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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이 술렁였다. 역모였다. 정조는 직접 금위영에 거둥해서 역모를 꾀한 문인방文仁邦 등 죄인들을 심문했다. 왕권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를 도모한 일이었기 때문에, 크고 작음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약간은 어설프게 보였던 역모지만 한양 분위기는 이 시기 날씨만큼이나 얼어붙었다. 행여 잘못된 말 한마디로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1782년 음력 11월 20일의 일이다.
노상추가 이 역모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안이 밝혀지고, 역모를 했던 이들을 대상으로 공초가 진행되면서 치밀했던 준비가 재구성됐다. 이 사건을 박서집朴瑞集의 고변이 없었다면, 역모로 인한 피해는 적지 않았을 듯했다.
역모의 시작은 송덕상宋德相의 탄핵과 유배였다. 송덕상은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다가 축출된 홍국영洪國榮을 위해 상소를 올렸다가, 이 일로 탄핵 당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되자 신형하申亨夏는 송덕상의 유배형이 과하다면서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섬으로 귀양을 갔고, 박서집은 이러한 신형하의 절의를 칭찬하는 시를 지었다가 같은 이유로 같은 섬에 유배되었다. 시세보다 절의를 따랐던 사람들이 같은 유배지에 모인 형국이었다.
역모를 고변했던 박서집은 귀양 간 섬에서 우연히 이번 역모의 주모자였던 문인방과 동거했다. 당시 문인방은 송덕상을 큰 스승으로 모시면서, 스승의 억울함을 풀고 잘못된 정치를 꾸짖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서집은 유배지를 관리하는 배소관配所官에게 알렸고, 역모는 그대로 조정까지 알려졌다. 박서집은 송덕상이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체제를 전복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터였다.
밝혀진 역모의 전모 역시 꽤 치밀했다. 당시 주모자 문인방은 송덕상의 제자였던 이경래와 서로 왕래하면서 역모의 필요성을 공유했는데, 이경래는 송덕상의 유배로 사태가 급해졌다면서 빠른 거행을 촉구했다. 이로 인해 문인방은 이경래를 도원수로,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이들은 같은 당색을 가진 사람들과 노복들이 많아 정변을 일으키기 용이했던 양양에서 거병하여, 강릉, 원주, 동대문으로 들어가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역모에 대한 당위를 만드는 시도도 진행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미래 예언서였던 <정감록> 글귀를 이용해서, 여러 사람에게 곧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재난과 화변에 대한 예언서였던 만큼,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또한 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해석하여, 곧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소문도 함께 퍼트렸다.
물론 이들의 예언은 실제 일어날 일이라기보다, 그들의 의지를 특정 글귀와 별자리에 투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당위를 소문으로 만들면서 그들 스스로 그에 대한 민음까지 가졌던 듯하다. 당시 문인방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승문연의>, <경험록>, <신도경>, <금귀서>와 같은 책을 함께 공부했다. 대체로 불교와 도교 사상을 결합한 신비서나 이서異書였는데, 당시 이 책들을 평가한 대부분의 기록은 ‘요술서’라고 표현했다. 거병의 당위가 예언서나 미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박서집의 고변으로 인해 이 역모는 모의 단계에서 발각되었다. 문인방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여기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문인방의 고향인 곡산부는 고을의 격이 현으로 강등되었고, 정조는 <정감록>을 엄하게 금지하는 윤음을 내렸다. 대부분의 민중 봉기에 빠지지 않는 감초처럼 인용되는 <정감록>이었던 터라, 새로울 것도 없는 윤음이었다.
세상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오지 않은 변화는 미래 예측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시대의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변화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미래 변화의 결론을 규정하고, 그 결론이 특정 사건의 형태로, 또는 특정하게 정해진 방식으로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것은 논리 비약에 비약을 더해도 얻기 어렵다. 역성혁명과 같은 큰일 앞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이러한 비약을 용인하곤 했다. <정감록>이 많은 조선 역모의 명분과 근거가 되었던 이유다.
2024년 오늘, 세상도 변했고 주권도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 민주주의로 무장한 사회에서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뺏어 오겠다는 발상도 허탈하기 이를 데 없거니와, 실행 시간과 여건을 무속이나 미신으로 설명해야 가능하다는 소식은 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발전마저 이처럼 쉽게 되돌릴 수 있는 그들의 배짱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묻고 싶은 오늘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