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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1991)는 첫 시집 <목숨>(수문관, 1953)에서부터 열한 번째 시집 <바람 세례>(문학세계사, 1988)까지의 시 세계를 총괄한 김남조(1927~2023)의 시선집이다.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시 규슈(九州)여고와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시인의 대표시는 뭐니뭐니해도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목숨’이다. 전문을 보자.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 불붙은 서울에서 /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 가슴 틀어박고 매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 그래도 죽지만 않는 / 그러한 목숨을 갖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이름에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이 시가 수록되지 않았다.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목숨>은 한국동란이 이제 막 끝난 때에 나온 시집으로 여기 실린 시들은 전쟁이라는 참혹함과 불확실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서글픔과 신에의 간구로 그득하다. 특히 한국동란을 주제로 삼았으면서도 전혀 이념을 논하지 않는 이 시는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멍들고 찢어진 당대의 독자 대중의 면전에,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었던 벌거벗은 개인들의 “가랑잎” 같은 죽음과 아무 “욕심없는 기도”만을 내어놓았다. 이 시의 전면에는 시인이 시가 지속해서 귀의하게 되는 가톨리시즘의 전조가 보이지만, 이 시가 나왔던 당시에는 전후에 유행했던 실존주의 풍조가 살짝 섞여 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선택(자유)이 본질에 우선한다지만, 실존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몸담은 상황이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목숨’은 역사적인 시다. 그러나 시인의 시로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알려진 것은 1964년 2월 숙명여자대학교의 문학 동인지 <청파문학> 4호에 발표된 뒤, 여섯 번째 시집 <겨울바다>(상아출판사, 1967)의 표제작으로 사용된 ‘겨울바다’이다. 전문을 보자.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 미지의 새 /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 매운 해풍에 /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 허무의 / 불 /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 나를 가르치는 건 / 언제나 /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남은 날은 / 적지만 / 기도를 끝낸 다음 /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 적지만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 인고(忍苦)의 물이 /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전쟁이 끝 난지는 꽤 되었지만 이 시 역시 상흔을 앓은 당시의 독자 대중에게 이념 대신 “시간”, “기도”, “인고”를 치유약으로 제시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실존을 내세우기보다. 신에게 자신의 실존을 양보한다. 이 겸허함은 열아홉 권이나 되는 시를 써온 시인의 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특징 가운데 특징이다. 따지고 보면 이 시에도 깊은 역사성이 있겠지만, ‘겨울 바다’는 사춘기 소녀들의 감상을 대변해 주는 시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는 “겨울 바다”가 도피와 몰각의 공간으로, “미지의 새”는 사랑이나 그리움으로 쉽게 치환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적당한 난이도와 허무 의식과 감상주의가 조합된 이 시는 박인환(1926~1956)의 ‘목마와 숙녀’ 함께 오랫동안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문학병을 안겼다.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문학수첩, 2013) 첫머리에 실려 있는 ‘나무와 그림자’ 전문이다. “나무와 나무그림자 / 나무는 그림자를 굽어보고 / 그림자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 밤이 되어도 / 비가 와도 / 그림자 거기 있다 / 나무는 안다” 이 짧은 시는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비중 있게 활용되는 그림자론을 떠올려 준다. 당신의 그림자는 밤이 되어도, 비가 와도 사라지지 않고 당신 곁에 있다.
장정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