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들] ㉔ 낮은 곳을 위한 문파, ‘하오문’의 깃발 아래에서

09:06
Voiced by Amazon Polly

[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김민지(26) 씨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여성 노동자다. 서빙 등 서비스직에 종사하다가 최근 제빵사로 취직됐다. 그의 닉네임은 ‘하오문주대리’. 매주 토요일 대구시민시국대회에 들고 나오는 깃발에도 적혀 있다.

“좋아하는 무협소설 주인공이 만든 단체 이름이에요. 주인공이 원래 테이블을 닦고 접시를 나르는 서비스직에 종사했거든요. 그러다가 환생한 뒤 자신과 같은 고충을 겪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아 ‘하오문’, 아래하(下)와 더러울오(汚) 자를 써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을 위한 문파를 만들어요. 그들을 대리한다는 뜻에서 저도 ‘하오문주대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어요.”

▲15일 집회에 참석한 민지 씨. 광화문 집회에 참석한 12월 7일을 제외하고 매주 토요일 대구시민시국대회에 깃발을 들고 나왔다.

12월 3일 비상계엄이 터졌을 때 민지 씨는 무섭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12월 7일,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나 하나라도 머릿수를 보태야겠다 싶었다. 깃발을 제작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닉네임인 ‘하오문주대리’를 적은 깃발을 열심히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이기 위함이었다. 대구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보니 ‘내가 손을 보탤 곳은 여기다’ 싶었다.

“매주 나오다 보니 아는 얼굴들이 생겼어요. 지역 집회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비면 티가 나거든요. 깃발을 들고 나오면 좀 더 눈에 잘 띄니 책임감이 생겨 버렸어요. 쭉 혼자 집회에 나왔는데 점점 아는 얼굴이 늘면서 눈인사를 나누고 있어요. 깃발뿐만 아니라 응원봉, 개인피켓을 갖고 꾸준히 나오는 이들이 있어요. 그들과 끝난 뒤 같이 밥을 먹기도 했고 한국옵티칼 고공농성장, 태경산업 천막농성장 앞에서 열린 집회도 참석했어요. 내가 집회에 못 나오는 날이 있더라도 이 친구들이 대신 있어 주겠지’ 싶어서 마음이 든든해요.”

▲2월 15일 민주노총 대구본부 투쟁선포식에 참석해 발언한 김민지 씨. 민지 씨는 “며 “앞으로 노동자가 마주하게 될 부당한 대우 앞에 맞설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민지 씨는 스스로를 ‘노동자 오타쿠’라고 소개했다. “손으로 하는 일도 좋아하고 사람 대하는 일도 좋아하는 제빵사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노동이 반대로 삶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라고 이어진 말은 짧은 인터뷰에 다 담을 수 없는, 그가 일터에서 겪어 온 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쪽 업계가 그래요. 대부분 스케줄로 돌아가요. ‘월 8회 휴무’라 정해놓고 사장이 짠 스케줄대로 쉬거나, 날을 정해서 다른 직원들과 돌아가면서 쉬어요. 최근 옮긴 직장에서 처음 연차를 받아 봤어요. 계약서를 안 쓰거나 주휴수당을 안 주는 곳도 많으니 대구에서 일하는 제 또래를 보면 ‘너도 힘들게 살았구나’라는 생각부터 들죠. 이런 경험들이 제가 광장에 나오는 동력인 것 같아요.”

특히 민지 씨는 대구의 여성들을 보며 복잡다단한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계집은 하면 안 돼’, ‘여자가 어디 나서나?’ 같은 말을 듣다 보니 드세고 목소리도 큰 어른으로 자랐는데, 모든 여성이 덜 기죽고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대구를 함께 상상하고 싶다.

이미 그는 윤석열 퇴진 이후 펼쳐질 다음 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행동하고 있다. 지난 1월 24일 열린 시민 집담회 ‘탄핵파티 에피소드1, 100개의 응원봉, 100개의 이야기’에 참석했고 다음달 3월 3일 출범식을 앞둔 모임 ‘민주노총 대구본부 달곰이지부’에도 예비조합원으로 등록해 둔 상태다.

“연대로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집담회에 참석해 광장보다 깊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탄핵 이후의 세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어요. ‘여성, 노동자’라는 것 말곤 적극적으로 펼칠 의제나 결의가 없다고 생각해 달곰이지부에 가입하는 걸 망설였는데 누구든 참여 가능하다고 들어 용기를 냈죠. 내 경험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대처했어’라며 나누고 싶어요. 그런 연대의 경험을 하고 싶어요.”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