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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무도한 자에게 권력을 내어주었을 때 국가시스템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처절한 경험을 하며,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응원봉처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뉴스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든 그들, ‘민주주의자’들을 만나고, 기록한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 후 대구에선 매주 토요일 동성로 CGV한일극장 앞에 무대가 세워지고 있다. 광장을 연 것은 시민이지만 무대를 세우는 건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대구시국회의)다. 대구시국회의에는 시민사회, 민주노총 등 90여 개 단체가 함께 한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매주 토요일 대구에서 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전국 곳곳에서 세워진 무대의 주요 키워드는 ‘여성’이다. 사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전부터 여성단체들은 몰아치는 백래시(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반격)에 대응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초부터 안티 페미니즘 정치를 펼쳤고, 사실상 페미니즘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때문에 광장에서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많은 걸 시사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다음 지평이 열릴 거란 기대도 나온다. 광화문, 남태령, 한강진, 그리고 전국의 집회에서 응원봉을 든 여성들은 퇴진을 넘어서 페미니즘, 인권, 평등, 연대 등 다양한 구호를 외친다.
이 현장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무엇을 느끼고 고민할까. 시국대회 실무진 중에서도 어린 축에 드는 대구여성의전화 활동가 윤수빈(30), 정은혜(27)는 무대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곧 ‘나’라고 느끼기에 한 번 한 번의 집회가 소중하다. 어떤 날은 무대 뒤에서 자유발언 순서를 기다리는 시민의 손을 꼭 잡았고, 다른 날엔 무대 위에 올라 사회를 봤던 두 사람과 지난 한 달을 돌아보고 한동안 이어질 집회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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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성단체들은 줄곧 대정부 투쟁을 벌여왔다.
윤수빈(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글자를 SNS에 올렸다. 공약 같지 않은 공약을 내세웠고 당선 됐다. 임기를 시작하고선 여성폭력 방지·피해자 지원 예산을 삭감했고, 그에 따라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전국의 여성단체들은 프로그램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정은혜(정): 예산이 절반 이상 삭감된 바람에 대구여성의전화 부설기관인 쉼터, 상담소도 지난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근무하는 쉼터는 피해자들이 자립을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기관인데, 직업훈련비를 절반 이상 삭감해 버려서 두 명을 겨우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활동가들은 다른 자원을 찾아서 피해자들이 직업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연계하기 위해 발로 뛰었다. 여성가족부 장관이 공석인 데다 정부도 대행체제가 되면서 올해 예산 집행 상황도 불투명하다.
윤: 그뿐만이 아니다. 근절해야 할 5대 폭력 안에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했지만 한편에선 디지털 성범죄 대응TF팀을 해산시켜 버렸다. N번방 사건에 대응하며 열심히 연구, 정책 제안을 했던 기구였다. 그 뒤 딥페이크 성착취 사건이 전국적으로 공론화됐다. 그때 너무 큰 절망감을 느꼈다. 단계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사태를 몰고 온 거란 생각이 들었다.
– 12월 3일 밤을 어떻게 기억하나.
윤: 일찍 자는 편이다. 그날도 10시쯤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에 대구여성의전화가 공들여 준비한 집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쉼터에서 퇴소해 자립 한 분들 중 폭력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가정으로 귀가하는 케이스가 심심찮게 있는데,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중요한 일정인 만큼 일찍 자서 에너지를 충전하려던 참에 갑자기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뉴스를 보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은혜 활동가와 계속 카톡을 나누며 생중계를 봤다. 국회 상황을 확인하는 게 괴로웠지만 보지 않는 게 더 괴로워서 계속 붙잡고 있었다.
정: 친구와 집에 있었다. 동생이 기사를 캡처해 보내며 ‘나라 망함’이라는 코멘트를 덧붙였다. 그때부터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될 때까지 생중계를 틀어놨다. 그날 밤, 여러 상상을 했다. ‘피해자들이 불안해하진 않을까’, ‘시설은 피해자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계엄 상황에서도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두렵고 심란했다.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된 순간 한시름 넘겼다 싶어 눈물도 났다. 다행히 다음날 집담회는 무사히 진행했다.
윤: 역설적이지만 그날의 비상계엄은 소중한 일상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나의 일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계가 갑자기 너무 역으로 돌아간 거다. 잠깐이지만 80년대로 돌아가 당장의 내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지금은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에 합류한 건 언제인가. 단순히 집회에 참석하는 걸 넘어 무대를 꾸리는 데 힘을 보태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윤: 비상계엄 다음날 대구에서도 곧바로 민주노총,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시국회의가 정비되고 상황실이 꾸려졌다. 인력이 워낙 부족하니 시민단체 활동가 중 결합할 수 있는 사람은 함께 해달라는 요청이 왔고, 12월 둘째 주 내가 먼저 합류했다.
연말연초라 일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나선 것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컸다. 2021년 대구여성의전화에 입사하기 전에는 흔히 말하는 ‘운동’, ‘활동’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간혹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했지만 익명의 개인으로서 동참했을 뿐이었다. 이번이 활동가로서 성장할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내 목소리를 낼 힘도 기르고 싶었다.
2019년 박근혜 탄핵 정국과는 달라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집회에 참가하면서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한 혐오가 불편했다. 굳이 희화화하지 않아도 충분히 비판할 지점이 많지 않았나.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에서 나조차도 그걸 지적하는 게 지금 시점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비판들에 동의하지만 그를 향한 여성혐오적 표현엔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단체 활동가로서 이런 지점을 함께 말하고 싶었다.
정: 박근혜 탄핵 당시 나도 대학생이었다. 구호에는 동의하지만 당시엔 집회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2021년부터 대구여성의전화 활동가로 일했고, 주로 쉼터에서 피해자를 만나왔다. 비상계엄 이후 뭐라도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마침 우리 단체 대표님이 시국회의에 합류해 보지 않겠냐 제안하셨다. 이미 윤 국장님이 먼저 합류해 실무를 뛰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윤 국장님과 나는 기획팀에 속해 있다. 월요일에 대표자, 집행위원장 회의를 통해 굵직한 방향이 결정되면 화요일에 기획팀 회의에서 구체적인 실무를 논의한다. 나는 행진 선동팀에도 들어가 있다. 집회와 행진에서 틀 만한 노래를 추천하고 로테이션으로 행진 사회 담당자를 정하고 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정: 행진을 하면서 만난 시민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국민의힘 대구시당까지 행진한 집회였다. 범어동의 고층 필라테스 학원에서 운동하던 시민들이 창문을 열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행진을 하다 보면 길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시민들이 창문으로 대오를 구경하며 응원해 주는 광경을 자주 본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벅차오른다. 연대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어서 그런 것 같다. 덕분에 회차를 거듭할수록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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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집회 시작 전 자리를 잡은 시민들에게 피켓을 나눠주면 주머니에 사탕, 초콜릿 같은 걸 찔러주신다. 개인적으론 콤플렉스이기도 한데 난 친근한 외모를 가졌다. 덕분에 집회 현장의 10대, 20대 여성들이 나를 비교적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행사지원 조끼를 입은 여럿이 동시에 피켓을 나눠주면 일부러 내게 와서 받아 가거나, 궁금한 걸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누군가에겐 집회 공간이 낯설고 무서울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주고 싶다.
어느 날은 집회 후 피켓을 수거 중이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3인데 부모님에게 얘기하지 않고 처음 집회에 나왔다”며 “너무 잘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학생이 ‘나 같다’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여성으로 자라며 얼마나 답답한 게 많았을까.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집회에 나온 게 속 시원한 일이구나’ 싶어 울컥했다. “너무 멋지다. 부모님에게 얘기해야 한다는 불편함은 곧 본인에게 중요하지 않아질 것”이라고 대답해 줬다.
– 아쉬웠던 점도 있을 것 같다.
윤: 과거와 집회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 자유발언을 신청하는 이들 중 10~30대 여성 비중이 매우 높다. 난 시민단체에서 일하기 전에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망설였는데, 이들은 다르다. 무대에 올라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정돈해서 하고 딱 내려온다. ‘이 무대가 자신의 무대라 생각하는구나. 이 공간을 안전하다고 느끼는구나’ 싶다. 이건 집회 문화 곳곳이 개선됐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전체적인 진행 방식이 여전히 일방향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짜인 프로그램대로, 시간 안에 진행해야 한다. 물론 전면적으로 쌍방향 소통을 중심에 두고 진행하긴 어렵지만 어떻게 해야 참가자들이 앉아만 있는 게 아닌, 소통하고 함께 호흡한다는 느낌을 가져갈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플레이리스트를 사전에 추천받고 자유발언 신청을 받는 것도 그런 고민에서 나왔다.
– 여성의 집회 참가 비율이 높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 남녀 성 대결 구도로 가는 건 우려된다.
정: 집회 현장에 여성 비중이 적어도 70%는 된다. 젊은 남성이 없진 않다. 다만 차이라면 여성들은 혼자서도 참석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데, 남성은 혼자는 못 오는 공간이라 생각하는 부분이다. 애인과 오거나 친구들과 온 남성은 종종 봤다. 물론 일반 시민에게 집회라는 공간이 어색하고 어렵기도 하겠지만 ‘어지러운 정국 속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친구들을 데려와서라도 참석할 텐데,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는 (남성이) 훨씬 적은 것 같다.
헌법재판소 폭동에 20·30 남성이 주축이 됐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과격하게 부수고도 당당하게 체포되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며 이전부터 심화되던, 혐오에 기인한 폭력이 파국으로 치닫는 듯해 좌절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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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분위기를 깨야 한다. 여성들 사이에 집회에 나간다는 건 ‘나는 안 가더라도 네가 나가는 건 응원해. 대단해. 고생해’ 정도의 온도로 통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집회에 나간다는 걸 또래 문화에서 어긋나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힙하지 않은 행동인 거다. 물론 참석하는 남성, 발언하는 남성도 많다. 하지만 대오 밖 남성들은 욕설을 뱉고 지나가거나 조롱하는 듯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누군가의 진심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게 편하고 익숙한 거라 본다. 여성폭력의 행태와도 궤를 같이 한다. 디지털 성폭력 범죄로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합성물을 만들 때, 일부는 좋아하는 여성의 사진을 이용한다. 괴롭히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것이다. 늘 반복하는 말이지만 우린 인권과 평등의 관점에서 파이 싸움이 아닌, 연대와 소통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 한 달 반 넘도록 이어진 광장에서 어떤 생각을 했나.
윤: 지난 주말 서부지법과 헌법재판소에서 발생한 난동 사태를 보고 오늘(20일) 사무실에 출근했다. 동료들과 절망적이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눴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 느꼈던 절망감과 비슷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페미니즘이 가시화되던 시기, 다방면의 문제 제기를 통해 사회가 변화했지만 그럼에도 그 여성들이 기존 운동에 합류하지 않으면서 ‘운동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단체들이 의제를 광장에서 꺼내 들었을 때 동료인 여성 시민의 동참이 확대되지 않는 것처럼 느낀 것도 사실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기대만큼의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여성 후보자들은 공천에서 탈락했고, 당선된 여성 국회의원 비중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정치세력화에 실패하고 거대한 백래시가 들어오며 막막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번 윤석열 퇴진 국면에서 깨달았다. 쉽게 실패라고 단언해선 안 됐다. 기존 단체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들도 각자의 이슈로 자신들의 광장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재거나 따지지 않고 목소리 내고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힘에서 기인한 것이다.
-앞으로의 광장에서 대구여성의전화가 갖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윤: 광장에 나온 여성, 청소년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피켓, 깃발로 소통하며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장에 회원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더라도, 캠페인에 서명하다가 ‘아, 그때 여성의전화’라고 기억한다거나 상담이 필요한 시점에 주저하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단체로 기억해 주면 좋겠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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