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들] ㉙ 파면 후의 포항, ‘포스코 집중’ 벗어나 민주주의 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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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지역의 역사, 행정, 정치가 설계된 듯 짜인 곳. 그리고 1%대의 전력 자립도가 의미하듯 전력 수급을 인접 중소도시에 의존하는 곳. 영덕에서 농사짓던 박혜령(56) 씨가 2020년부터 포항에 이주해 살며 느낀 지역의 모습이다. 지역에서 윤석열퇴진 운동에도 나서고 있는 혜령 씨는 윤석열 파면 이후, 우리 삶이 실제로 나아지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민주주의도 확대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영덕에서 농사 짓다 핵발전소 반대운동
한살림 생태운동 나서며 흥해로
비상계엄 선포 후 포항 비상행동 꾸려가

▲ 영덕에서 농사짓던 박혜령(56) 씨가 2020년부터 포항에 이주해 살며 느낀 지역의 모습이다. 지역에서 윤석열퇴진 운동에도 나서고 있는 혜령 씨는 윤석열 파면 이후, 우리 삶이 실제로 나아지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민주주의도 확대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혜령 씨는 2020년부터 포항 흥해 지역에 터를 잡았다.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에 속해, 포항에서 생태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농사짓던 혜령 씨가 생태운동까지 발 딛게 된 데에는 핵발전 문제의 영향이 크다. 2010년 영덕군의 유치 신청으로 영덕에도 핵발전소 갈등이 시작됐는데, 혜령 씨는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2012년엔 탈핵을 외치며 영양·영덕·봉화·울진 선거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2014년부터는 한살림에서 생태운동을 시작했고, 2020년부터는 포항 흥해에서 한살림 운동을 꾸려나갔다.

비상계엄 선포 당시 귀가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TV를 틀어보니 대통령이 계엄 포고문을 읽고 있었다. 80년 광주가 떠올랐다. 당시 딸은 서울 대학가에서 이어지던 시국선언에 참석한 터였다. 그는 딸에게 도피할 준비를 하라고 했고, 포항에서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 관계자들과 새벽 2시에 모여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중에 어이없이 비상계엄이 해제되긴 했다. 하지만 4일부터 곧바로 매일 포항에서 윤석열퇴진 비상행동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초기 포항 죽도시장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집회 참가자를 향한 시민 호응이 눈에 띄게 확인됐다. 50만 명이라는 인구 규모에 비해 시민운동 경험은 부족하고, 또한 노동을 위해 이주한 인구가 많아서, 포항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거나 여론에 동조하지 않은 편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번 호응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나가면서 단 한 분이라도 호응하면 실제 여론은 크게 형성된 거로 받아들여요. 비상계엄이 바로 해제되면서 긴장감이 조금 사그라들긴 했는데, 국회에 군대가 들어간 모습을 봤고 여전히 그 권력이 유지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공포심이 있었고, 그건 포항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계엄이, 그것도 2024년에 선포된 계엄이 위법 부당하다는 발언에 시민들이 많은 동의의 제스쳐를 보여줬어요.”

▲윤석열파면 국힘해체 사회대개혁실현 포항시민비상행동 (사진=박혜령 제공)

4일부터 10일까지 죽도시장에서 매일 열린 비상행동은 14일부터 영일대에서 주 1회 개최로 이어졌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14일, 영일대에는 지역 시민 1,000여 명이 모였다. 당시 모인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탄핵안 가결을 염원했다. 이후부터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집회로 이어지고 있다.

혜령 씨는 비상행동에서 시민의 자발적인 의사 표현이 충분히 활성화되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포항은 광장, 거리의 문화에 대한 경험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래에 누적된 사회운동의 경험이 말문을 연 정도다.

“공동체 문화, 시민운동의 경험과 같은 운동의 저변이 넓지 않아요. 어떤 상황에서 도시의 정서가 발현되는 건데, 포항에는 광장의 문화, 거리의 문화에 대한 경험이 많이 없었던 거죠. 익숙하지 않음 때문에 집회에 대한 긴장도도 높고, 그래서 자유롭게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아요. 포항 시민운동 연대체도 2017년경에 한번 해체됐었는데, 2020년부터 포항시민단체연대회의가 다시 구성돼 활동하고 있죠. 작년에 연대회의가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기후정의행진도 준비하고, 여러 지역 문제를 공동대응하면서 그 경험이 쌓인 덕을 그나마 지금 보고는 있어요.”

포항, 시민운동 경험 얕아
포스코에 집중된 권력, 지역사회 나쁜 영향
내란 극복의 길, 민주적 지역사회도 이뤄내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를 통해 혜령 씨는 포스코의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을 돌이켜보게 됐다. 도시 개발이 포항제철소 건설과 함께 시작됐다고 할 만큼 포항에서 포스코의 입지와 영향력이 지대하다. 그 영향력은 경제는 물론, 행정, 정치, 시민사회, 도시 구조, 심지어 역사에까지 이른다고 여겨진다. 그탓에 지역사회의 민주성이나 개방성도 낮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때문에 내란 극복은 단순히 윤석열 퇴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민주적 환경을 일궈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분명 파면은 될 것이에요. 그다음 형사 재판과 조기 대선 일정이 쭉 진행되겠죠. 2017년 대선을 통해서 배운 건, 특정 정당에 기대는 것으로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조기 대선에서는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지 중요하고, 기성 정치권력에 기대기보다 우리 민중을 위한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후보가 필요하다고도 느껴요. 국가적으로 중앙집권화가 문제이듯 지역에도 특정 조직에 권력이 몰려 있는 상황이 문제예요. 이번 내란 사태에서도 지역 사회 분위기가 잠잠한 것에는 분명 ‘포스코가 중심이 된 지역사회’라는 영향이 있는 것이고. 우리 사회의 지상과제가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면 지역에서도 민주주의를 회복해 나가는 것도 과제가 되겠죠. 단박에 이루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포항에서는 내가 속한 곳에서 공동체 문화를 꾸려 나가고, 작은 민주주의를 일궈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