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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바닷가 비탈을 따라 자리잡은 마을 군락까지도 집어삼켰다. 의성 발화지점으로부터 약 70km 떨어진 노물항.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 길 위에 주차된 차량들이 산불에 소각돼 뼈대만 남아 있다. 주변에 산림이나 인화성 물질이 없는데도 불에 탄 것으로 보아, 산불이 해풍을 타고 여기저기로 거세게 확산(비화 飛火)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8일, 경북 영덕은 오후 2시 30분경 주불이 잡혔다. 그 무렵 영덕읍 노물리 해안가 양옥집 현관에서 김 할머니(79)가 해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곳에서 보이는 노물항은 작업이 한창이다. 노물항 복구는 아니다. 이곳에 정박 중이던 선박 7대가 산불 탓에 침몰하는 바람에, 선박 일부를 인양한 뒤 다시 인양을 위해 항구 일대를 정돈하는 작업이다.

김 할머니는 산불이 영덕으로 급격히 확산된 25일 밤 기억이 생생하다. 남편 사후 집을 혼자 지키던 김 할머니는 이장의 황급한 마을 방송을 통해 대피 안내를 들었다. 귀중품과 옷만 챙기고 빨리 대피하라는 소식이었다. 이장의 목소리가 숨 가쁘게 떨렸다.
전화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저녁 시간대, 차량도 없어 공황 상태에 빠졌다. 차량이 없는 사람은 비탈면 위쪽 버스 정거장으로 대피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상황 판단이 잘되지 않았다. 산불로 인한 연기가 빠르게 넘어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친구가 뒤에서 김 할머니 등을 두드리며 어서 차에 타라고 소리 질렀다.
차를 타고 빠져나오자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판단이 되질 않았다. 집마다 차량이 빠져나오느라 도로 정체가 심했다. 정체된 상황에서, 김 할머니는 친구와 포항으로 향하기로 했다. 딸 내외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포항으로 향하는 길에는 버스가 한 대 불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노상에서 산불 확산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김 할머니는 다음 날 바로 귀가했다. 집을 방치하고 딸 집에 있자니 마음이 놓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이웃 한 사람이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이웃은 집도, 배도 다 타버렸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
집은 시멘트로 튼튼히 지은 덕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바로 붙어있는 옆집은 피해가 컸다. 김 할머니는 물도,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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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소방대원 조 모(50대) 씨에게도 급박한 순간들이 연이어 들이닥쳤다. 따개비마을로 불리는 영덕읍 석리. 집에서 서쪽으로 길 하나 건너면 축사가 있고, 축사에 소가 7마리 있었지만, 축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의용소방대원으로서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가정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25일 저녁 대피 안내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방파제 쪽으로 피신했는데, 방파제로도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고립된 주민들을 구해야 한다며 급히 5톤 규모 어선을 몰러 나갔다.
의용소방대 임무를 하던 중 정신없던 조 씨는 틈날 때마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통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인근 전기, 통신설비가 소실된 탓이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남편에게 큰일이라도 난 것인지 무서웠다. 다음 날 새벽 3시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연락된 남편은 무사했다. 조 씨는 임시 보호소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은 등산객의 실화라 들었다. 지금 상황이 원망스럽다가도, 사람의 실수라고 생각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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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집이 무사했지만 가슴은 타들어 간다. 이웃들이 울상이기 때문이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비화로 인해 동네 70%가량은 타버린 듯했다.
게다가 전기 등 시설 복구가 28일 현재에도 이뤄지지 않아 걱정이었다. 옆집은 호수로 집에 물을 끼얹기도 했으나 강한 산불에 군데군데 타버렸다. 수조에 산소공급기가 작동되지 않아 피해도 입었다.
“산불 온다고 이장이 방송을 하는데, 숨을 헐떡이면서 목소리도 떨어요. 혼란스러워서 어물쩍거리고 있는데 그나마 친구가 나를 발견해서 같이 차를 타고 나왔어요. 전화도 안 되고,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친구도 나도 몰랐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 안전할지 몰랐는데, 우선 딸네가 있는 포항으로 왔어요. 길에는 버스도 불타고 있었어요. 25일 딸네 집에서 자고 걱정돼서 바로 다시 여기로 왔어요. 불도 안 들어오고 추운데, 당장 이런 문제보다도 우리 동네가 걱정이죠.”
조 씨는 임시 대피소에서 밤을 지낸 다음 곧바로 축사로 향했다. 축사 외부는 불에 그슬려 있었다. 하지만 축사부터 비탈 아래 들판까지 울타리를 쳐두고 방목했던 탓에, 축사에서 나와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소들은 ‘음매’ 소리를 내며 조 씨를 맞이했다. 수도관이 불에 녹아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소들도 생명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이곳 동쪽 해안까지 산불이 확산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당장 오늘도 집에서 잘 수는 없고 대피소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소들도 생명을 건졌고, 남편도 무사했다.
“앞으로가 걱정이에요. 복구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동네가 정상적으로 돌아갈지 모르겠어요. 일상으로 빨리 복귀를 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배로 작업도 해야 하고.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죠. 그래도 저희는 괜찮은 편이에요. 우리보다 훨씬 피해를 크게 입은 곳도 많아요.”
한편 산림청은 이날 오후 5시께 영덕을 포함해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지역의 주불 진화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이번 피해로 경북지역에서만 24명의 사망자가 나오게 됐다. 149시간 만에 잡힌 이번 산불은 경북지역 약 4만5000ha 규모에 산불 피해를 입혔으며, 주택 등 시설 약 2,400 곳에 피해를 입혔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