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세’로 시작하는 권력의 역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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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은 현대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반인권적 처벌이다. 사지를 떼어 내는 처벌인만큼 잔인하기 이를 데 없고, 그래서 그만큼 경고 의미가 강한 처벌이다. 1787년 음력 1월 25일, 과거 시험을 위해 용인에서 올라온 시골 선비 이광운李匡運은 불과 얼마 전까지 상상도 못했을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유생들처럼 나라와 왕에 대한 충정이 깊었다. 과거 시험을 위해 한양에 오면서, 굳이 상소 한 편을 작성했던 이유다. 즉위한 지 11년 된 왕에게 후사가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 나라의 장래가 불분명하다는 생각은 이광운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얻었던 세자가 얼마 전 홍역으로 사망하면서, 이는 나라 전체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세자를 빨리 세워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라는 내용을 상소에 담은 이유다.

그러나 시골 선비 이광운은 당시 조정 상황을 전혀 몰랐던, 말 그대로 충정만 가진 선비였다. 그는 얼마 전 왕이 신임했던 신하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고, 종친인 상계군常溪君 이담을 누이 동생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이으려 했던 일로 역적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게다가 이 일로 무관 구선복具善復과 그의 조카 구명선具明謙은 홍국영과 함께 군사를 동원했다는 혐의을 받아 멸문지화를 입은 사실도 시골 선비는 알지 못했던 듯했다.

당시 조정 분위기는 왕의 후사를 논하는 것 자체로 역모 혐의를 받을 정도였다. 이를 알지 못했던 순진한 시골 선비는 상소문의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물어 보기 위해 먼 친척뻘인 판의금부사 김종정金鍾正에게 상소문을 보여주려 했다. 김종정은 왕에게 올릴 상소문을 자신이 먼저 읽을 수 없다면서 거부했지만, 이광운의 부탁을 듣는 과정에서 그가 작성한 상소 내용이 세자를 정하는 문제임을 알게 됐다.

역모는 도모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듣는 것도 위험했다. 왕의 후사 문제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종정은 이광정의 상소 내용을 듣고, 자신의 안위와 친척 이광정의 안위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이러는 사이, 이광운은 자신의 사촌 한채에게도 자신이 써온 상소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사촌은 화들짝 놀랐고, 이 상소는 멸문지화를 입을 수 있는 내용임을 알려 주었다. 그제서야 이광운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상소를 불태웠지만, 때는 늦었다. 김종성이 자신만의 안위를 지키기로 결정하면서, 이광운의 상소 내용을 왕에게 고했기 때문이다.

빨리 세자를 세우라고 주장했던 구선복을 역도로 몰아 옥사를 진행했던 정조는 매우 예민했다. 또 다시 세자를 세우라는 상소가 올라오려 했다는 사실을 들은 정조는 이 일 역시 구선복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 선비가 홀로 이처럼 터무니없는 상소를 올릴 일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광운은 역모를 심리하는 국청에 세웠다. 이광운 스스로도 조정 상황을 듣고 급히 불태운 상소의 파장이 이렇게 클 줄 상상도 못했을 터였다.

홍국영과 구선복의 처벌을 통해, 아직 권력이 자기에게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던 정조는 미래 권력을 근거로 자신의 입지를 흔드는 어떤 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광운과 함께 한 잔당들까지 모두 잡아들일 요량으로 모질게 심문한 이유다. 세자를 언급한 순간 이미 사선을 넘었던 이광운은 역모를 심리하는 국청의 잔혹함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모진 고문의 회오리 속에서 그의 상소가 시골 선비의 충정에서 나온 일이었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매질은 없는 죄도 만들기 마련이다. 거듭된 공초 끝에 이광운은 심문자의 입맛에 맞는 답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상소에서 ‘세자를 세워 대통을 이으라’는 말을 과거 시험의 시제로 내달라는 내용을 썼고, 종친 가운데 누구든 일단 후사를 세운 뒤 적통이 태어나면 언제나 교체해도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실토했다. 실제 그러한 내용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조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었다. 구선복과 같은 논리로 처벌할 수 있는 진술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역모의 주범은 거혈형이나 능지처참이니, 그는 죽어도 자기 신체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었다. 그의 충정에 찬 행동으로 그의 아들까지 참형을 당했고, 그의 고향 수원부도 고을의 격이 ‘부’에서 ‘현’으로 격하되었다. 미래 권력의 여부가 오직 현재 권력에게만 있었던 시대, 그래서 권력은 혈연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부여되던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민주주의 체계라고 일컬어지는 현재 우리 사회는 이러한 점에서 조선과 완전히 다르다. 미래 권력을 말할 수 있고, 현재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기간만큼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도 국민이 선출한 또 다른 권력의 견제도 받으면서 말이다. 이 때문에 정조에게는 미래 권력을 의미하는 ‘세자’의 ‘세’자도 꺼내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는 미래 권력을 국민이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세습’의 ‘세’자도 꺼낼 수 없어야 한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