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카페’ 청송이 누렇고,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전날 오후 의성, 안동 거쳐 넘어온 산불
긴급한 대피 명령, 옷도 약도 못 챙겨 나와

16:05
Voiced by Amazon Polly

“솔방울이 불 폭탄이야. 여기서 뻥, 저기서 뻥”
“언니야, OO 언니는 솔방울에 얼굴을 맞아서 난리가 났단다”

26일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 넘긴 오후 1시 30분께, 달기약수와 함께 경북 청송에서 이름난 신촌약수탕 주변 식당거리는 연휴를 맞 것처럼 조용했다. 식당 안팎에는 주인들이 청소를 하거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영업은 하지 않았다. 한 식당 앞에서 청소를 하던 A 씨는 “이 난리에 장사를 어떻게 해요”라고 했다. 식당 안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B 씨도 “식당 안에 온통 그을음이라 닦아 내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산불 피해가 있으셨나 보다’는 물음에 “말도 말라”며 “솔방울이 휙, 휙. 난리도 아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식당 인근 군립청송야송미술관 뒤편으로 조성된 소나무숲이 이른바 도깨비불, ‘비화’의 진원지가 됐다. 소나무는 까맣게 그을렸고, 숲 사이에 있던 농막은 새까맣게 전소했다.

▲군립청송야송미술관 뒤로 조성된 소나무숲이 불타 까맣게 그을린 소나무들이 서있다.
▲소나무숲에서 날아온 비화에 맞은 정비소가 전소했다.

식당거리는 소나무숲에서 직선으로 250m가량 떨어져 있지만, ‘솔방울 불 폭탄’은 250m 거리가 우습다는 듯 날아와 곳곳에 피해를 남겼다. 식당 사이에 자리했던 자동차정비소는 불 폭탄에 맞아 전소했다. 그 옆의 식당벽도 까맣게 그을렸다. A 씨는 “정비소는 기름도 있으니까, 펑펑 터지고 난리였었다”고 전했다.

산소카페 청송, 매캐한 연기 가득
긴박한 상황에 대피소 텐트도 없이 하룻밤

전날 오후 4시 35분경부터 의성과 안동을 거쳐 넘어온 산불은 오후 5시 5분께 청송군 파천면사무소 맞은편 산으로 옮겨붙었다. 불은 파천면에서 진보면으로, 주왕산면, 안덕면으로 번져가고 있다. 산불은 ‘산소카페’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26일 찾은 진보문화체육센터는 적십사자 등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날(25일) 오후 급하게 진보면 주민들을 대피시킨 진보문화체육센터도 마찬가지다. 대피소로 마련된 센터 강당 안도 매캐한 연기가 가득차서 마음껏 숨쉬는 게 힘든 지경이다. 급하게 대피하며 옷가지도 제대로 챙겨 나오지 못한 고령의 이재민들은 강당 바닥에 은박 스펀지 한 장을 깔고 하룻밤을 보냈다.

진보면 괴정2리에 사는 황기명(79) 씨는 전날 오후 5시께 대피하라는 방송을 듣고 아내와 함께 급하게 대피소로 피난했다. 전날 밤엔 진보초등학교도 이재민들에게 개방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황 씨는 26일 오전께 문화체육센터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집을 포함해 11가구 정도가 살던 부락으로 옮겨붙은 산불로 황 씨의 집을 포함해 8가구 정도가 전소했다.

마을 경로당까지 전소한 황 씨의 마을은 건너편 산에서 날아온 비화 때문에 불탔다. 겨우 화재를 피한 마을 주민은 오전부터 마을 곳곳에 물을 뿌렸다. 그는 “지금 여긴 전기도 안되고, 수도도 안 된다. 그래서 마을 앞 개천에서 물을 퍼다 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처럼 마을 위로 지나던 전선은 곳곳에서 불타 끊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

▲황기명 씨의 마을과 집이 불탄 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 씨와 이웃해 사는 김진갑(79) 씨의 집도 마찬가지다. 김 씨는 이날 오전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아내의 약을 타러 안동병원을 다녀왔다. 아내는 고혈압, 당뇨 뿐 아니라 심근경색도 앓은 적이 있어 먹어야 할 약이 많지만, 청송보건소에서 제공하는 약으론 한계가 있었다. 김 씨의 아내(76)는 “약 먹어서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면 어쩌겠노”라고 한탄했다.

황 씨는 “우리도 급하게 나오다가 들어가서 약만 챙겨 나왔다”면서 앞에 놓인 약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황 씨의 아내(76)는 “보세요, 옷도 제대로 못 챙겨서 안 내복만 입고 있는 걸”이라며 남편을 가르키며 눈물지었다. 황 씨는 “그래도 우리 마을엔 인명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당장 생활할 수 있는 거처와 먹을 것이 가장 필요한 지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청송군에 따르면, 식사는 적십자사 등의 도움을 받아 밥차를 준비해 제공하곤 있지만, 거처 마련은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진보면문화체육센터에 대피한 주민들이 은박 스펀지에 누워 쉬고 있다.

청송군 관계자는 “텐트 조달은 바로는 어려워서 일시 구호세트만 제공됐고, 텐트 200개가 오전 11시쯤 조달돼 문화체육센터에 80개, 청송읍 복지센터 쪽에 120개 조달했다”며 “일부 일시구호세트가 부족한 곳도 있어서 추가 지원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군에 따르면 현재까지 청송에선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 1명은 중상을 입었다. 5,017ha(추정)의 산림이 불탔고, 재산 피해는 파악 중이다. 26일 오후 3시 기준으로 대피자는 692명이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