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피는 꽃] 이어지는 의지···여정남·이재문 추모비는 무엇이었나

‘민주복현’ 지탱하는 한 축이었던 추모비
온 몸으로 경찰의 침탈 시도 막아
미리 숨겨 둔 추모비, 연행된 학생들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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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도원 52세, 도예종 51세, 송상진 47세, 하재완 44세, 우홍선 44세, 김용원 40세, 이수병 38세, 여정남 30세. 1975년 4월 9일, 선고 하루 만에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뉴스민>은 ‘열사’, ‘희생자’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청년 여정남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의 모교인 경북대학교에서 추모비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벌였던 투쟁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다. 2025년 윤석열 퇴진광장에 선 이들에게는 열사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물었다. 기사는 <뉴스민>이 제작하고 ‘여정남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도 수록됐다.

1. 대구서 인혁당 사건 50주기 행사 열린다
2. 아들, 삼촌, 선배였던 여정남…그에 대한 기억
3. 기억하기 위해 벌였던 투쟁…추모비는 무엇이었나

1991년 경북대학교 민주광장에 세워진 통일열사 여정남·이재문 추모비는 1995년, 1996년 잇따른 공안당국의 침탈을 당해야 했다. 1995년의 침탈은 당시 학생운동 세력의 고육지책으로 우여곡절 끝에 넘겼지만, 온전히 지켰다고 볼 순 없었다. 낮에는 민주광장에 섰다가 밤에는 모처로 피난 가는 날이 반복됐다. 1996년 4월 학생운동 세력은 추모비 재건립을 강행했지만, 두 달 뒤 공안당국에 철거되고 말았다. 1995년 5월부터 1996년 6월까지 약 1년, 당시는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에서도 기록적인 투쟁이 이어진 기간이다. 그때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던 세 사람 김부총(가명, 전자, 91), 박희정(국악, 91), 이주형(영문, 93)과 대담을 통해 뜨거웠던 그 시간을 복기해본다. 인터뷰는 개별 서면 및 유선으로 진행했다.

Q. 여정남 열사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됐나요?

이주형(이하 이) : 1993년 인문대학에 입학했어요. 당시엔 매일 인문대학 앞 잔디밭에서 술자리가 있었죠. 1학년 1학기의 전 세상일에 무관심한 보통의 학생이었는데요. 전남대 영문과 영호남 교류를 하면서 광주의 5월 항쟁을 알게 됐고, 역사에 분노했죠. 그 뒤 자연스럽게 정치와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잔디밭에서 술자리를 가지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데리고 대강당 앞 민주광장에 있던 추모비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을 갖곤 했어요. 그게 일상이었죠. 그때 추모비를 통해 여정남 열사를 처음 알게 됐어요.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 학생이 그렇게 일상 속에서 열사를 접했을 거예요.

김부총(이하 김) : 제가 1학년이던 1991년에 추모비를 건립했는데 솔직히 그 기억은 잘 안나요. 그 해 강경대 열사가 돌아가시고 학기 초부터 투쟁을 했는데 추모비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아요. 민주광장 앞에는 추모비가 있고, 우린 그 옆에서 술을 마시면서 선후배들과 열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있어요. 그곳에서 청년 여정남을 만났고, 막걸리 안주로 역사를 만났죠. 제 나이 또래들은 민주광장에서 술을 많이 마셨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우리 선배인 여정남 열사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것 같아요.

박희정(이하 박) : 1991학년도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안영민 형이었어요. 제가 입학한 해 총학생회가 4.9 통일열사 추모비를 민주광장에 세웠죠. 처음 추모비를 봤을 땐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아니라 유인물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4.9통일열사 여덟분에 대한 유인물을 받았던 기억도 있어요. 그러다 1993년, 제가 3학년 때 농생대 학생회 친구들과 ‘암장’1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 통일열사와 관련한 내용이 있었죠. 그때서야 이런 분들이 있었다는 걸,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는 걸 알게 됐어요.

Q. 추모비 사수 투쟁에 참여한 계기가 있을까요?

박 : 제 기억으론 1995년, 1996년 두 번이에요. 1995년에는 총학생회 투쟁국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추모비 사수 투쟁에 앞장서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특별히 계기가 있었다기 보단 그 시절의 추모비는 2만 복현 학우들의 시대정신이었죠. 추모비를 공안당국이나 경찰에 빼앗기면 민주 복현을 지탱하는 한 축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 뿐만 아니라 같이 활동한 학우들 전체가 그런 심정이었을 거예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학우들이 동참했거든요.

이 : 1995년 추모비 침탈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학내 구성원 모두가 추모비를 당연하게 여겼어요.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 따위는 아무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단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경북대 선배라 생각했고, 대부분 학우들은 추모비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신경쓰지 않고 매일 그 앞을 지나가곤 했죠.

그러다 1995년 한총련 3기 출범식을 대중적이고 성대하게 잘 치러내고 모두 휴식기에 접어든 때 갑자기 경찰이 포크레인을 몰고 학교를 침탈했고, 학교 주변에 있던 학우들이 경북대 북문에서 경찰과 공권력을 몰아내는 투쟁을 했어요. 한밤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죠. 경찰이 대학에 진입하는 것을 처음 목격했고 당연히 사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1995년 경북대에서 3기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범식이 열렸다. (사진=박석준 경북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김 : 1995년 당시 전 부총학생회장이었고, 당연히 학교의 명예와 스스로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어요. 5월 4일부터 6일까지 삼일간 한총련 출범식이 학교에서 치러졌고, 바로 며칠 뒤 일이 발생했죠.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1994년 공안 정국을 지나서 1995년 전두환·노태우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전·노 학살자 처벌’이 핵심 투쟁 구호였어요. 대중적 결집이 이뤄지던 해였고, 두 사람의 고향인 대구에서 한총련 출범식을 성사시켜 역량을 키우려 했었죠. 한총련 출범식 직전에는 상인동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있었어요. 한총련은 모금운동과 헌혈을 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하려 노력했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어요.

그즈음 영남대, 계명대 등에서도 인혁당 추모비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경찰에선) 이를 꼬투리 삼았던 걸로 기억해요. 영남대는 실제 새 추모비를 세웠기 때문에 공안당국에서 가만히 둘 수 없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죠.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경북대 내 추모비는 세워진지 시간이 좀 지났으니 철거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의도적인 공안 탄압이 이뤄졌고, 여기에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죠.

▲경북대신문 제1149호 1면 (1995.05.15.)


Q.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995년 추모비 침탈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죠. 당시 경북대신문에 따르면 1995년 5월 11일 새벽에 침탈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역할을 했나요?

박 : 1995년 5월 11일 새벽, 얼핏 학생회실에 모여 있었던 기억이 나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당시에는 수배자가 있어서, 학교에서 숙식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학생회실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이나 장판을 깔고 자곤 했거든요.

무슨 논의를 하고선 선잠에 들었는데 추모비 침탈 시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나갔어요. 당시 제가 투쟁국장이었으니까, 각 단과대 사무실에 전화해서 남아 있는 학우들이 있으면 전부 북문으로 집결하라고 전달했죠. 단과대 사무실에 남아 있는 화염병이나 무기가 있으면 동원하라고도 했어요.

새벽 3시경부터 규탄 시위를 시작했는데, 정말 껌껌한 새벽이었어요. 차도 많이 없던 때라, 다음날 해가 저물 때 까지 싸웠으니···. 그땐 정말 한 축이 무너지는 듯한 황망함, 분노가 교차했던 기억이 나요.

김 : 5월 10일 밤, 한총련 출범식이 끝난 직후라 총학생회 간부들은 출범식 평가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제보가 들어온거죠. ‘오늘밤 자정 넘어 침탈이 들어온다. 추모비 건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긴급히 사수대를 소집했고, 선배들과 상의하는 과정을 거쳤죠. 북문에 바리케이트를 쳤고, 인문대에 모여 화염병을 만들었어요.

출범식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학교 곳곳에서 한참 뒷풀이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학생들이 학교에 많았죠. 삐삐조차 없을 때니까, 자취생 중심으로 전화를 돌리고 인문대 학생회에서 일종의 상황본부를 만들었어요. 플랜카드와 화염병을 만들고, 상황을 체크했던 거 같아요. 일반 학우들은 먹을 것을 사오는 등 여러 방법으로 지지를 보내줬어요.

지금은 목사님인, 영문과 동기 중 한 학우는 등교하면서 북문에 지쳐 쓰러져 있던 저를 보고 같이 화염병을 들고 싸우려 하길래 제가 말렸던 기억도 나요. 당시 대중적인 분위기는 ‘가만히 있는 추모비를 가지고 왜 이 난리지’, ‘어떻게 경찰이 진리의 상아탑을 침탈할 수 있지’ 였어요. 여러 생각의 차이를 넘어서 단결하는 계기가 된 투쟁이었죠.

‘민주복현’ 지탱하는 한 축이었던 추모비
온 몸으로 경찰의 침탈 시도 막아
미리 숨겨 둔 추모비, 연행된 학생들

이 : 1995년도 총학생회 투쟁국 산하에 ‘이재문·여정남 선봉대(이여대)’가 만들어졌어요. 95학번이 주로 참여했고 선배들도 많이 참여했어요. 이여대는 집회 때 최선봉에서 싸웠죠. 저는 과학생회장이라 선봉대원은 아니었지만 학내외 거의 모든 활동에 이여대와 함께 했던 것 같아요. 침탈 당일은 가능한 모든 연락처를 활용해 경찰을 북문 밖으로 몰아내는 투쟁으로 진행됐고, 이후 아침에 학우들이 등교하는 시점부터 각종 선전과 홍보 활동을 진행했어요. 2차 침탈에 대비해서 북문 쪽에서 계속 농성을 진행하고 추모비를 사수하는 활동에 참여했죠.

박 : 이여대를 부연해서 설명하면 당시 이재문, 여정남 정신을 이어 받는 투쟁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매번 집회 때마다 ‘나오세요’ 하기보단 조직이 필요하다 해서 단과대별로 투쟁 조직을 만들었죠. 우리도 전남대학교 ‘오월대’ 못지 않은 투쟁 조직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죠.

Q. 당시 학생회에서 미리 추모비를 숨겼다고요?

박 : 추모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는 제가 참여를 못했던 것 같아요. 당시 총학생회는 소규모로 운영되고 있었고, 적은 인원으로 한총련 출범식이라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모비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은 학생회 운영 방식을 고려할 때 보안을 위해 집행위원장이나 총학생회장 정도 선에서 극비리에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당시 학원 담당 형사 등 우리도 정보를 얻는 여러 루트가 있었는데요. ‘곧 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얼핏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추모비를 자꾸 옮겼고, 그 과정에서 기스가 났던 것 같고, ‘언제까지 이렇게 옮길거냐’는 논의도 했던 것 같아요. 학교 본관과도 그런 문제를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아마 김부총이 당시 부총학생회장이었으니 더 명확히 알 것 같아요.

김 : 박희정이 정확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희정이는 북문을 지키고 있었겠네요. 당연히 희정이가 알 거라 생각했어요. 당시 총학생회 트럭을 항상 희정이가 몰고 다녔거든요. 그 트럭으로 추모비를 옮긴 걸로 기억해요. 아는 사람이 많을 수 없는 게 당시 보안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만 장소와 내용을 알았어요. 89학번 선배 한 분을 포함해 5명 정도로 팀을 꾸렸던 것 같고요. 나중에 듣기론 초반에 차에 숨겼다가, 어느정도 상황이 일단락 된 후에는 지하공간, 창고 등으로 옮겼던 것 같아요. 그 결정으로 당시엔 욕도 많이 먹었어요. 나름 우리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추모비를 그런 식으로 숨기는 게 맞냐는 의견도 있었죠.

박 : 낮엔 학우들이 민주광장에 있으니 설치하고, 저녁에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자고 했던 기억이 나요.

김 : 사건이 일단락이 된 후에 한동안은 낮에 세우고, 밤에는 가져가곤 했어요. 옮기는 팀을 이여대가 중심이 됐던 걸로 기억해요. 이여대에서도 믿을 만한 사람들 중심으로 했어요.

Q. 그 과정에 연행되는 사람이 있었고, 피해도 컸다고요? 2

이 : 당시는 시위에서 화염병이나 쇠파이프, 짱돌을 사용하던 시대였어요. 공권력은 최루탄, 최루액, 백골단 등의 무력을 동원했구요. 어느 시위 현장에서 3,000여개 이상의 화염병이 제작·사용됐다고 누군가의 공소장에 나와 있기도 했어요. 장## 학우(당시 농생대 회장)는 북문 주변 슈퍼에서 빈병을 수거해서 들어오다가 검문에 걸려 연행되기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 기억으로는 새벽에 시작된 투쟁이 다음날까지 격렬하게 진행됐어요.

김 : 포크레인까지 끌고 밀고 들어왔는데 추모비가 없었잖아요. 경찰도 그냥 갈 순 없었겠죠. 그게 결정적이었던 거 같아요. 나중에 전해들었는데요. 원래 계획은 추모비를 빨리 빼앗아 철수하는 거였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없어서 황당했던 거죠. 그대로 가면 정보가 샜으니 문책을 당할 테니 뭐라도 해야 했을 거예요. 성과 차원에서 학생들을 연행했죠. 3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학생회가 평가회의 후 뒷풀이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학생회 간부가 많기도 했거든요. 연행된 학우들은 농생대 학생회장과 출범식 자봉단에 참여했던 1학년 학생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박 : ##이는 모범적인 활동가 후배였어요. ##이하고 농대 2~3명이 그 자리에서 잡혀갔어요.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열 시간 넘도록 투쟁을 했으니, 아마 오후 늦게 잡혀갔을 거예요. @@이도 잡혀갔죠. 얼굴이 기억나요. 우리는 출혈이 너무 크다고 했죠. 그 이후 ##이 어머니께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 가입하시면서 활동 전선에 들어오셨어요.

추모비 때문에 많은 학우가 고생했어요. 다친 애들도 많죠. 저도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구부려지지 않는 부상을 입었어요. 지금도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보면 ‘바로 살아야지’ 생각하게 돼요. 그때는 정말, ‘적들이 무장했으니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한다’는 신조가 있었어요. 말씀드렸듯 민주복현을 지켜온, 내가 대학에 들어온 후 새롭게 알게 된 근현대사의 한 축이 붕괴되는 충격을 받았거든요. 분명 사법살인의 날이라고 국제사회에서도 평가됐는데, 추모하겠다고 후배들이 세운 추모비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건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참담한 심정이었죠. 당시 같이 들어온 포크레인이 추모비가 없으니 철제 안내문을 대신 뽑아 갔어요.

이듬해 4월 9일 다시 추모비 세웠지만 경찰이 침탈
화염병 냄새 끊이지 않던 학교···격렬한 싸움 끝에 학생 연행

Q. 1996년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그해 4월 9일에 추모비가 다시 세워졌어요. 그 당시를 기억하시나요?

이 : 1995년 추모비 침탈 이후로 민주광장에 추모비가 없는 날이 한동안 이어졌어요. 총학생회에선 논쟁이 벌어졌죠. 불필요하게 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으니 추모비 재건립은 잠시 유보하도록 하자는 입장이 있었고, 하루빨리 재건립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죠.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뒤 초반 총학생회 회의 때 제가 결단을 내렸던 것 같아요.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책임지는 사람이 결정해야 된다고 판단했죠. ‘어차피 내가 다 책임지고 구속되고 감옥에 갈테니 걱정말고 재건립하자’고 강하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결정했던 것 같아요.

▲경북대신문 제1169호 1면 (1996.04.08.)

그렇게 의견을 모은 뒤 중앙운영위원회, 전국학생대표자대회(전학대회)에 안건을 상정해서 재건립을 결정했고 1996년 4·9추모제 때 재건립을 했죠. 물론 경찰이 수거하겠다고 해서 밤이 되면 총학생회와 이여대에서 추모비를 트럭에 싣고 학내 곳곳에 밤새 숨긴 뒤 다음날 새벽 학우들이 등교하기 전 다시 민주광장에 두기를 몇 달간 반복했죠. 당시 실무자들이 아주 힘들었을텐데 잘 해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 : 당시 전 학생회 직책을 맡고 있지 않은 일반 학생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잘 몰라요. 재건립 과정에서 학생회 간부들이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죠. 대체로 건립 후 발생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차가운 지하에 추모비를 계속 모실 수 없으니 하루빨리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했죠.

박 : 1996년 저는 대구경북지역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에 있었어요. 추모비 재건립은 경북대 총학생회가 추진한거라 내용을 정확히는 모르고 다만 공유를 받았어요. 4.9 통일열사 가운데 영남대 선배도 있었고, 영남대도 95년 침탈 사건이 있었던 걸로 알아요.

어쟀든 1996년 당시 저는 대경총련에 있었기 때문에 경북대 내부에서 재건립 계획이 있다는 내용을 공유받은 정도였고, 얼마 후 그걸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하양에 있는 지금의 경일대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침탈 소식을 듣고 급히 택시를 타고 왔어요. 아침부터 등교하는 학우들과 같이 투쟁식을 시작했죠. 거기에서 사건이 커졌어요.

Q. 커졌던 그 사건을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김 : 그날도 저는 침탈 당한 후 소식을 들었어요. 1995년 침탈 시도 이후 비상연락망을 구성해서 운영했는데, 그 중 한 명이라 비상연락을 받고 학교에 갔어요. 그전부터 몇 번의 침탈 시도는 있었지만 그날처럼 대대적으로 들어와 추모비를 수거해 간 건 처음이었죠. 추모비가 있던 곳이 파헤쳐져 있는 걸 봤고, 꽤 오래 격렬하게 싸웠는데요. 당시 본부 학생처장이 저를 불러서 ‘총기 문제가 생겼다. 빨리 총기를 경찰에 돌려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이 : 4기 한총련 중앙상임위 회의 때문에 천안 단국대에 있을 때였어요. 한총련 간부가 제게 경찰이 경북대를 침탈했다고 보고했어요. 기습적으로 추모비를 탈취한 거죠. 6월 18일이었어요.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바로 경북대로 복귀해 보니 본관 앞에 경찰 순찰차가 서 있었어요.

당시 7기 대경총련 집행위원장이던 권☆☆ 학우를 경찰이 기습적으로 연행해갔어요. 권 학우는 시위대와 거리를 두고 정리를 하던 중이었거든요. 이여대에서 집행위원장 석방을 위해 여러 방안을 찾다가 경찰 순찰차를 탈취한 거죠. 그땐 연행 학우와 연행 전경을 맞교환하기도 해서, 그런 일의 연장선이었죠. 그런데 권총과 실탄이 순찰차 트렁크에 있었더래요. 그래서 당시 언론이 우리를 권총을 탈취한 무장폭도라고 보도하기도 했어요. 박희정 학우는 저와 같이 순찰차 탈취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수배되고 같이 은신해 있다 검거됐거든요.

박 : 1995년의 충격이 아물지도 않았는데, 경찰이 추모비를 탈취 해가니 얼마나 분노가 끓어요. 그때는 어마어마한 싸움을 했어요. 인문대에선 거의 하루종일 화염병만 만들었을 거예요. 학생회에서 화염병 냄새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죠. 오후에 청소차가 청소를 하고 다시 붙은 기억도 있어요. 정말 많은 최루탄과 화염병, 짱돌이 날아다녔죠. 그러던 차에 권☆☆ 학우가 덜렁 연행 되어버린거죠. 저는 전체적으로 전선을 보면서 지휘하고 있다 연락을 받았어요. ‘집행위원장이 연행됐다.’

당시만 해도 소위 통하는 학원 라인이 있었어요. 대학 본부에서도 북부경찰서에 통하는 라인이 있었고, 총학에서도 통하는 라인이 있었어요. 집행위원장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어요. 집행위원장이 없다고 조직이 안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무조건 빼내야 한다 싶었죠.

처음엔 붙어서 전경을 한 명 잡아오기로 했어요. 안 되면 무전기라도 빼앗아서 맞바꿀 생각이었죠. 그런데 저항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붙지를 못했어요. 그때만 해도 직격탄을 바로 쐈거든요. 모르는 사람은 ‘1996년에 그런 게 있었냐’고 하지만, 실제 전선에 있던 우리는 정말 겁이 났어요. 직격탄이 씽 날아왔고, 전경은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어요. 앞에 보이는 애들은 곤봉을 들었지만, 뒤에 있는 애들은 쇠파이프를 들었어요. 걔들은 방패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도 없었죠. 눈이 터지고 머리가 터지는 건 부지기수였어요.

☆☆이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안 돌려줬어요. 경찰서를 다 불태우겠다는 협박까지 했는데도 안 통했어요. 그러던 차 농장문 쪽에 도로를 막은 경찰차가 있더라고요. 당시 면허가 있는 동주와 몇몇 학우를 추렸어요. ‘1조는 들어가서 옆에 있는 경찰을 제끼고, 동주는 차를 끌고 오자. 나머지는 뒤처리를 하고 같이 동문으로 퇴각하자’고 택(시위 전술)을 짰죠. 이것도 잘 안 됐어요. 경찰차에 순경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통과장이 같이 타고 있었어요. 너무 지체가 되길래 제가 나가보려던 찰나에 학우들이 농장문으로 차를 끌고 왔죠. 이걸 어디에 세울까 고민하다가 본관 앞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 그리 보냈어요.

그리고 협상을 한 거예요. ‘☆☆이를 돌려달라, 경찰차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경찰이 ‘알았다’고 했죠. 그래도 믿을 수 없으니 담보 물건이 있어야겠다 싶어서 경찰차를 뒤졌는데, 트렁크에 권총이 있었어요. ‘이걸 일단 다른 곳으로 옮겨놓자. 경찰이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있으니 최종적으로 이것과 바꾸자’ 싶어서 (권총을) 본관 옆 사범대 건물로 옮겨 놓으라고 했어요. 본관에선 ‘이러면 안 된다’며 난리가 났죠. 우린 ‘학생을 연행해 갔으니 돌려주면 끝낸다’고 경찰과 협상을 했고 금방 서로 돌려줬죠.3

그러고 나서 북문으로 다시 가봤는데 분위기가 쎄하더라고요. 학원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무조건 다 도망가라. 전면 수배령이 떨어질 것 같다’고 했죠. 그날 저녁 바로 들어올 수 있다고 했어요. 총학생회에서 어디로 나갈지 택을 짜고 준비하는데 그날 아홉시 뉴스에서 바로 때리더라고요. 지방도 아니고 전국 방송으로요. 조선일보는 다음날 사설4까지 썼어요. 권총을 탈취한 게 아니고 차 안에 있던 건데, 상황이 심각해진 거죠.

그때 대경총련 의장이던 주형이와 제가 피신했어요. 언제 어디로 나갈지 고민하는데. 다른 간부들이 ‘정문 등 오만 곳이 심상치 않다, 사복 경찰도 많이 깔려 있다’고 하더라고요. 몰래 다른 곳으로 빠져서 경남 하동의 어느 암자에 숨었어요. 며칠 만에 거기서 붙잡혔죠.

지키고자 했던 모두가 ‘살아있는 여정남’
여정남 열사는 ‘내 삶의 무게추, 이정표’
그때 부상당한 ‘엄지손가락’ 보며 열사 정신 떠올려

Q. 당시의 추모비 사수 투쟁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 : ‘여정남’이라는 선배는 우리 세대에게도 역사 속 인물이죠. 사실 새내기들에게는 과 선배, 학생회 간부 같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여정남’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제겐 영문과 회장이었던 김◎◎ 선배가, 인문대의 전설로 남아있는 오♣♣ 선배가, 지금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안영민 선배와 박석준 후배가 바로 여정남입니다. 열사가 남긴 마음이 계속 이어져 90년대 학교에 다니던 후배들에게 대물림되었다고 봐요. 지금도 계속 대물림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은 책과 영화, 문건으로 남아 그것에 대해 토론하면서 진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심장에 각인되는 것이죠.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정남 열사가 제 삶의 방향에 분명한 영향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김 : 1995, 1996년을 그렇게 산 사람들에겐 여정남 열사는 무게추예요. 저는 짐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요. 여정남 선배님처럼 살진 못하겠지만 그 정신은 제 삶에 넘어선 안 될 선을 만들어 줬어요. 이정표가 되는 거예요. 여정남 열사의 추모비를 지키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렇게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선배들, 후배들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여정남 정신을 갖고 살고 있겠죠.

박 : ‘영향을 미쳤다’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은 엄지손가락은 병원에서 절단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의 부상이었어요. 시간이 흘러 지금은 당시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봐요. ‘젊은 시절 선배님들의 뜻대로 살고자,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강하게 떠벌렸던 내가 이래선 되겠냐’는 생각이 들죠. 삶 속에서 젊었던 당시의 생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태극기 집회에 나가지 않고 뉴스를 보며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그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재문, 여정남 선배님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던 민족 복현의 선후배, 동지들을 떠올려요. 죽기 전까진 그 정신이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50년이 지난 오늘날 여정남 열사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요?

이 : 최근 내란에 개입했던 노상원 수첩에 대한 보도를 봤습니다. 4·9열사들은 사형판결 다음 날 사형집행을 당하셨어요. 사법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대법원 재판이라는 형식이라도 지킨 것이었죠. 노상원 수첩에는 유신시대보다 오히려 더 악랄한 독재의 망령이 가득 했습니다. 무차별 연행과 수감, 폭탄을 이용한 사살, 확인 사살, 북한을 이용한 사살 등 영화로 만들어도 지나칠 이런 계획을 2024년에 세웠다는 보도를 보며 ‘현상은 변하지만 본질은 그대로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신독재에 맞서 죽음을 당했던 열사의 정신이 지금 내란 독재에 맞서 싸우는 우리에게 ‘끝을 보기 전에는 방심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듯합니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아마 후배세대가 또 다른 열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대 속에서 여정남 정신은 ‘빛 바래지 않은 횃불’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정남 열사가 적어도 경북대 동문들에게는 체게바라 같은 이미지로 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민주화의 상징으로 오래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 12.3 윤석열 사태를 거치면서 여정남 정신이란 ‘이런 때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맞서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무게추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했어요. 저도 내란 사태가 터지고 곧바로 동성로에 달려갔어요. 자연스럽게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같은 거죠.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에게는 ‘여정남 선배도 하셨는데’ 같은 의미가 있었어요. ‘우리는 뭐 이정도는 하지’ 같은 거죠. 50살이 넘은 지금도 이정도는 하는거죠. 무게추이면서, 짐인거예요.

박 : 여정남, 이재문은 계속 싸워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 ‘암살’ 속 전지현 배우가 한 대사 중 “그래도 알려 줘야죠.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걸”이라는 부분이 있어요. 계속 기억에 남는 대사예요. ‘나는 계속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나’ 돌이켜봤죠.

12.3 윤석열 내란사태에서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나’라는 무기력감도 들었어요. 싸움 속에서 기억되어야 열사의 정신이 제대로 후세에 기억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그저 과거의 위인, 열사에 갇힐 수 밖에 없어요. 열사를 계속해서 현 시대로 끌어내서 때론 따끔하게 혼낼 수 있는 채찍이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알려줄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해요.

이번에 국회 앞에 가보곤 깜짝 놀랐어요. 박근혜 탄핵 집회 때와도 분위기가 너무 달랐어요. 2030 세대가 운동의 모습을 바꾸고 있었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봤어요. 이재문, 여정남 열사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농민전쟁의 시대정신이 국회로 가는 장갑차를 막았고 특전사의 총부리를 맨몸으로 막았다고 생각해요.

여정남50주기행사위원회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1. 이수병 열사 평전, 이수병 열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인 중 한 명으로 경희대를 다니다 제적된 뒤 민주화운동을 벌였고, 38살 젊은 나이에 사형당했다.
  2. “이번 일로 11일 농대 학생회장 장##(농대 농경제92)과 김$$(농대 임학과 95), 이%%(농대 천연섬유동물자원과학과군 95)군이 연행됐으며, 5시 15분에는 농대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정@@(농대 식품공 94)군이 또 다시 연행되기도 했다. 김$$, 이%% 군은 12일 오후 훈방으로 풀려났으나, 장## 군과 이%%(정@@의 오기로 보임) 군은 구속 영장이 청구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대신문>, 1995.5.15
  3. 1996년 6월 19일자 <한겨레>,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보면 당시 상황이 간략히 소개된 단신이 있다. 세 신문사의 보도를 종합하면, 사건은 6월 18일 오후 4시경 발생했다. 농장문 인근에서 교통 통제를 하던 순찰차(대구 1더 8434)에는 이상정 북부경찰서 교통과장이 타고 있었다. 이 과장은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위협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량에 실려 있던 총기는 38구경 리볼버 1정과 실탄 5발. 언론마다 반환까지 소요된 시간이 상이한데, 한겨레는 30분 만에 이재백 북부경찰서장이 권☆☆의 석방을 약속하면서 돌려줬다고 썼지만, 조선일보는 1시간 만에 돌려줬다고 썼다. 동아일보가 좀 더 상세한데, 1시간 만에 차량만 돌려줬고, 권☆☆의 석방을 경찰이 약속한 후 저녁 7시께 권총과 실탄도 반환했다.
  4. “이제 경찰차까지 탈취하나“ <조선일보>, 1996.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