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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철저한 부계 사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얼庶孼’이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합해 부르는 말로,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 신분이 양민良民(서자)이거나 천민賤民(얼자)인 경우이다. 물론 사족은 사족과 결혼하기 때문에, 양민이나 천민의 자식은 당연히 본부인의 자식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래도 부계를 따른다면, 이들의 신분 역시 양반이어야 하지만, 조선은 모계를 따라 신분을 정했다. 비록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이었고, 천민이면 천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서얼들은 아버지가 양반인 탓에 일반 양민이나 천민들보다 조금은 나은 대우를 받았다. 신분은 모계를 따라도, 그 뒤를 받쳐주는 아버지는 사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얼은 신분 자체가 사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족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도 쉽지 않았고, 지역 사족임을 상징하는 향교와 서원 출입도 제한되었다.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권리가 서얼들에게는 제한되었고, 이 때문에 같은 아버지를 둔 정실부인의 형제들로부터도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은 당연히 국가와 지역 공동체를 통해 다양한 제도로 굳어졌다. 과거 시험이야 이념적으로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칠 수 있으니, 얼자는 몰라도 서자는 과거 시험을 칠 수는 있었다. 덕분에 어렵게 합격하는 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나 이른바 엘리트 코스는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특히 청요직이라고 불리는 사간원이나 사헌부, 홍문관, 그리고 이조나 병조의 낭관 자리 등은 신분적 하자가 없는 사대부에게만 허락되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당연히 지역 공동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특히 신분적 하자가 없는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도학의 수양 공간인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서얼들의 출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결과로 돌아왔다. 당연히 고을 양반들의 자치 기구인 유향소에도 참여할 수 없었으니, 유향소의 명단인 향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향안은 단위 고을에서 진정한 의미의 양반을 상징하는 명부였기 때문이다. 서얼이라는 신분적 하자는 그들이 실제 살았던 지역 공동체에서 더 심하게 작동되었으며, 가시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얼이야말로 신분 차별에 가장 각성한 집단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족인 탓에 글공부도 할 수 있었고, 신분제의 불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서얼에 대한 차별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던 이유다. 특히 이러한 요청은 청요직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드러났다. 서출 가운데 간혹 과거 합격자는 있지만, 청요직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서얼이 자금도 모으고 통문을 써서 상소를 올리는 운동을 했고, 그 결과 몇 번의 통청이 이루어졌다. 이 기록이 있던 1773년 음력 2월 역시 조정에서는 정조의 명으로 통청이 이루어졌다.
오랫동안 굳게 잠겨 있었던 신분 차별의 문이 살짝이라도 열리면, 그 사이를 뚫고 운동은 전 사회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서출이라는 이유로 청요직 진출을 막았던 벽이 무너지면서, 지역 공동체에도 통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선산부에 살았던 전성천은 지역 향교와 서원이 여전히 서얼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며 지역에서 통청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재능에 따라 사람을 쓰자면서 통청을 강행했던 정조의 논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사족들도 지역에서까지 통청이 이루어지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정조가 가장 신임했던 신하 채제공까지 나서서 “조정에서는 서얼에게 청요직을 허락할 수 있지만, 지방에서는 불가능합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지역 공동체가 인식을 바꾸는 일은 멀어만 보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 역시 확고했다. 재능에 따라 사람을 쓰는 원칙이 조정에서만 지켜지고 지방에서는 지켜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지방의 향교와 서원에도 서얼의 출입을 허용하고 임원을 맡을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면서 정조는 만약 특정 지역에서 이 명을 따르지 않으면, 그 지역은 과거 시험을 3년 간 정지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안 그래도 중앙정계 진출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영남 지역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나 둘 향교의 청금록에 서얼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고, 선산부를 대표하는 금오서원에서도 춘향대제부터 신분에 상관없이 나이 순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노력과 상관없이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는 꽤나 오래된 우리의 역사이다. 당연히 이는 불평등의 상징이며, 효율적인 공동체 운영을 방해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소수의 기득권은 이러한 제도를 순식간에 강고한 제도로 만들기 마련이고, 이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불합리한 차별에 저항했던 수많은 통청의 바람이 있어야 겨우 한 발 한 발 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매 시대 불합리한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통청의 운동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