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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도원 52세, 도예종 51세, 송상진 47세, 하재완 44세, 우홍선 44세, 김용원 40세, 이수병 38세, 여정남 30세. 1975년 4월 9일, 선고 하루 만에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뉴스민>은 ‘열사’, ‘희생자’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청년 여정남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의 모교인 경북대학교에서 추모비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벌였던 투쟁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다. 2025년 윤석열 퇴진광장에 선 이들에게는 열사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물었다. 기사는 <뉴스민>이 제작하고 ‘여정남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도 수록됐다.
1. 대구서 인혁당 사건 50주기 행사 열린다
2. 아들, 삼촌, 선배였던 여정남…그에 대한 기억
3. 기억하기 위해 벌였던 투쟁…추모비는 무엇이었나
4. 2025년, 우리 옆에 여정남이 있다면
여정남은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62학번이다. 재학 당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해 대학에서 제적당했고, 1969년 복학한 이후에도 대학 안팎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그가 바라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직접 남긴 기록이 많지 않기에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동료, 가족의 증언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여정남이 남긴 학생운동의 씨앗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가 ‘독재정권의 희생자’라는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사회 변화를 꿈꾼 혁명가’로 기억되는 이유다. 시대도 구호도 다르지만 대학에서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진보를 그린 여정남의 대학 후배들을 만났다.
이재윤(정치외교학과 92학번), 최일영(신문방송학과 96학번), 최경하(국문과 01), 유경진(사회복지학과 10학번), 이채은(사회학과 20학번) 다섯 명과의 인터뷰를 대담 형태로 재구성했다. 대학 시절 자연스럽게 여정남을 접한 이들은 그가 가졌던 고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여정남 정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
Q. 20학번인 채은 씨는 현재 재학 중이죠. 어떤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나요?
이채은 : 12.3 윤석열 내란사태 이전에도 정부의 부정과 무능이 심각하다는 데 동의하는 청년들이 모여 있었거든요. 12월 3일 낮에 윤석열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183명의 경북대 학생 연서명을 받아 시국선언을 했는데, 그날 밤 비상계엄이 선포됐어요. 이후 시국선언에 동참한 학생들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경북대학생 모임’(민경모)를 결성했고 지금은 60명 정도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민경모 운영진으로 활동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더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이 외에도 학내에서 환경동아리, 학과 학술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고요. 이들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잘 운영할지가 최근 저의 화두예요.

Q. 10년 전 대학을 졸업한 10학번 경진 씨는 어떤가요? 여정남 열사 추모제와 연이 깊다고요.
유경진 : 사회대 학생회장으로서, 그 이후에는 사회대 풍물패 ‘울림터’ 구성원으로 거의 매년 4.9제에 참석했어요. 특히 2015년 여정남열사 40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할 때가 기억나요. 40주기는 평소보다 더 크게 행사를 준비한다는 주최 측 연락을 받고 사회대 학생회가 합류했어요. 학생사회 뿌리 자체가 약해져 있는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고, 다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인혁당 사건이 까마득히 먼 옛날 일로만 느껴졌는데 요즘은 좀 달라요. 12.3 윤석열 내란사태 이후 인혁당 사건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최근에도 울림터가 길놀이를 맡은 일이 있었는데요.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작년 12월 9일 ‘경북대학교 비상시국회의’가 학내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행진했는데, 그때 울림터가 급히 섭외됐어요. 인원이 부족해 저도 일을 하다 뛰어가 상쇠로서 길을 잡았죠. 북문부터 사회대까지 행진한 뒤, 후배들에게 여정남공원 앞에서 과거의 독재와 민주주의 침탈 시도, 추모비를 지킨 선배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신입생 OT나 동아리 술자리 등에서 만들어지던, 여정남과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 나눌 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Q. 20~30년 전 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의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최경하 : 고등학생 때부터 절 괴롭힌 질문이 있었어요. 신영복 선생님을 보며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신념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거든요. 주장의 옳고 그름, 운동의 차원이라기보다 개인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었어요. 대학에 입학해선 그 질문의 연장선에서 여정남 열사의 삶이 궁금했고요. 대학 시절 이런저런 활동을 했는데 마땅히 성과를 낸 것은 없었어요. 내내 방황했고, 그 방황에 이들의 삶이 짐이자 근거가 됐죠.
윤동주의 시를 좋아했어요. 특히 부끄러움을 말하는 부분이요. 시대의 물음 앞에 솔직하고 싶었는데 견디기에는 괴로웠죠. 스스로가 정한 기준점은 높으면서도 한편으론 회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부채의식이 대학 시절 가장 큰 화두였어요. 술을 마시고는 현대공원까지 간 적도 있죠. 여정남 열사를 떠올리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과절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상황 때문에 불편한 마음부터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던 순간들이 떠올라요. 서툴게나마 내 몫을 해내려 했던 게 저의 20대였죠.
최일영 : 1996년 추모비 사수투쟁이 있던 해, 저는 새내기였어요. 그해 5월, 새벽에 선배들 연락이 쏟아졌던 게 기억나요. 자다 깨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대강당에 달려갔죠. 전투경찰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4.9 통일열사 추모비를 탈취해 갔어요. 저항은 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 뒤 학생회에서 여러 차례 다시 추모비를 세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2000년 학생들 모금 중심으로 여정남 추모비 재건립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해 5월 18일 민주광장에 추모비를 다시 세웠고, 탈취 시도가 또 있을까 봐 학생회가 순번을 정해 지켰죠. 4.9제 즈음 복지관에서 일청담으로 가는 길에 대자보 논쟁이 붙었던 기억도 나요. ‘4.9 열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거냐’를 두고 통일열사냐, 민주열사냐 논쟁하는 내용이었죠. 반박 대자보가 복지관 앞을 가득 채울 정도로 줄을 이었어요. 그 정도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시기였어요.
이재윤 : 1992년 대학에 입학했어요. 수업보다는 거리로 나가는 게 일상이던 80년대 학번과는 좀 다른 대학생활을 만났던 것 같아요. 80년대 후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열사에 대한 추모가 공식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고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인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어요. 학생운동의 국면이 바뀌던 시점이었죠.
당시 제 고민은 열사에 대한 구호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멈춰 있다는 점이었어요. 열사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무엇을 위해 투쟁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어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한계는 있었겠지만 별다른 고민 없이 그들을 ‘통일열사’라고 칭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었죠. 그래서 대자보, 자료집 등을 통해 ‘민주열사냐, 통일열사냐’ 논쟁을 꺼냈어요. ‘통일’, ‘민주’ 같은 스펙트럼에 열사들의 삶을 가두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었어요. 사회대 동편 게시판이 대자보로 가득 찼고, 그 옆 담장에는 반박 대자보가 붙었어요. 그 다음엔 붙일 곳이 없으니 줄을 연결해서 종이를 달았죠. 아마 7~8차까지 논쟁 대자보가 붙었을 거예요.
사실은 ‘민주열사냐, 통일열사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열사들의 사법적 명예를 회복하는 걸 넘어서 실제 그들이 추구한 바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린 그것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토론하고 싶었죠. 그게 진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이름으로만 열사님을 칭하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통일열사, 민주열사같이 닫혀진 명칭을 붙이지 않았으면 해요. 그래야 누구든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삶의 어떤 고민 지점에서 열사들을 호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30살의 여정남이 우리 곁에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채은 : 저와 함께 기후정의 운동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기후위기는 제가 가장 관심 두고 있는 사회 의제거든요. 기후정의 운동의 방식과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지역 안에서도 흩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최고 폭염을 기록하는 대구에서, 여정남 선배가 내 옆에 있었다면 여러 분야의 기후 운동을 조직화해 사람을 모으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냈을 것 같아요.
최일영 : 응원봉 든 동료들과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있을 것 같아요. 대학생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광장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과거 독재정권 시절로부터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이번 12.3 윤석열 내란사태에서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갈 길이 멀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죠. 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면서 동시에 우리 안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할 것 같아요. 계엄 선포날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 매주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대구 시민들이 여정남이라고 생각해요.

최경하 : 30살의 여정남은 너무 어려요. 그의 50대, 60대, 70대를 보고 싶네요. 요즘은 생계를 책임지는 나이에서 보여주는 삶이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드라마 ‘오월의 청춘’ 중 ‘선, 위선, 최선’이라는 소제목이 있어요. 주인공이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에게 “너는 착한 사람이 아닌 강한 사람”이라는 대사를 하거든요. 뉴스에서, 일상에서 지켜야 할 게 많아진 진보세력이 솔직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봐요.
저도 20대 내내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괴로웠거든요. 죽어서 아름답게 꺾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너덜너덜해도 끝까지 전장을 지키는 사람들, 남아서 버티는 사람들의 삶도 운동이라는 걸 알아요. 사실 우리 일상은 치졸하고 별거 없잖아요. 지금처럼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다가도 내일 출근해서는 누군가를 시기질투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여정남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요.
Q. 올해는 여정남 열사 50주기이면서, 내란 사태 이후의 세상을 그려야 하는 해이기도 해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여정남 정신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이채은 : 제도적으론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그렇지 않은 순간을 만나요. 지금의 대학에선 정치적 의제를 입 밖에 꺼내기만 해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히거든요.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조차 쉽지 않죠.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비판 대신 비난을 쏟아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 친구가 “우리 세대는 대안적인 삶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학업-취업-결혼으로 이어지는 삶의 경로 속에서 무한경쟁의 굴레를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이를 벗어난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파편화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는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하고요. 그게 열사의 정신에 따라 대항하는 삶 아닐까요.
이재윤 : 열사 정신을 되짚는 일이 우상 만들기에 그쳐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직장에서 갑질을 하진 않았나, 일상에서 타인을 억압하진 않았나, 차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진 않나’ 같이 작은 부분을 일깨우고 생각하게 만드는 열사 정신이 필요하다고 봐요. 왜 우린 그런 운동을 못 했을까요. 거대 악과 싸우기 위해 거대 담론에만 매몰됐던 것 같아요. 삶이 민주적이진 못했던 거죠.
열사들도 처음부터 민족해방, 민중해방을 외치진 않았을 거예요. 자유, 민주, 평등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문제의식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요. 민족해방, 민중해방,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지만 그 운동의 출발점을 짚어야 한다고 봐요. 일상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게 지금 시대엔 더 적합하기도 하고요.
우리는 일상에서 설악산, 한라산 같은 높은 봉우리보다 작은 둔덕을 더 많이 보잖아요. 아침저녁으로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게 우리 삶에선 더 중요해요. 너르게 품어 안는, 보편 가치의 열사 정신을 더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누구의 삶에서든 열사 정신이 꽃 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경하 : 뉴스를 보며 우울해질 땐 ‘끝이 흔들리지 않으면 고장 난 나침반’이라는 신영복의 글귀를 떠올려요. 흔들리지 않으면 운동이 아닌 거죠. 고정된 상태를 고착해서 계속 확대 재생산하고, 그 아래 대중을 운집시키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개인의 공동체가 모인 사회를 꿈꿔요.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라, 내가 귀한 줄 알고 남이 귀한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면 좋겠어요. 저는 여전히 나의 20대와 화해해 나가고 있거든요. 여정남 정신이란 때론 나를 괴롭게 하지만 볼품없이 살면서도 품위를 지켜 나가려 하는 것, 국민에 머물지 않고 시민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