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는 시민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지연되는 동안 대통령은 구속됐다가 풀려났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극단주의적 지지층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면서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극우적인 집단은 법원 폭동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 했듯 사회 전면에서 가시화됐다. 윤석열 탄핵 심판 선고일이 4일로 정해지면서, 이번 사태의 출구도 어렴풋이 보이고 있다. 출구를 통과하면 마주할 세상은 어떠할까.
<뉴스민>은 시민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또 윤석열 파면 이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야할 방향을 담기 위한 기록 모임 ‘윤석열 내란에 맞선 기록, 광장 해방일지’를 기획했다. 신청을 받아 뉴스민 광장통신원(시민 기록자) 7명을 모집했고, 이들의 이야기를 4월 2일부터 하루 1편씩 공개한다. 광장통신원으로 활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시민도 환영한다. 문의는 nahollow@newsmin.co.kr.
계절이 변하고, 연도가 바뀌었고,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2024년 12월 3일을 누가 잊을 수 있을까. 모두가 기억하는 그날의 밤으로부터 약 4개월이 흘렀다. 탄핵소추안 가결, 그리고 윤석열의 구속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일상은 여전히 돌려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심장을 세게 붙잡힌 것처럼 가슴은 답답하고, 내뱉는 숨은 무겁기에 그지없다. 그의 석방은 힘겹게 내디딘 우리 한 걸음을 비웃듯 열 걸음 뒤로 후퇴시켰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껏 쌓인 피로는 풀리지 않고 새로운 중력이 되었다.
흐려진 시야와 누적된 피로는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일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와 불안이 피어난다. 그럴 때면 일상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이 끌려가 버린다. 짧은 고민 끝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또다시 광장으로 향한다. 위협받는 내 일상을 되찾기 위해서.
하지만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는 전처럼 우렁차지 못하고, 행진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전처럼 씩씩하지 못하다. 행진하며 만나는 시민들은 우리를 응원하기도, 위협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시민들이 보내는 응원을 알아채지 못하고, 거세지는 위협에 피곤한 듯 고개를 돌려버리곤 한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지쳤을 것이다. 우린 쉬지도 않고 광장으로 모였다. 꼭 광장에 나와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도 조금씩 생겨났다. 시국대회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짙어지는 시민들의 피로가 공기에 잔뜩 묻어났다.
그런데도 왜 계속 광장으로 나가는 것일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회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 광장으로 향하는 것일까. 집회 참가를 망설이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 차가운 돌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피켓을 드는 것일까.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생각한다. 나는 왜 계속 연대를 이어 나가려는 것일까. 내가 광장에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광장으로 나가게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의 시작점으로 기억을 되돌려본다.

내가 광장으로 향한 이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윤석열 퇴진 대구시국대회를 통해 처음으로 광장에 나왔다. 박근혜 탄핵을 촉구하기 위한 광장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은 한때 나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뉴스는 가끔 챙겨보는 정도였고, 정치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내가 귀를 기울였던 뉴스는 주로 여성 의제와 노동권 관련 뉴스에 불과했다. 대구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무시하고 억압하려는 범주에 완벽하게 포함된 것이다. 지금 정권에서는 원하지 않아도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윤석열이 정권을 잡고 약 2년 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고, 나는 광장으로 향했다.
이것은 폭력이다. 정부가 시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했다. 뉴스를 보고 혀를 차며 속으로 분노를 태우는 것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12월 7일 여의도 국회로 나갔고, 이후 대구 집회에 나가게 되었다. 단순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지만 이 분노는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쉬지 않고 화를 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당장 내일 일터로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내 노동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아도 일터로 나가야 했다. 나는 노동자이며, 내가 가야 할 곳은 일터이기 때문이다. 분노와 울분에 찬 시민들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다음 주 집회는 쉬어갈까, 내일 출근은 어떡하지, 얼른 끝나면 좋을 텐데. 입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점점 집중력은 흐려졌다.
연대의 경험,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대구 시국대회의 행진은 늘 같은 곳에서 마무리된다. 2024년의 마지막 행진은 평소와 달리 시내 한 바퀴가 아닌 동인동 대구시청사를 향했다. 빛이 반짝이고 깃발이 나부끼는 행렬은 이내 청사 앞에 모였다. 빼곡하게 거리를 채운 시민들 앞에서 진행 차량에 올라선 또 다른 시민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발언에 동의하거나 공감의 표시로 야유를 보냈다. 발언이 모두 끝이 나고, 사회자의 진행하에 그날의 집회는 마무리되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깃발을 들고 있던 나는 가장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흩어지는 시민들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집회였기 때문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과 함께 한결 풀린 표정으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당한 사연에 인상을 쓰고 목청을 높였던 시민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인파를 향해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다음을 기약했다. 깃발을 정리하느라 인파가 모두 흩어지고 한적해진 거리를 걸으며 나는 후련함을 느꼈다. 그간 광장을 외면해 왔던 부채감이라는 돌멩이가 명치에서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혹은 광장을 처음 겪음으로써 느낀 낯설고 어색함 같은 것들.
첫 연대의 경험이라고 느낀 순간이다. 무언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아도 광장에서 시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곳, 대구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단순히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의무처럼 광장에 나가는 것이 아닌 동료 시민과 같은 뜻을 나누겠다는 의지 표명. 이후 광장에 나가기 시작한 나는 누군가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동료 시민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연대는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느낄 수 있다. 광장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흐려지던 내 정신을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의 연대가 대구 광장을 벗어나 멀리 퍼져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윤석열 파면을 외치며 광장을 채우고, 시내 한 바퀴를 행진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이 일련의 과정이 끝이 나면 나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저 한 가지 의제를 위해 이곳에 모였으니, 윤석열이 파면되면 시국대회도 광장도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었던 내가 광장을 통해 연대를 경험하고, 다신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일상의 문턱을 넘어 불탄 공장으로
해고자와 함께 걸은 연대의 길
나의 연대는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의 고용승계를 위한 연대인 ‘희망뚜벅이’로 확장된다. 구미에 위치한 옵티칼 공장의 화재 이후, 공장은 폐쇄됐고 일본 본사인 닛토덴코는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외면하고 있다. 이에 박정혜, 소현숙 두 해고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지난 1월 10일부터 11일에 걸쳐 고공농성 1년을 맞아 그곳에서 ‘희망텐트’도 진행됐다. 나는 이 연대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대구 집회에서 우연을 만나게 되었다. 연대는 우연의 연속이다. 희망텐트에 참여했던 한 시민이 두 해고노동자가 희망을 기원하며 접은 종이학을 내게 전해주었다. 모자에 가득 담긴 종이학 한 마리를 집었다. 고공에서 휘날린 무지갯빛 희망 중 쪽빛 학이 내 손에 들렸다. 차가운 색깔과 달리 온기가 가득한 종이학이었다.

이미 연대를 경험한 바 있기에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쉬움이 되었다. 이젠 알기 때문이다. 그저 자리를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연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쉬움을 가지고 대구 집회를 이어가던 중, 우연히 소식 하나를 듣게 된다. 김진숙, 박문진 두 지도위원이 한국옵티칼의 고용승계를 위해 앞장선 ‘희망뚜벅이’가 구미 공장에서 국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소식이다.
‘우연히’ 동료 시민과 참가 일정이 겹치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희망뚜벅이 1일 차에 참가했다. 구미에서 국회까지 약 350km의 길을 걷게 되는 일정의 첫날이 밝았다.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서 구미역까지 13km를 걷는 행렬은 뜻밖의 문제를 맞닥뜨렸다. 전날부터 내린 눈이 이어져 강한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쳤다. 이번 연대에도 나는 깃대를 펴 깃발을 매달았고, 1일 차의 마무리까지 깃발을 놓지 않았다. 나만의 연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13km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길 위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다른 지역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 조합원으로서 이들과 함께 연대를 하는 사람들, 혹은 나와 비슷한 연대 시민. 강풍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휘어지는 깃발을 든 내게 응원의 말을 보냈다. 우리는 함께 눈보라를 뚫고 구미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구미역에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마친 후, 희망뚜벅이 1일 차의 막이 내렸다.
시간을 짜내 다른 날에도 희망뚜벅이를 참가했다. 광장과 또 다른 연대의 온기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옵티칼 조합원들을 뒤따라 두 지도위원과 함께 걷는 행렬은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내려도 비가 와도 묵묵히 국회까지 걸어간다. 궂은 날씨와 몇 km씩 걷는 여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렬의 모두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끝까지 웃는 얼굴로 고용승계의 희망을 안고 걸어 나갔다.
희망뚜벅이는 3월 1일 막을 내렸다. 우연히 시작과 끝을 함께한 나는 광화문 집회의 인파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희망뚜벅이의 막이 내려가는 걸 보면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또 다른 온기를 느끼게 해준 이 연대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덮쳤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두 번째 연대다. 약 한 달의 여정 속에서 3일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구미에서 국회까지 궂은 날씨에도 꿋꿋하게 희망을 품고 걸어왔다. 좁고 긴 행렬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광장에서 흐릿하게 느꼈던 사람의 온기를 이곳에서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선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훨씬 가까웠다. 좁은 인도를 걸어가며 몇 시간씩 걷는 시간 동안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겠는가.
광장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연결돼 있음을 확인했기에
연대. 잇닿을 연 자에 띠 대 자를 쓴다. 그러니 우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이다. 광장에 나온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직접 참여가 어려워 광장에 마음만 함께 했더라도 우리는 함께 광장을 지킨 것이다. 함께 일상을 돌려받기 위해 연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나라와 경제를 망치는 세력을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로 향하길 바라는 것이다.
광장에 나간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기억을 훑어보니 많은 것이 보였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등 떠밀어준 기억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흐려진 시야는 조금씩 초점이 잡혔고, 무거워진 몸은 조금씩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광장에 나가는 것이며, 지치고 힘들어도 연대를 계속 이어가려고 하는가. 내가 연대를 이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이며, 광장에 이끌리는 건 왜일까.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연대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계속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내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광장에 이끌려, 함께 광장을 채운 사람들의 온기에 보답하고자 오늘도 광장으로 향한다.
아마 광장을 겪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인제 와서 모든 걸 외면하고 무지했던 과거와 똑같은 삶을 살기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내 온기가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 힘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연대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향할 것이다. 직접 닿지 않아도,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이 확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온기를 나누러 갈 것이다. 비록 지치고 힘들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면, 다른 연대의 방법을 찾아나갈 것이다.
내가 바뀌었으니 조금씩 세상이 바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나는 바뀌었고, 세상의 변화에 조금의 보탬이 되었다.
눈앞에 닥친 큰 파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러니 조금씩 방파제를 쌓아 올리는 것이다. 당장 모든 파도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닥칠 큰 파도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벽이 되자.

김민지 광장 통신원
nahollow@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