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파티] ① 응원봉, 우리의 이야기 에피소드1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 주최 시민 집담회
42명 참여···윤석열 탄핵 이후 세계를 나누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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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구성원의 임신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농담처럼 계엄이 선포됐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태어날 조카에게 어떤 미래를 줘야하나 복잡했다.”

“대학원생이다. 계엄 당일날 바빴다. 채점하고, 상담도 있었다. 10시쯤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뉴스가 떴다. 잠이 달아나더라.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계엄을 5, 6학년 때 수업 시간에 배운다. 그건가 했다. 당연히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진짜라니? 내일 학교가 터져 있는 게 아닐까?”

▲23일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는 ‘탄핵파티 에피소드1, 100개의 응원봉, 100개의 이야기’를 개최했다. (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우리’에게 기억된 12.3 윤석열 내란 사태(12.3 내란 사태)다. 20대의 하오문주대리(별명)는 태어날 조카에게 펼쳐질 미래를 걱정했고, 30대 대학원생 하진(별명)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으며, 10대인 감만졍(별명)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현실에 놀라 다음날 학교가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우리’에게 걱정과 우려를 안기고 잠을 앗아간 존재는 당연히 파면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대구에서 탄핵 파티가 열렸다.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는 12.3 내란 사태 후 현재까지 대구에서 광장을 열고, 지켜온 시민들을 만나 윤석열 파면 이후의 세계를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탄핵파티 에피소드1, 100개의 응원봉, 100개의 이야기’다. 23일 저녁 7시 매주 겨울 바람이 살을 에던 광장에서 만나던 우리는 이날 만큼은 따뜻한 실내에서 둘러앉아 목청 높여 부르짖던 구호 대신 너와 나의 이야길 나눴다.

▲탄핵파티에 참여한 우리들이 진행자의 물음에 즐겁게 반응하고 있다. (사진=정용태 기자)

이정미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 상임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저한테는 탄핵파티라는 용어가 생소한 것 같다. 그래서 용어 자체를 계속 곱씹어 보면서 엄청난 해학성을 느꼈다. 사실 탄핵 그 자체는 좋은 게 아니”라며 “우리나라 대통령을 탄핵해야 된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고, 그런 우울한 세상 앞에서 우리가 탄핵파티를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있고, 저력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사실 저는 요즘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시민들은 왜 이렇게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살아야 되는가, 정치적으로 한시라도 편한 날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편하지가 않다”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윤석열 탄핵은 우리의 다른 시작이다. 윤석열 탄핵은 단순히 윤석열을 탄핵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굳어진 권력 카르텔을 탄핵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탄핵되어야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탄핵파티에 참석한 우리 중 1명이 마련된 포토존을 기념으로 찍고 있다. (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인사말 이후 시작된 탄핵파티에는 하오문주대리, 하진, 감만졍을 비롯해 우리들 42명이 참석했다. 우리는 7개 모둠으로 나뉘어져 ‘나를 광장으로 불러낸 것’, ‘윤석열 탄핵 이후 우리 사회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긍정적/부정적)’에 대해서 이야길 나누었다.

우리는 탄핵파티 참석 전 미리 써낸 참가신청서를 통해서도 ‘시국대회 참여 계기’, ‘시국대회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 ‘나에게 윤석열이란?’이란 물음을 받고 답했다.

사전 질문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계엄령(11회)’으로 불안(3회)해진 마음을 치유하고, 윤석열(4회)에 의해 위기를 맞은 ‘민주주의(4회)’, ‘나라(3회)’를 지키기 위해 ‘시국대회(3회)’에 ‘참여(10회)’하게 됐다.

“서울에 가기는 어렵던 찰나 트위터를 통해 대구에서도 집회/시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12.3 이후 첫 토요일에 바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스스로 부끄러울 것 같았습니다.” 김세윤(20대)

▲사전 질문을 분석한 결과가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알고, 불안함 속에 머물지 않고 참여하는 시민이다. 우리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은 존재이기도 한 우리는 시민이다. (사진=민주노총 대구본부)

그곳에서 우리는 ‘시민(11회)’으로서 나와 너를 마음에 담았다. 함께 ‘연대(5회)’하며 ‘동지(4회)’가 되었고, ‘탄핵(6회)’이 가결되는 것에 기뻐했고, ‘국민의힘(5회)’을 향해 ‘행진(4회)’하며 휘날리는 ‘깃발(4회)‘을 볼 때 설레었다.

“환호하는 대구시민을 만났을 때와, 무지개 깃발 아래서 처음 본 사람들과 동지가 되었을 때,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에서 해돋이를 같이 봤던 동지들과 구미옵티컬 니토덴코 고공농성장에서 본 동지들을 대구 집회에서 또 보았을 때였습니다. 저도 노조의 활동에 참여해 본 것이 12.3 이후 처음이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연대를 할 수 있는 장이 점점 더 열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성서공단의 이주노동자와도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것 같고요.” 보옥(별명, 30대)

이 모든 것을 이끌어낸 윤석열은 ‘내란(5회)’을 일으킨 우두머리, 파시스트(4회)로, ‘독재자(4회)’이자 ‘배신자(4회)’로 ‘역사(5회)’에 기록될 것이다. 더불어 그는 “체포, 탄핵 인용, 사형 선고 외에 그 어떤 소식이나 주장도 그만 보고 싶은 사람”[팡자(별명, 20대)]이고, “보수주의의 배신자, 대구의 배신자, 역사의 배신자, 천하의 독재자”(이경규, 40대)이며, “빗자루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먼짓덩어리”[잼니(별명, 30대)]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그냥, “빌어먹을 ##”(이주희, 10대)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