대하는 방법은 나의 투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투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 이전에, 나의 존재가 그런 식으로라도 쓰임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되고 싶었다. 타지의 농성장을 찾아가 생판 남인 유가족에게 나 또한 자살 유가족임을 밝힌 것도, 불특정 다수의 청중 앞에서 밑천을 드러낸 것도, 나로선 모두 처음인 일이지만, 그들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일에 내가 쓰이고 싶어서였다. 또한 앞으로도 생존자로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었다. 이런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 왔고, 있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이것을 하기까지 3개월이나, 아니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아영 씨(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나를 드러내게 한 광장
처음으로 마주한 ‘박근혜 퇴진’ 광장에서
내 외침은 메아리치지 않았다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나와 결이 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동네 안에서만 외롭게만 존재했다. 대구에서도 박근혜 퇴진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2016년. 동네를 벗어나 보기로 했다. 광장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나의 첫 광장이었다. 당시 중학생인 나는,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 흐름에 함께할 수 있으며, 그것이 변화에 기여할 거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청소년도 주관을 갖고 목소리 낼 수 있으며, 언제든 당신 곁에 똑같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집회는 내게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머리 위에 떠 오른 거대한 고래 풍선처럼, 가라앉은 세월호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작은 동네 안에서만 외치던 평등과 존엄이 끌어올려질 거라 생각했다.

인권과 정치에 관심 없던 내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전사처럼 나서게 됐지만, 외침은 공허했다. 투표한 사람은 뽑히지 않았다. 문제 있는 가정에 살면서, 근로기준법의 예외가 되면서, 정신병자로 살면서,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발걸음한 박근혜 퇴진 광장. 사람들과 같은 구호를 외치고, 나의 선창에 많은 사람들이 후창하는 경험은 짜릿했다. 하지만 정작 그때, 여성에 대한 살인이 여성혐오라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청소년을 존중하라는 내 외침에는 아무것도 뒤따르지 않았다.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박근혜 탄핵이 끝난 뒤 혼자가 된 내가 시간이 흘러 다시 혼자 광장에 나왔을 때. 그곳에는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가 있었고, 성소수자와 오타쿠들이 있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무지개인권연대와 여성의전화가 있었고,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성서공단지역지회 태경산업위원회, 창원 컨벤션센터 경비노동자 유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한 사람,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로 왔다.

그 무엇보다,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선언이 있었다. 이 광장은 내가 소속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애써 나를 지우거나 쫓아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줬다. 어리니까, 유효한 표가 되지 못하니까, 어차피 잠깐 이러다 곧 관심 끌 테니까, 그래도 되니까, 라며 내 외침이 끊임없이 나중으로 미뤄졌던 과거에는 하지 못한 경험이다.

혐오적 발언이 울려 퍼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폭력도 허용하지 않는다. 누군가 부정당하는 것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나는 이제 외로운 전사도, 오지라퍼도, 예민한 사람도, 유난 떠는 사람도 아니다.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려는 이 광장을 만든 것은 바로 그 외로운 전사, 오지라퍼, 예민한 사람, 유난 떠는 사람들이다. 늘 지워졌던, 배제됐던, 변두리였던, 주류가 아니었던, 부정당했던, 입증해야만 했던, 매도되었던 사람들이다.

광장을 넘어, 현장으로
나를 오래 살게 할 경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2024년 12월 31일 거제로 가면서, 그곳에서 나를 살게 할 것만 같은 경험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를 인지하고 누군가로부터 인식되었을 때 연결되고 존재를 확인받는다. 그렇게 내 존재가 증명될 때, 나는 스스로를 너그럽게 수용하고 인정하게 된다. 지금처럼 각자의 이야기가 열렬히 공유되는 광장에서 각각의 세계가 만나고 연대로 연결되고 있다는 감각은 특히나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거통고에서 만난 얼굴을 옵티칼에서 보고, 옆에 있는 노동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나를 기억하는 얼굴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2025년 1월 1일 거제에서 앞으로도, 아주 오래, 나를 살게 할 것만 같은 경험을 했다. 2024년 마지막을 투쟁 문화제로 보내고,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사무실에 꾸려진 성중립 숙소에서 잠이 깼다. 해맞이 행사를 위해 전날 밤 다 함께 맞춰둔 6시 20분 알람 소리를 들으며 침낭과 짐을 정리했다. 나는 선발대로 나섰고, 어제 만난 무지개 깃발 친구들은 깃발 준비를 위해 뒤이어 나섰다. 서서히 밝아지는 조선소를 스쳐 걷다 옥포조각공원에 모여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태양을 맞았다. 그것은 조선소의 가장 높은 크레인에 걸렸다.

그 뒤 떡국을 먹고 투쟁가를 들으며 햇볕이 드는 노란 잔디밭 위에 앉았는데, 자연스럽게 춤판이 벌어졌다. 그냥 춤판도 아니고, 전문 춤꾼 조합원들과 연대버스를 타고 내려온 대학생들의 스트릿 문선 파이터였다. 이상하게 그때부터 오픈 마이크가 이어지는 내내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나는 조용히 비일상이 내 일상이 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투쟁 문화제에서 봤던 몸짓패의 공연이 이제 함께 섞여 추는 춤이 됐다. ‘와줘서 고맙다’고, ‘투쟁은 꼭 승리할 것’이라는 조합원의 말에 연대 시민들은 ‘불러줘서 고맙다’고,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투쟁으로 답했다. 남태령에는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 느껴본 ‘나의’ 광장이었다. 나는 조선소는 살면서 근처도 안 가본, 해돋이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일 따위 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날 나는 ‘동지’라는 이름과 ‘투쟁’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돌아왔다.

2016년의 광장은 나를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2025년의 이 광장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라면, 결국 나를 살린 것은 ‘동지’, 당신들일 것이다. 숨기 바쁘던 때, 촛불과 응원봉을 겨우 들고 나는 “나의 권리와 일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2025년의 광장과 연대를 거쳐 이렇게 구체화되었다.

“광장에 나온 뒤로 화도 많아지고, 눈물도 많아졌습니다. 주변이 아니라 제가 제일 피곤해요. 그런데도 저는 이것을 모르던 전보다는 낫습니다.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우는 사람들을 모른 채 살기보다, 내가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많아지는 것, 내가 들을 수 있는 분노가 많아지는 것이 좋고, 그게 제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김아영 씨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김아영 광장통신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