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조선 시대 양반의 이사와 점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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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이른바 중산층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꽤 있다. 그 가운데 일정 정도 되는 아파트 평수와 배기량 및 생산처에 따른 승용차의 수준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중산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때문에 사회에 진출해서 일정 시기가 되면 일정 정도 수준의 아파트에 들어가야 하고, 이후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중산층의 상징에 부합되는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은 많은 도시인들이 꿈꾸는 삶 가운데 일부가 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은 대부분 기득권이다 보니, 집의 크기 역시 이미 일정 정도 정해진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장자나 종손이 되어 집을 지켜 가는 것은 넓의 의미에서 가家를 유지한다는 차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중요하기도 해서, 이사는 그야말로 중대사 가운데 중대사이기는 했다. 그러나 누구나 좀 더 편하고 안락한 환경을 원하듯, 조선시대 역시 이러한 욕망이 다르지는 않았다. 선산에 살고 있었던 노상추 역시 그랬다.

1777년 음력 12월 7일, 노상추는 이곳저곳에 그을음이 남아 있는 집안을 둘러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불로 인해, 집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목조 중심인 가옥과 아궁이를 활용하는 화목 난방의 특성 탓에 조선의 건물이 회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현실이지만, 분가한 세월을 생각하면 번듯한 새집을 지어 이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러한 마음은 차가운 한겨울 바람도 꺾기 힘들었다. 땅 보는 사람에게 부탁한 후 혹한의 찬바람을 맞으면서 직접 평소 눈여겨 보았던 우곡의 신기와 월평 지역을 돌아 다녔다. 아무래도 완전한 빈터에 집을 짓기보다 집이 조금 있는 터였으면 했는데, 다행히 괜찮은 터가 눈에 들어왔다. 매물로 나온 터는 두 채를 합해 일곱 칸 정도 되는 집인데, 새집을 지을 너른 터도 마련할 수 있을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계약을 서둘렀다. 이제 이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 집은 집터만 산다고 이사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요즘도 집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직장과의 거리나 출근하기 편한 교통 여건이듯,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 시대 역시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와 가까워야 했다. 그런데 기존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터를 산 탓에, 논밭이 집터를 따라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에 있는 토지를 팔아 집 주위에 있는 토지를 사기로 한 이유였다. 종 만의萬儀를 데리고 주위 좋은 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산지기 세귀를 만나, 토지를 사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우선 새로 지을 집터에서 멀리 떨어진 개령의 논 40마지기를 처분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1마지기는 대략 200평, 즉 660㎡로 보면, 8,000평(2만 6,400㎡) 쯤 되는 넓은 논이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노상추는 우선 류택수라는 생원이 가진 목화밭 30마지기를 구입했다. 목화 농사가 힘은 들지만 환금성이 좋아, 집안 경제의 기반으로 삼기에 좋은 대상이었다. 게다가 류택수는 당시 급전이 필요했던지 이 밭 전체를 85냥이라는 헐값에 내놓아, 더 이상 잴 필요가 없었다. 류택수의 목화밭을 싸게 산 덕에 노상추는 문동에서 목화밭 15마지기와 논 12마자기를 추가로 구입할 수 있었다. 꽤나 든든한 결과였다.

이제 남은 것은 집을 짓고 이삿날을 잡는 일이다. 노상추는 우선 이삿날부터 잡기로 했다. 길일을 잡고 그에 맞추어 집을 짓는 일정이 비록 일은 거꾸로 하는 것 같아도, 이삿날이 잘 나오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점쟁이가 친 점괘에 따르면, 올해 안에 이사를 하는 게 길吉하다고 했다. 그해라고 해야 불과 20여 일도 남지 않았는데, 당장 집을 지어 이사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묘수는 있었다. 작지만 일곱 칸짜리 집이라도 있었던 지라, 필요한 세간과 일부 식구들을 데리고 이사라는 형식은 갖출 수 있었다. 이사는 한 셈이고, 노상추는 그렇게 새로운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실제 평생에 이사가 많이 있는 일도 아니니, 운수가 길하다는 데 앞뒤가 바뀐들 어떨까? 이제 번듯하게 집을 짓는 일만 남았다. 운수가 길했던 해에 이사를 했던 탓이었을까, 노상추는 3년 뒤인 1780년 무과에 합격했고, 영남 남인으로서 그 어렵다는 선천宣薦(선전관 천거)에도 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결과가 노상추 본인의 노력에 따른 것이기는 했겠지만, 운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왕이면 길일을 잘 선택한 결과였다고 믿고 싶은 일이었고, 이러한 방식으로 점이나 무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 쌓여 왔다.

이사와 결혼 날짜를 잡고, 자기 노력을 해치지 않게 할 좋은 날을 위해 점괘를 뽑는 거야 누가 머라 할 일은 아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올해 운수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이나 조심해야 할 일들을 점검해 보는 것 역시 삶의 지혜 가운데 하나다. 국가 경영이나 정책,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에 이러한 무속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속의 힘이 법과 이성의 영역까지 침범하면서, 소소하게 한해를 점치는 즐거움마저 잃어버린 2025년 새해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