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참사 그다음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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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취재를 하다 상대에게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좌절감을 느낀다. 당신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난다. 유가족을 만날 때, 참사를 다룰 때 특히 그랬다.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하기 무서웠고 그럼에도 무언가를 써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다.

지난해 12월 29일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대학원 동기를 잃었다. 그는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불과 얼마 전 대학원 종강모임에서 만나 각자 광주,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는 고충과 자부심을 나눴다. 다음 학기에는 어떤 수업을 들을까 수다를 떨었다. 위염 증상이 있다 해서 나는 그의 술잔을 대신 받았다. 그는 광주에 놀러 오면 맛있는 식당에 데려가겠다 약속했다. 나는 정말로 광주에 가 얻어먹을 작정이었다.

소식을 듣곤 한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불안 증상 속에서 일하고 밥 먹고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밤이 되면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험한 꿈을 꿨다. 참사 이틀 뒤, 대구시 분향소에 유가족(친척)이 올지 모르니 취재를 가라는 데스크의 지시에도 ‘못 가겠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가족을 잃은 이를 만나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리자 마음이 덜컹했다. 추모식, 집담회, 추모집회 등 그간 참사 유가족을 만났던 취재 현장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마음을 주변에 이야기한 다음부터 잠을 좀 잤다. 2일 대구4.16연대 등은 동성로에 시민분향소를 차렸다. 조문을 마친 시민들을 붙잡고 ‘어떤 마음으로 분향소에 왔냐’ 물었다. 그들은 눈시울이 빨개져서 그날의 기억, 참사에 대한 부채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곤조곤 말했다. 어떤 이는 “뉴스를 보는데 희생자 수가 자꾸 늘어나 힘들었다”고 말하며 펑펑 울었다. 그 소리에 기대 나도 처음 타인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렁그렁한 눈들을 마주하며 나는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 대구4.16연대는 2일부터 4일까지 대구 동성로 옛 대구백화점 앞에서 추모분향소를 운영했다.

대구지하철화재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아리셀 참사, 그리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여러 번의 참사를 통과하며 나는 어딘가 고장 났다. 평소에 잘만 타던 버스가 갑자기 뒤집히는 상상을 하거나 아무 근거 없이 주변인들이 위험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유가족, 참사 현장 지원 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참사는 왜 반복되는가, 정말 막을 수 없었나’ 혼자선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계속 곱씹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참사에 대한 기억이 개인적인 동시에 공통적이라는 것, 단 한 가지였다.

마음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내가 만났던 희망의 순간을 자꾸 생각하려 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방문한 안산에서 단원고 2학년 3반 부모들은 대구4.16연대 멤버들을 ‘이웃, 친형제 이상의 가족’이라고 말했다. 10년간 서로 들여다보고 술잔을 기울였기 때문이라 했다. 지치더라도 멈추지 않고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의 얼굴이 희망의 순간이다. 나는 그저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앉아 듣고 기록하려 한다. 난 무언가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모두 내가 희망을 만난 순간이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