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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도원 52세, 도예종 51세, 송상진 47세, 하재완 44세, 우홍선 44세, 김용원 40세, 이수병 38세, 여정남 30세. 1975년 4월 9일, 선고 하루 만에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뉴스민>은 ‘열사’, ‘희생자’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청년 여정남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의 모교인 경북대학교에서 추모비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벌였던 투쟁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다. 2025년 윤석열 퇴진광장에 선 이들에게는 열사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물었다. 기사는 <뉴스민>이 제작하고 ‘여정남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가 발행한 자료집에도 수록됐다.
1. 대구서 인혁당 사건 50주기 행사 열린다
2. 아들, 삼촌, 선배였던 여정남…그에 대한 기억
여정남은 1944년 5월 7일 대구에서 나고, 1975년 4월 9일 하늘로 돌아갔다. 만 30년. 짧은 인생은 이름처럼 바르고 올곧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키, 매서운 눈빛, 그러면서도 온화한 인품을 공통으로 꼽는다. 하지만 시대가 만든 공포와 왜곡, 여기에 탄압을 피하기 위한 비밀주의가 더해지면서 ‘여정남’이라는 인물은 온전히 기록·기억되지 못한 채 5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의 가족은 엄혹한 세월에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모든 사진을 불태웠다. 오늘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사진은 증명사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유일하게 남은 가족사진에서 그의 얼굴만 뽑아낸 것이다. 가족사진에는 군을 제대한 여정남과 그의 큰 형님네 식구 5명,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있다. 사진 속 꼬마 아이였던 그의 조카, 여상화의 증언이다.
“할머니가 무서워서 삼촌 사진을 다 태웠어요. 삼촌이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있어서 할머니는 그들이 잡혀갈까 무서웠다고 해요. 지금 볼 수 있는 삼촌 사진은 저희 엄마가 갖고 계시던 거예요. 삼촌, 할머니, 우리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삼촌이 군대 다녀와서(1967년 전역) 찍은 사진으로 알고 있어요.”

그를 끝끝내 사형대로 몰아붙인 재판 자료 역시 왜곡이 많다. 사실 관계가 틀린 설명이 반복되고, 그의 증언이라며 기록된 정보도 모진 고문 끝에 나온 것이라 사실 여부를 확증하기 어렵다. 그에게 가해진 고문은 당사자의 증언(항소/상고이유서)이나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이미 확증된 사실로 확인된다.
이처럼 제대로 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노쇠하고 있다. ‘여정남50주기행사위원회’는 그의 서거 50년 만에 1차적으로 간단하게나마 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를 둘러싼 무구한 ‘설’이 많지만 박정희가 그를 사위 삼으려 했다거나,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그가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1
여기에선 신빙성 있는 근거가 확인되는 사실 중심으로 ‘인간 여정남’을 기록한다. 신빙성 있는 근거로는 당시의 재판 자료 및 그와 직접 만난 경험이 있는 동지 및 가족의 증언(1차 사료)과 4·9통일평화재단이 2015년 출판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백서>와 <경북대신문> 등 언론보도, 단행본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2차 사료)를 참고했다.
#인간적인 여정남
여정남은 용기 있고, 흥이 넘치고, 온화하며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그의 가족과 동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그의 조카인 여상화의 증언이다.
“삼촌은 다정다감한 분이었어요. 제가 어릴 때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여름에는 삼촌과 대청마루에서 모기장을 펴놓고 잠을 자곤 했어요. 그러면 새벽에 삼촌이 꽃에 물 주는 소리나 마당을 청소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곤 했죠. 참 부지런하다 싶었고, 꽃에 물 주는 걸 보면서는 참 다감한 분이다 싶었어요. 할머니가 밥상머리에서 아들한테 이런저런 이야길 많이 하기도 했는데요. 한번은 ‘너는 추운데 사준 외투를 어디에다 두고 오느냐’, ‘왜 그렇게 춥게 다니느냐’고 꾸지람을 하셨어요. 알고 보니 길을 가다 추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옷을 막 벗어줬더라고요. 그땐 제가 삼촌을 ‘키다리 아지야(삼촌을 부르는 경상도 방언)’라고 불렀거든요. 한 번은 삼촌이 인혁당 사건이 아닌, 다른 사건으로 재판받는 법정에 간 적이 있는데, 엄마가 ‘상화야, 삼촌 한 번 불러봐’라고 해서 ‘아지야’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 삼촌이 뒤를 돌아보며 씩 웃어주던 모습도 생각나요. 1974년 그해에도 1월경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아버지하고 무언가 심각한 이야길 나눈 거 같았어요. 아버지 표정은 어두운데, 삼촌은 제 머리를 이렇게 쓰다듬어주시면서,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가셨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죠.”

후배 정만기에겐 고마운 기억을 남겨주기도 했다.
“제가 개교기념 행사 때 열린 야구 시합에 단과대학 선수로 나간 적 있어요. 의대생들과 붙는데 그들은 단독 야구팀이 있어서 야구복도 입고 폼도 잡았죠. 걔들 공이 주로 레프트로 가는데 그 공을 잡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제가 나가게 됐죠. 원래 고등학교 때 야구를 좀 했거든요. 떨어지는 공을 잡으러 정신없이 뛰다가 중견수를 박았어요. 그때 이빨 하나가 빠지고 몇 개는 뿌리가 뽑혔어요. 정남이 형이 그걸 보고 있다가 달려왔어요. 우린 감히 생각도 못 했는데 형은 학교 사정을 아니까 총장 차를 불러서 경북대병원에 가서 바로 처치를 했어요. 응급처치를 한 덕분에 뿌리가 뽑힌 부분은 신경이 살 수 있었어요. 밑에 3개, 위에 1개는 그 자리에서 빠져버렸고요. 치료비도 그렇고 저로선 막막한 상황이었죠. 그때 정남이 형이 ‘학교 행사 중 당한 사고이니 학교에서 책임져라’고 나서줬죠. 치료비도 학교에서 다 부담하게 하고, 이빨이 붙기까지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까 16일 동안 입원도 했어요. 자취 중이니 관리가 어려웠거든요. 입원해 있을 때 정남이 형이 병실에 자주 들락거렸어요.” 2
후배 림구호는 막걸리 한 순배 돌리고 나면 타령을 하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이 나, 5월인가 그랬는데 그 양반, 키가 워낙 크거든. 멀대 같은 사람이 눈은 또 굉장히 날카로워. 눈은 군대 갔다 와서 그랬지. 눈은 날카롭고 키는 뻘떡 같이 크고…. 노래는 잘 못해. 술 한잔 먹으면 그래 가지고 노래하라 하면, ‘몽당 빗자루 타령’을 하는데, 이게 이제 빗자루 가지고 왜놈도 술을 매고 양키도 술을 매고 현해탄에 처넣어서 빠뜨리자 하는 그 타령을 했다고.”

#타협을 모르는 투쟁가, 여정남
조카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후배의 어려움을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하며, 술 한 잔에 타령 한 곡조 뽑아내는 인간적인 그였지만, 투쟁가로서는 타협을 몰랐다. 조카 여상화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삼촌이 여러 번 구속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럴 땐 우리 아버지가 주로 면회를 가셨는데, 공안당국으로부터 ‘우리가 유학을 보내 줄 테니 설득시켜라’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해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동생이 자꾸 위험한 지경에 처하니까, 형님 입장에서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설득하려고도 했는데 삼촌은 진짜 대나무 같은 분이셨어요. 그땐 고문도 심했잖아요. 아버지가 그 얘길 했을 때 ‘형님, 저한테 이런 이야기 하려면 다음엔 면회 오지도 말라’고 화를 내셨대요. 아버지도 마음이 약한 분이라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대요.”
후배 이현세는 열성적인 그의 투쟁심 때문에 매번 전하지 못할 졸업 선물을 샀던 기억도 또렷하다. 여정남은 1962년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1964년 한일협정반대 투쟁에 나서면서 조건부 퇴학 처분을 받았고, 끝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이후 재심 절차를 통해 명예회복이 이뤄졌고, 2008년 2월에 와서야 명예졸업했다.
“여정남 선배는 리더인데, 공개 조직이 아닌 반공개 조직 뒤에 숨어서 주로 지도하고, 여러 방향을 제시하곤 했어. 여정남 선배는 제대 후에 ‘정사회’에 들어와서 대선배로서 리드해 나갔어. 최고 성과는 1969년도 3선 개헌 반대 투쟁이었지.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투쟁을 했어. 그 양반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는데 학생운동이 선봉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같은 걸 갖고 있었어. 그래서 여정남 선배는 교양 학점 하나를 남겨 두고 계속 졸업을 안 했어, 독어교양학부, 제2외국어 학점을 안 땄지. 학생운동 하려고. 학과에선 골치 아프니까 빨리 내보려고, 교수님들 찾아가 설득했는데 학생이 말을 안 들었어. 교수들끼리는 학점을 줘서 졸업시켜야 안 되겠느냐고 했는데, 정작 여정남 선배가 ‘그렇게는 싫다, 나는 정식으로 시험 봐서 학점 따서 졸업하겠다’고 하니까. 해당 교수도 출석 안 하면 점수 못 준다면서 버텼는데 선배는 선배대로 ‘나도 안 줘도 좋다. 출석도 안 하는 학생에게 어떻게 학점을 주느냐’면서 버틴거지. 우리는 매년 졸업 선물 준비했다가 공쳤어. 독일제 파카 만년필을 준비했는데, 나중엔 결국 졸업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그냥 드린 것 같아.”
그가 졸업을 마다하고 학생운동을 지킨 탓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경북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주요한 학생운동 뒤에는 그의 그림자가 크든 작든 어른거리곤 했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에서도 그는 배후에서 경북대 학생운동의 투쟁을 지원했다. 경북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후에 남민전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기도 한 안재구 교수는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를 통해 당시 그의 열성적인 투쟁심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경북대학교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은 격렬했습니다. 그 기간도 5월부터 8월까지 무려 4개월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기나긴 투쟁으로 총학생회도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회장은 물론 노출된 핵심들도 많이 제적됐습니다. 조직을 재정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또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역량이 모자랄 때는 시위를 조직해도 시위 군중이 많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가 역량이 약해졌다고 보고 맹렬하게 탄압을 가해 옵니다. 조직력이 약할 때 받는 맹렬한 탄압은 가히 치명적입니다. 나는 여정남 군을 만나 조직정비를 위하여 한동안 시위를 중단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정열에 넘치던 여정남 군은 시위를 중지한다는 것은 패배라면서 계속 밀어붙이기를 주장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투쟁을 하면 이쪽의 희생이 많아지고 핵심이 위태로워진다’며 다시 한번 간곡하게 경고를 했습니다. 여정남 군은 그런 나에게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여정남이 나에게 혈육과도 같은 친밀함을 나타낼 때는 항상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나는 자연히 ‘하대’를 합니다. ‘형님, 이미 우리는 당할 만큼 당했습니다. 총학생회장도 제적됐고, 그런데 저는 아직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아직 남아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야 있겠습니까?’, ‘나는 동의 못 하겠네. 자네는 제적이 아니라 잡혀가는 거야. 잡혀가면 병신이 되거나 죽어!’, ‘희생 없는 투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잡혀갈 걱정부터 하면서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저항은 계속되었고 그는 마침내 잡혀갔습니다.”
3선 개헌 반대 투쟁 과정에서 여정남과 좀 더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후배 림구호는 그의 물러설 줄 모르는 투쟁심 때문에 대립을 하게 되는 일도 겪었다고 소회한다.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사회의 투쟁이 격렬하게 이어지던 1973년의 일이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가 10.2 데모를 했고, 이후 11월 5일 경북대학교 데모가 있었거든. 그게 대성공을 했어. 10.2 데모는 신문에 안 실렸는데 경북대 데모는 도청까지 뚫고 나가는 바람에 전국 신문에 다 실렸어. 이게 기폭제가 돼서 12월 초까지 전국적으로 불이 붙어가. 그때 정남이 형과 내가 충돌했어. 11월 5일 데모를 두고 정남이 형은 ‘총력 투쟁하자’고 얘기했고, 나는 ‘안 된다. 이거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우리 운동 조직이 아니다. 최소 4개로 나눠서 1팀, 2팀, 3팀은 투입을 하고 마지막 임규영을 중심으로 한 마지막 팀은 끝내 투입을 안 하고 학내에 보존해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조직을 꾸려 나갈 수가 있다’고 했어. 그 양반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논쟁을 했어.”
그의 투쟁심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1992년 4월 13일 자 <경북대신문>을 보면, 후배 임규영의 아쉬움 가득한 회고가 확인된다. 그는 “여정남 선배는 학생운동가로서 능력이 탁월했다”고 말했고, “당시 3선 개헌 반대 투쟁 때에는 매일 천여 명 넘는 학생을 모아 격렬한 시위를 벌여나갔는데 그 당시 정말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도 전했다. <경북대신문>은 “그의 헌신성에 대해 들려오는 일화는 많다. 자금이 필요해서 자신의 등록금을 바치는 것은 예사였다. 심지어 아버님 따라서 절에 가서는 부처님 밑에 초를 팔아 썼으며, 집에 골동품이 있으면 팔아서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부연했다.
그의 헌신적인 투쟁은 군 제대 후 본격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1967년 군을 전역한 후 1968년부터 경북대 학생서클 ‘정사회’를 중심으로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진행했고, 1970년부터는 ‘정진회’를 통해 ‘정진회 필화 사건’의 한복판에 들어간다.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에는 대구에서 불교 학생회가 주관하는 전태일 추도대회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베일에 싸인 여정남
하지만 그의 투쟁은 대부분 사건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베일에 싸여 있는 게 많다. 그의 동지들이 그의 역할론을 두고 조금씩 이견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학생운동은 조직 보위와 구성원 보호를 위해 비합(비합법) 조직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투쟁은 개별 성원을 1대 1로 지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 탓에 같은 시각, 같은 목적으로 투쟁에 나선 사람끼리도 여정남의 역할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모르는 이도 있게 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정진회 필화 사건이다. 1971년 경북대 학생서클 ‘정진회’를 중심으로 4.19 민주혁명 11주년 기념 전국대학생 서클 대항 학술토론대회가 준비됐다. 이때 경북대 정진회는 ‘반독재구국선언문’을 발표해 공안당국을 발칵 뒤집어지게 만들었고, 토론대회는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문제는 이 ‘반독재구국선언문을 쓴 사람’이었다. 공안당국은 선언문을 쓴 사람, 즉 배후를 밝히라며 잡아간 이들을 고문했다.
이를 두고, 여정남의 지근거리에서 토론대회 준비를 지켜본 이들은 여정남이 쓴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몇 년 후 벌어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 과정에서 확인되는 증언과 개별인들의 추론이 더해지면서는 여정남이 아닌 제3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특히 이와 같은 선언문은 이전에도 몇 차례 더 발표된 바 있는데, 해당 선언문이 공개되는 과정에도 여정남이 관여한 사실은 확인이 되지만 그것을 쓴 것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우선 동지들의 증언을 살펴보자. 당시 선언문 준비가 이뤄지던 아지트, 경북대 정문 인근 대일여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이현세의 설명이다.
“여러 설이 많아요. 행사를 위해 대일여관에서 정만기는 거의 숙식을 하다시피 했고, 나도 거의 출근했어요. 나는 당시 정진회 편집부장을 했는데, 유인물도 내 손에서 다 나갔어요. 그런데 반독재구국선언문은 여정남 선배가 대일여관에서 뭔가를 쓰고 있었고, 그걸 우리가 봤던 것 같아요. 제일 마지막 나올 때쯤 되어서야 대충 우리도 봤어요. 그걸 ‘여정남 선배가 썼네, 아니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알기론 최종적으로 기초는 여정남 선배가 잡았어요. 문구를 고치거나 하는 건, 당시 매일신문 기자였던 김성희 선배에게, 필력이 좋았거든, 보여주기도 한 거 같은데. 기본적으로 쓴 건 여정남 선배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외부에서 인혁당 선배님 중 누군가가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직도 정확한 판정은 안 났어요. 나는 영원히 안 날 거라고 봐요.”

대일여관에서 숙식을 했다는 정만기 역시 유사한 증언을 남겼다.
“원래 이거(선언문)는 정남이 형이 우리하고 같이 대일여관에 있으면서 초안을 잡았는데. 잡고 있는 걸 우리가 한 번 봤던가? 그전에도 숱하게 나온 성명서 문안이 사실 한 아름될 정도로 이렇게 많았는데 그걸 거의 정남이형이 다 쓴 걸로 우리는 (알아요). 직접 옆에서 초안을 잡는 것도 봤고. 나중에 보니까 이 선언문이 인혁당 사건에서 서도원 선생님이 썼다고 하고, 정남이 형은 서도원 선생님이 썼다고 (증언)하고, 서도원 선생은 자기는 죽어도 안 썼다고 하는 논란이 나오는데 그거는 뒤에 얘기하기로 하고.
(정진회 필화사건으로) 잡혔더니 K2 보안대로 끌고 가더라고. 들어가니 얘네들이 다짜고짜 물어보지도 않고 다섯, 여섯 놈이 보안대 사무실에 넣고 집단 폭행을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러냐고 하니까 이 선언문에 빨간줄을 그어놓고 딱딱딱 이러면서 ‘누가 썼냐’ 하더라고. 난 모르겠다고 딱 잡아뗐지. 잡아떼니까 ‘맛 좀 봐라’ 하고 때렸어. ‘실제로 난 모른다’, ‘너희 집에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고, 먹고 자고, 행사까지 했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애들이 오면 접대 하고 밥 먹고 잠잘 수 있게 하느라 이게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우리 회에서 나온 거냐?’ 오히려 내가 그 정도로 오리발을 내미니까, 좀 있으니 옆방에서 현세가 나오더라고.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현세가 잡혀갔다가 나오고 좀 있다 보니 정욱표도 보이고 그 이튿날 보니 정남이 형도 보이더라고, 이튿날 임마들이 정남이 형 쪽으로 연결을 지으려고 ‘여정남이가 쓴 거지?’ 물었어. 우리는 보호해야 되니까 ‘정남이 형이 쓴 거 아니다. 나는 모른다’···‘저 형이 이만한 걸 못 쓴다’고 하다가 정남이 형이 ‘썼다’고 하니 우리도 ‘썼다’고 했지.
그때부터 얘네들이 정남이 형한테 고문을 가하면서 ‘네가 이걸 쓴 게 아니다. 배후를 대라’고 했어요. 우리는 정남이 형이 이 글 초안을 잡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썼다’는 쪽으로 자꾸 진술을 하게 되는데, 얘들은 ‘아니’라는 쪽으로 유도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남이 형이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초안을 쓰는 것까지 봤다’라는 쪽으로 진술하게 된 거지요.“ 3
정만기 설명처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이 선언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과 여정남을 엮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된 셈이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여정남은 선언문을 쓴 이가 서도원이라고 했지만, 서도원은 마지막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백서>는 당시 고문 정황과 당사자들의 항거 행위 부인 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선언문의 작성자를 서도원으로 추정했다. 사유는 아래와 같다.
먼저 서도원은 1971년 1월경 전태일 추도사를 쓴 사실은 인정했지만, 같은 해 4월경 발생한 ‘정진회 필화 사건’의 선언문 작성은 부인했다. 항소이유서를 통해 서도원은 “5항의 1971.4.15경 피고인 자택에서 하재완의 부탁을 받고 경북대학생 써클인 ‘정진회’ 주최 학술토론대회 때 발표할 반독재구국선언문의 초안을 작성 제공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1973년 11월 경북대 유신 반대 데모에서 사용된 선언문 작성도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항소이유서에서 “13항의 경북대학에서 유신헌법 반대하는 데모를 하는데 사용할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주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며 그런 부탁을 받은 바도 없습니다”고 했다.
서도원을 가장 가깝게 대면한 사람 중의 하나인 림구호(서도원의 사위)는 2005년 7월 두 차례 증언을 통해 “1973년 11월(유신 반대 투쟁) 선언문은 서도원 선생이 초안, 하재완에게 전달, 여정남이 최종 완성한 것입니다. 하재완 선생이 관여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라고 증언했고, 정화영은 2004년 12월 “1973년도 11월 5일 경북대학교에 반독재구국선언이란 선언문을 제가 여정남 선배한테 받았는데 그것을 서도원 씨가 쓴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전창일도 2004년 12월 “판결문에 보면 서도원의 경우에는 1973년 11월 초순경 반독재민주선언 초안문을 작성하고 뭐 이런 것은 사실인가요?”라는 물음을 받고 “제가 알기로는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다 비공개입니다. 자기 보위를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아주 제한된 사람만 알지요”라고 진술했다.
백서 집필진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서도원 자신이 부인하고 있음에도 서도원을 가장 가깝게 대면한 사람들, 선언문 관련 사건 관련자 다수의 진술 및 증언에 의하여 확인되는 사실”이라면서 서도원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집필진은 서도원의 부인 이유를 “당시 고문 조작으로 지속된 수사 과정의 성격, 재판 과정의 분위기와 관련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항거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야기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짚었다.
백서 집필진의 결론은 결론대로 의미를 갖지만, 여전히 이현세, 정만기 등 여정남의 주변인들 증언이 남아 있고, 정신과 육체를 황폐화시키는 고문 끝에 나온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 등이 선언문의 실제 작성자를 특정하는 데 어려움을 남긴다.

이현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 목격한 여정남의 모습을 통해 혹독한 고문의 무서움을 증언했다. 군 복무 중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구속돼 재판을 받던 그는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여정남, 하재완 두 사람을 증인으로 신청해서 법정에서 대면한 적이 있다. 1975년 2월 말경으로 사형 집행이 이뤄지기 약 한 달 전이다.
“나는 이제 군인이니까 육군 본부 유치장에서 육군 교도소 쪽으로 이동해서 이등병으로 강등되어서 제대를 하면서 대전 교도소로 옮겨졌거든. 그래서 내가 재판이 좀 늦었어. 민청학련 사건은 앞서가고, 나 같은 경우는 육군 법원에서 재판을 1심, 2심까지 봤거든. 2심에서 하재완, 여정남을 증인으로 신청했어. 억울해서, 나는 그걸(하재완이 수록한 북한 관련 문건) 보고 이야기한 적도 없고, 찬양한 적이 없는데, 왜 당신은 나를 끌어들인 거냐고, 묻고 싶은 거라. 두 분을 증인으로 신청했는데, 당시가 1975년 2월 말경이었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었지. 두 분 다 오셨어. 이 양반들이 조사받은 지는 1년이 넘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두 사람 다, 사람이 눈빛이 가버렸더라. 그 초롱초롱하던 눈빛이, 여정남 선배는 눈빛이 매서웠는데, 눈이 완전히 풀렸더라. 정신을 놓은 사람들처럼, 그런 상태였어. 혹독한 고문이 있었던 거야. 그 광경을 보는데 내가 눈물이 얼마나 나는지.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나는 인혁당 쪽에서도 간단한 쪽이었기 때문에, 좀 맞고, ‘배후를 대라’는 말을 들으며 물고문, 전기고문도 받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런데 이 양반들은 사람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어. 눈물이 얼마나 나는지, 눈물만 흘리다가, 재판관이 뭐 물어볼 거 없느냐고 하는데, 물어보고 자시고, 아무것도 생각도 안 나더라.”
#여정남의 마지막, 그리고 다시 시작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공안당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여정남은 죽음을 직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인태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1심 판결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서 여정남으로부터 “아무래도 박정희가 몇 명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라고 하는 말을 들었고, 이철도 서울구치소에서 “박정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여정남이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75년 4월 9일 새벽,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고 만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박정희 정권은 여정남을 비롯한 8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박정희는 이미 그해 2월 이들을 죽일 작정을 했던 걸로 전해진다. 1975년 2월 21일 문공부 순시에서 박정희는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가 되고, 내란음모죄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하며 격노했다. 특정해서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을 언급한 건 아니지만, 이 무렵 그가 이토록 격노할 만한 일은 그것 외에는 달리 없었다.
정말 내란을 일으킨 자가,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향해 ‘내란’을 운운하며 목숨까지 앗아간 사건. 그로부터 50년 뒤 또 한 번의 데자뷔가 일어날 뻔 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건, 50년 전 여정남의 희생 위에 켜켜이 쌓아 올려진 민주주의의 힘이다. 그는 흙으로 돌아갔으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여정남50주기행사위원회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

- 박정희가 그를 사위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는 ‘여원 1988’이라는 여성 잡지를 통해 유포된 것으로 보이지만, 명확한 근거 없이 ‘카더라’ 식의 흥미유발에 불과했고, ‘영광입니다’는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병곤이 한 말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는데, 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2.2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2.2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이 숙제로 남았다.
- 정만기 구술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7.8)
- 정만기 구술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